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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Jun 01. 2023

초록으로 유쾌한 사칙연산하기

@ 사진 출처 : 프랭크 모데나, 바실리카타

드디어 열무 물김치 완성!

통에 담고 보니 커다란 김치통이 7할 정도 채워졌다.


연극을 끝내고 무대 뒤에 선 배우에게 밀려들던 허탈이 그 순간 내게로 오고 있다.

기진맥진 상태로 멍 때리듯 김치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담는 내내 힘들었던 나의 수고가 일순간 사르르 녹아내린다.


모순적인 야릇한 감정이 화선지에 먹물이 퍼지듯 나에게 파고든다.

'분명 힘들었는데 개운하고 뿌듯한 이 기분은 뭐람.

여하튼 고진감래스런 일이라 치자.'


김치를 담그는 일은 언제나 대한민국 주부에겐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보니

눈 앞 결과물을 향해 내가 과한 생색을 내더라도 애교로 너그럽게 봐주지 않을까.


"기어코 해냈구나. 장하다."라고.

그리고 하얀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맛있다라고.


김치를 담그는 절차라면 3단계로 이론상 그리 복잡하진 않다.

그러나 실제로 채소를 다듬고, 씻고, 버무리는 과정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을뿐더러

손가락과 손목 관절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줘야 하고

등과 허리를 구부정한 채로 장시간 일을 해야 하는 통에

입에선 '아이고'하는 시름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래서 살림을 하는, 먹거리를 담당하는 입장에선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 되고 말았다.

손맛 좋은 지인으로부터 김치 공수를 받는 행운이 있다면 그야말로 금수저!


애써 담근 김치에서 본연의 감칠맛이 난다면 천만다행이지만

들쭉날쭉한 손맛 탓에 불량한 미각을 유발한다면 정말 큰일이 되어 버린다.

식구들의 젓가락이 도통 김치 쪽으로 가질 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아까우니 버릴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나의 뱃속으로 다 들어간다.

점점 나는 슈렉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치유할 수 없는 나의 똥손을 긴 시간 원망했다.


시판 김치를 사 먹으면 될 일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노느니 염불 한다고 딱히 바쁠 것도 없고 해서

김치를 담그다 사달이 나는 때가 주부로 사는 동안 너무 잦았다.  


나의 친정 엄마, 시엄마는 대충대충 하셔도 맛이 있던데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두 분 발끝도 닿지 못하고.

노력해도 안될 일인가 싶다.  



쥐구멍에도 볕 들 때가 있다더니

이번 열무김치는 웬일로 맛이 있다.

소가 뒷걸음치다 얻어걸린 횡재수의 맛이

혓바닥을 지나간다.

양도 많았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라도 부여잡고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싶을 만큼 시원하고 감 칠 나다니!

아직 김치 담그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계시인가 싶다.


지나친 자찬이면 어떤가.

기분 좋은 착각이면 어떤가.


슴슴하니 소면 말아먹기 딱이다.

맵콤 시원한 맛은 갈아 넣은 곶감의 은은한 단맛과 어우러져 김치말이용 물김치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쫄깃하게 삶은 소면을 말아먹는 상상을 한 것뿐인데

입에 한가득 침이 고인다.


이 순간 9회 말 역전 홈런을 날린 타자가 나보다 더 짜릿하랴.

나는 담장을 넘기는 장외 홈런을 쳤다.


날도 더워지는데 면 좋아하는 서방님 생각하니 '얼씨구절씨구'가 절로 나온다.

당뇨를 앓고 있는 서방님에게 국수를 먹이는 일은 죄스럽지만

모태 국수 애호가인 서방님에게 국수를 못 먹게 한다면 그건 형벌과도 같은 일이다.

면을 끊으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데 어찌 하겠는가.

먹는 횟수와 양을 줄이기로 타협했다.



때 이른 장마인가 싶게 비가 이삼일에 걸쳐 내린다는 예보를 듣고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잘 키운 열무들이 계속 내린 비에 녹을까 봐, 웃자랄까 봐

노심초사하며 주말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직장인인 동서랑 만나서 같이 수확하자고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이 동서가 출근을 하지 않는 토요일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기다리던 주말이 되니 예보가 한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다.


잔뜩 먹색을 품은 오전 하늘은 내 머리 위 지근거리에 내려앉았다.

그때까지 비는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먼저 도착한 나는 열무를 정신없이 뽑기 시작했다.

손바닥만한 면적이니 열무 양이 많아봤자지 했다.

오산이었다.

뿌린 씨앗이 거의 발아되어 자란 덕분에 뽑힌 열무의 양은 내 기준으론 어마어마했다.

겨울 저장 김치에 준하는 정도라면 가늠하기 쉬울 듯했다.


씨를 심을 때 간격을 두었지만 크는 중간에 솎아 주질 않아

빽빽하게 자란 열무는 얼마나 늘씬한지...

이틀 전 친구가 한 무더기 뽑아갔고

나도 듬성듬성 뽑아 겉절이 하듯 김치를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양이 엄청났다.

