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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바다 Sep 09. 2024

20살 첫 연애의 악연

N에게 첫사랑은 없다.

N은 병원에서 몇 개월의 회복기간을 거쳤다.

수능을 두 달 앞둔 9월이 되자

다시 고등학교 3학년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병원에서 나름대로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한 결과

수능에서 언어 1등급, 외국어와 사회탐구, 국사 등에서 2등급을 받고

수리영역에선 제대로 미끄러져 4등급을 찍었다.

하지만 그 기간에 국화꽃 향기와 함께 또 한 번 등장한 달빛도사와의 작은 사건이 있었다.

그때 또 하나의 세계의 운명을 바꾸었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법대 진학을 희망했던 N이

대학 지원서를 넣기 바로 직전에 연극영화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 경험했던 그 세계는 무려 1300년대 고려 말이었는데..

지금도 역시 현실감이 없고

그러나 벼락이 때려치 나라의 운명이 세치 혀의 말 몇 마디로 바뀐 순간이었기에

그 이야기는 추후에 남기려 한다.



-


2008년 3월.

빠른 90년생.

만 19세인 20살.  

서천대학교 연극영화과 영화연출전공 1학년. N.


69학번이 학과장

75학번 라인이 교수를 하고 88학번이 강사로 들어오며

97학번이 조교를 하고 00학번 졸업생이 상업영화 연출부 스텝을 뽑는다며

02학번부터 아래로 줄줄이 스카우트해 간다.

04학번이 전체 학과 학생회장 자리를 맡고 있다.

대대손손 거미줄처럼 끈덕진 학연으로 이루어진 집단.


영화장비실 및 편집실엔 영화 예고편 편집을 위해

지박령처럼 살고 있는 선배들이 어디서 맞춘 듯한 까만 단체복과 노숙자스타일

패션으로 끼니를 때우며 영화를 편집하는 곰팡내 나는 풍경이 흔하게 펼쳐진다.

교내 식당이나 동아리실 건물, 체육관 등 어딘가에서 노랫소리나 우렁찬 대사 연습 소리가 들려

쳐다보면 100퍼센트. 연극영화과의 연기 전공 선배들이다.


카메라 다루는 법의 1부터 100까지 니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다루라는 교육에 따라

N 또한 그 소속 일원으로서 충실히 교육을 받는다.

군대 같은  선후배 간의 절도 있는 집합, 기합 문화와 수시로 열리는 열중쉬어, 엎드려뻗쳐 문화를

군대도 가보지 않은 N은 대리 경험을 하며 선배들 말 잘 듣는 신입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권위적이고 때론 기분 나쁘게 곁들여지는 폭력과 비인권적 조롱과 희롱이 시대가 흘리고 간

똥덩어리처럼 찜찜하게 남아있던 분위기.

폭력이니 인권이니 하는 거대한 단어들보다 실제론 참으로 쓸모없고 에너지 소모적인 악습이었다.

다행히 N의 08학번부터 그런 추잡하고 쓸데없는 악습을 없애자는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조금은 자유로운 발언과 창작 활동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N도 신입생 초기엔 엠티니 오티니 간담회니 대화의 장이니 하는 테마로 이뤄지는

선배들과의 가늠할 수 없는 술자리에 억지로 치이는 기간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제 막 성인이 된 N의 인생 한 챕터에서

더 골 때리는 사건은 악습의 밑바탕에 짙게 깔려있는 복잡하고 문란한 이성교제와 성관계 문화.

일명 '개 족보'였다.


N은 지나온 썩은 것들이 스스로 자멸되고 새로운 관계성과 추상적 관념들이 싹을 트는

수많은 세계의 중첩점을 겪으며 지나가야 했다.


무난하고 평범하고 조금 개성 있는 추녀 타입이라면

조용히 지나갔을 수도 있는 20살 첫 성인의 해.


N은 달빛도사에게 자처해서 얻은 붉은 장미의 기운을 한껏 머금고 있었다.

그 기운은 남자들의 시선이 쏠리게하는 도화기운 가득한 얼굴과

늦은 밤 자꾸 잠 못 들게 상상을 자극하는 굴곡진 바디라인.

그리고 속을 꿰뚫는 듯한 눈빛과 낮고 여린 음성의 기운으로 붉게 붉게 새어나갔다.

말 그대로

N은 신입생들 중 날고 기는 외모의 배우지망생 여자애들을 압사시키고  

비공식 신입생 탑으로 선정되어 원한 바 없는 뜨거운 남자들의 호기심 속에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중심을 잡으며 살아갔다.

하루 건너 고백을 하는 남자선배와 다른 과 신입생들 까지 매일 난감한 고백공격을

잽싸게 피해 다녔던 이유는 사실 N도 알지 못했다.

그저 이상하게 그 누구도 마음에 끌리지 않았고 몇몇은 시시껄렁해 보이기만 했다.

수많은 세계의 복잡한 인연의 실타래들을 봐와서 인지

누군가와 함부로 인연을 맺는 것에 어떤 두려움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


영화 전공의 수업은 N의 적성에 매우 적합했다.

영화는 인류 문명 개화기, 기술의 꽃이 피어나면서 생긴 종합 예술이다.

산업혁명 초기에 처음 상영된 영상물은 기차가 달려오는 장면을 찍은 것이었는데

앉아있던 관객들은 정말 기차가 달려오는 줄 알고 깔려 죽을까 봐 도망칠 만한

대단한 문명 발전의 상징 그 자체이다.

1초에 24 프레임, 혹은 30 프레임, 60 프레임이 모여

마치 순간이 모여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연금술이었을 것이다.   


