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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Sep 20. 2023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쓰듯이 사진을 찍다

마을 축제 스케치

얼마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마을 축제 행사 촬영에 협조할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타지역 사람도 가능하다는...말에 귀가 솔깃했다.수고비도 준다는데... 제시한 금액이 참여할 시간 대비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금액이어서 끌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내 마음을 더 강하게 끌어당긴 것은 


'사람 찍기'였다. 


그동안 사진기를 들고나가 거리를 걷다 보면 시선이 가는 사람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해도 셔터를 누르기 쉽지 않았다. 초상권 침해에 걸릴 수도 있어서 웬만하면 피했고 그래서 늘 목마른 갈증처럼 내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9월 어느 토요일, 마을 축제 행사 스케치 사진을 당당하게 찍을 기회가 온 것이다. 


뽕도 따고 임도 보고...

'이게 웬 떡!'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생생한 현장 분위기를 담기 위해선 종일 행사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 넘사벽이었다.

지금 나의 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라는 생각에 갇혀 결정을 머뭇거렸다.

꼬박 하루를 고민하다 흔쾌히 수락했다. 

그날만큼은 사람들을 향해 렌즈를 겨냥해도 뒤탈이 덜 할 것이므로 아무리 고민고민해도 내가 주저주저할 일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사진 촬영 신분증'을 목에 걸고 다니면 그래도 조금은 자유로운 촬영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여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로망이었으니까 기꺼이 수락함이 당연했다.


두드리면 열리나니.

나의 간절함이 통했나 보다.  

하루 종일 사진 찍는 나를 상상해 본다. 꽤나 매력적이고 신이 난다. 


아뿔싸! 복병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기습적으로 터지나 보다.

간절했던 오랜 바람이 이루어진다는 설렘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앞선 염려가 마음을 어지럽히는지 행사장 가기 전날 밤늦게까지 정신이 말똥말똥한 채 제대로 잠을 설쳐 버렸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머릿속은 더 맑아지기만 할 뿐 야속한 마음으로 멀찍이 도망간 잠을 애타게 긴 시간 부르고만 있어야 했다.

양 만 마리, 양 만 한 마리, 양 만 세 마리...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는 그날따라 더 우렁차게 씩씩하게 나의 귓가로 몰아쳤다. 

쿵. 짝. 쿵. 짝. 쿵 짜짜. 쿵작.


행사장은 여느 장소와 다를 바 없이 여러 개의 부스와 체험용 기구들,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만국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쨍하고 해 뜨면 무지 더웠을 텐데 다행히 구름이 잔뜩 덮여 있었다. 덕분에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쓰듯


현장 스케치 사진을 종일 찍었다. 구석구석 사람이 다닐만한 곳은 어디든 순간순간을 기록하듯이 사진기 셔터를 눌렀다. 역시 사람들의 거부감이 덜 느껴졌다. 다행이었다. 나 또한 정면보단 비켜 찍거나 후면을 사각 프레임에 두었고, 흥겨운 축제 분위기를 담아보려고 노력했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행사임에도 참여한 연령대가 확연하게 비교되었다. 중장년층과 유아, 초등학생층이 대세인 반면 십 대와 MZ세대는 숫자가 적었다. 공부하느라 짬이 나질 않거나 이런 행사가 진부하다고 느껴선지 모르겠으나 그 두 세대는 아무튼 간간이 보였다.


넓지 않은 행사장을 아이들은 신나게 달리고 기웃거렸다. 아기 얼굴은 인꽃이라더니 즐거워하며 행복해하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행사 마당은 꽃밭과도 같았다. 하늘하늘 가을 하늘 아래 흔들리는 코스모스처럼 수줍어하는 아이, 노란 해바라기처럼 작은 키를 한껏 늘리려 애쓰며 체험 활동에 전념하고 있던 아이...

해야 할 공부에서 잠시 벗어나 그들이 마시고 누볐던 행사장 공기는 어린아이들에겐 청정한 산소였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누리는 소박한 사치였을지도 모르겠다.


굽은 등에 두 손을 모은 채로 사뿐사뿐한 걸음을 옮기는 어르신들의 뒤태는 여유로움이었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먹지 않아도 분주한 행사장에선 일상의 외로움이나 고독함이 잠시 비켜 나 있었다. 말 벗의 동행이 없더라도 어르신들의 얼굴에서 이미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주민 자치 센터 프로그램을 수강하고 있는 이들이 그간 갈고닦은 실력들을 뽐내고 있는 공연장, 세련미는 떨어지지만 떨림을 안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짬 시간이지만 연습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선 긴장감이 돌고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 더러더러 따로국밥 상황이 발생했지만 개의치 않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나아가는 모습에 응원의 박수가 터졌다. 그 순간을 포착하느라 용감하게 뻔뻔하게 셔터를 눌러 대는 나의 짓궂음도 만만치 않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굵은 선이 가로 세로 그어진 얼굴, 구부정한 자태로 중심을 잡지 못해 전신이 비틀거린다 해도 어르신들의 눈빛과 열정은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참 열심히 하셨다. 노란 석양빛의 아름다움이 이보다 더 할까. 아니다.


오후 5시경이 되니 축제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내빈석이 꽤나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을 축제에 그렇게나 많은 인사들이 와야 했는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해가 되진 않는다. 참석 인증숏 찍 듯 포즈 취하고 식상한 축사를 줄줄이 하는 통에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애꿎게 시간만 빈번하게 확인했다. 공연의 흥은 이미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리곤 그들 다수가 20~30분 후 자리를 떴다. 그들만의 리그를 빠르게 마치고 돌아갔다. 

정적이 감돌았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마을 주민들의 신나는 경연이 시작되었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진심 어린 환호는 함성이 되고 힘찬 응원가가 되었다. 거기선 주민이 감독이었고, 배우였고, 관객이었다. 이런 맛과 멋이 동네잔치가 아닐까 한다. 


그렇게 연극과도 같았던 나의 사진촬영도 종료되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에서 종일 무겁게 달고 다녔던 짐을 내려놓았다. 비로소 심신은 가벼워졌지만 이유 모를 허탈감이 몰려들었다. 걱정으로 시작한 일이 어쨌든 끝났다고 생각하니 다리가 풀려 비실비실거렸다. 오후 9시가 넘어선 시각 집에 돌아와 그제야 나는 깊은 잠과 만날 수 있었다.


좋은 경험을 하도록 제공해 준 분에게 이제야 서면으로라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미숙한 실력으로 나름 열심히 했지만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신경 쓰인다. 나 또한 주민의 한 사람으로 여겨 준다면 최소한 면피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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