친구는 작물이 자라는 중간중간 틈을 내주기 위해서 솎아 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이 사태가 벌어졌다고 엄청 쿠사리를 주었다.


빽빽하게 들어 찬 작물들은 바람도 볕도 부족해

튼실하게 자라지 못하고 쭉정이가 된다는 사실을 또 깜빡했다.

그저 소복하게 자라는 것이 이뻐서 흐뭇하게 감상하다 이 지경이 되었다.


반쯤 열무를 뽑았을 즈음 동서가 비를 몰고 왔다.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작물 위로 떨어진다.

우산을 받쳐 들 사이도 없이 비를 맞으며

뽑아 놓은 열무를 봉투에 담아 얼른 트렁크에 실었다.

이제 급한 불은 꺼졌다.


가뿐 숨을 몰아 쉬고 나니 그제야 앞사람이 보인다.

번갯불에 콩 볶 듯 순식간에 일을 해치운 두 아지매 자신들의 괴력에 멋쩍은 웃음이 터진다.

마주한 두 여인의 입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하하하.



열무 물김치를 담을 때 기본양념에서 액젓을 뺀다면 감칠맛이 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간만 맞다면 그런대로 먹을만하다.

오렌지나 감 같은 과일로 단맛을 내고, 청양고추로 매운맛을 보태니 오히려 담백하고 깔끔하다.

내가 비릿한 젓갈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평상시에도 아주 소량만 넣곤 했었는데 이번엔 아예 뺐다.


그리고 열무가 너무 연해서 절이는 과정도 생략하고

묽게 밀가루풀물을 끓여 식힌 후

양념을 섞어 휘휘 젓어 씻어 놓은 열무에 부어준다.


김칫국물의 양은 국수를 말아먹어야 하니 넉넉하게 하고

양념 재료들은 모두 갈아서 넣어주면 깔끔한 물김치가 완성된다.

시판용과 다름이 없다.


고진감래로 탄생한 별거 아닌 열무 물김치 덕분에

달아나려던 입맛이 지금 유턴 중이다.  

기온이 높을수록, 쨍한 날이 길어질수록 열무 물김치의 마력은 더 강해질 것이다.

휴.



40년 지기 친구, 둘에게 내 집에서 한 끼 식사를 대접한 일이 있었다.

집밥을 먹이고 싶었다.

차림은 화려하지도 거하지도 않았다.


돼지 삼겹살 수육, 소고기 된장찌개, 무생채, 열무김치, 마늘잎 간장절임 그리고 쌈채소.

귀리와 검은콩을 섞은 잡곡밥이 담긴 그릇을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수육은 된장을 넣지 않고 간장과 다시마, 마늘, 생강, 흑설탕, 맛술 그리고 월계수잎 3장을 넣고

30분 정도 푹 삶아서 식힌 후 썰어 놓으니

동파육의 팔촌쯤 되는 색을 품고 쓰러진 도미노형상으로 접시에 놓인다.

간간하니 보들보들한 맛이 난다.

역시 수육은 삼겹살이 안성마춤이야.


내가 한상 차려 줄거라 미리 말하면

친구들이 손사래 치며 한사코 밖에서 먹자고 할 것이라

소리소문 없이

이른 아침 시각에 준비한 후

냄새가 빠지도록 환기를 시키니 그야말로 완벽한 007 작전 수행이었다.

성공!


뭐든 미루지 말고 하자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살면서 앞으로 몇 번을 차려 줄 수 있겠나 싶어 그리했다.

남이 해 주는 음식은 다 맛있다며 먹기를

갈구하는 친구들에게 따뜻한 한 끼 밥상을 차려 주고 싶어 그리했다.

내가 텃밭에서 기른 쌈채소를 먹이고 싶어 그리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식사를 준비한 나에게 엄청 미안해하며 마음이 불편했을 친구들이 아주 맛있게 먹어주니

나야말로 마음으론 부자가 되었다.


친구들은 조금만 먹겠다더니 배가 고팠던지 제법 많은 양을 먹었다.

여러 장을 겹친 상추 위에 고기 한 점과 얹은 고명으로

한 쌈 크게 싸서 입이 터지도록 구겨 넣었다.

수북했던 잎들이 세 여자의 몸으로 들어갔다.

수북했던 수육이 세 여자의 몸으로 자리를 옮겼다.

뚝배기 가득했던 된장찌개도 세 여자의 뱃 속에서 출렁거렸다.


드러난 그릇의 바닥을 보곤 섭취량에 세 여자는 겸연쩍게 놀랐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실컷 웃고 떠들고 남편들 뒷담도 주거니 받거니.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 다했는데

우리 집 식기는 코렐이라서 다행히 건재했다.



'좋은 것 아끼지 마세요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옷 예쁜 옷

잔칫날 간다고 결혼식장 간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 옷 되지요


마음 또한 아끼지 마세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스런 마음 그리운 마음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되지요'

/ 나태주 님 <아끼지 마세요> 발췌



내가 더 사랑하기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로

내가 우선 품어 주기로

내가 더 내어 주기로 맘을 먹으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솜털처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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