이 예술이 N의 인생에 적합하고 중요한 방향성을 만들어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중첩된 세계 중 한 가닥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나가는 N의 거대한 비밀 임무와도 퍽 닮아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커리큘럼으로는

영화의 기초가 되는 사진수업, 미술, 철학과 시나리오, 미학 연구,

촬영조명과 세트, 연기 실습, 음향 설계, 연출 수업 등이 있었다.


만약 N이

이 학교의 학연- 다시 말해 끊어지지 않는 동아줄을 잡고 정해진 보편적 경로를 따라간다면

연출부, 조연출을 단계적으로 닮아가며 조금은 가난한 영화인의 일상을 견뎌내고

끈덕지게 시나리오 하나 붙잡고 늘어져 눈먼 투자자 하나를 만나게 된다면

장래 희망 그대로 영화감독이라는 명함 하나쯤은 내보이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악연으로 마주한 그와의 첫 연애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2009년 5월.


눈치코치 신입생을 지나

드디어 선배님 소리를 듣는 2학년이 되었다.

영화 연출 수업에선 각자 각본/감독을 해서 첫 단편 영화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겨울 방학부터

N은 기숙사에 틀어박혀 엄청난 영감으로 신들린 듯 써 내려간 시나리오가

한 편 있었다.

어느 날 바람 부는 창가에 다시 달빛도사가 나타나 이 시나리오를 얘기하고

이 이야기가 머릿속에 들어온 건 또 어떤 세계의 실화인지 물으며

또 한 번의 모험을 떠나고 싶기도 했지만

기다리는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N의 시나리오는 담당 교수의 호평을 받고 가장 먼저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다.  

서천대 연극영화과에는 한 가지 관례 같은 문화가 있었는데

2학년이 처음으로 제작하는 단편영화에는

반드시 외부 배우가 아닌

서천대 연기 전공자를 캐스팅해야 하며  

선배들이 후배의 첫 영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스텝으로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N의 우려는 자신을 두고 맘대로 번져나간 깨림칙한 소문들이었다.

이미 신입생 때부터 숱한 주목을 받고 고백공격을 받았지만 일괄 여지도 없이 거절을 했기 때문에

연영과 선배들 사이에선 얼굴 반반한 거 믿고 싸가지없고 도도하게 군다는 뒷담화들이

안개처럼 피어나 나돌았다.

하지만 천만 다행히 도 교수에게 호평을 받는 반전 드라마로 인해

연영과의 고학번 선배들까지 호기심을 느껴 N의 영화제작에 흔쾌히 스텝으로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반응은 학생들이 아닌 교수실에서 나타났다.

학과장 교수의 호출을 받아 교수 연구실로 갔더니

N의 영화 시나리오를 앞에 두고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N의 개인사를 마치 영화 평론을 하듯 이리저리 파고드는 것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교수가 그랬던 이유인즉슨

N의 시나리오에서 왜 자꾸 누군가 자살을 하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신입생 1년 동안 시나리오 수업에서 써낸 시나리오들은 다 다른 이야기였지만

일관되게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이 자살을 하는 요소가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그걸 교수들끼리 모여 삼삼 오오 썰을 풀다가 2학년 때 첫 제작하는 영화의 주된 내용까지 자살이다 보니

상담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N은 스스로 정신에 문제가 없음을 어찌 증명하기도 그렇고

자살을 주된 맥락으로 쓰는 것에 개인적인 이유를 찾기에는 별 이유가 없었기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누군가 집어넣는 듯이 번쩍이며 떠올랐던 모든 장면들에서

등장인물은 큰 일을 치른 후 모두 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N이 이야기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N을 선택해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따라서

교수와 심각해질 뻔했던 상담은 별 결론 없이, 큰 문제없이 끝났다.

대수로지 않고 평범하게 대화를 나눈 N을 보며 교수는 그저 한 인간의

예술적 특성인가 보다 로 결론을 내려주었다.

  

-


N의 영화 시놉시스는 대략 이러했다.

타이틀: '낡고 붉은 킬러'

-20대 후반의 여주인공 '안유지'는 일본인 40대 남자 '킨지'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사귀게 되는데

그 일본인 남자는 알고 보니 간첩이었고!

사실 킬러였던 안유지는 치밀한 계획 후에 킨지를 속이고 칼로 찔러 죽인 후!

함께 등대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는 결말이다.


N이 일본인 남자 '킨지'로 캐스팅한 06학번 남자선배는

N에게 왜 하필 남자를 일본사람으로 설정했는지,

대사나 상황이 블랙코미디 같은 부분이 있는데

그러면 차라리 일본인이 아니라 북한에서 온 잘생긴 간첩이었다고 하면 더 재밌지 않겠냐는

코멘트를 해주었지만,

상대 남자를 일본인으로 한 설정은 절대 바꾸면 안 될 것 같았다.

 

킨지가 인천 오이도에 마련한 밀항 배를 타고 도망가기 전

빨간 등대 위 난간에 걸터서서 안유지와 뜨거운 키스를 나눈 후

안유지가 숨겨둔 칼을 꺼내 킨지의 등을 찌르고 피를 철철 흘리며 떨어져 죽는 엔딩 씬이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클라이막스가 것이었다.  


선배들은 무슨 2학년이 벌써 그런 자극적인 영화를 찍냐면서 은근한 핀잔을 주기도 했고

이미 겉멋이 들었다며 빈정거리거나 혹은 너무 기대된다며 응원을 해주기도 하는 등

N의 첫 영화는 찍기 전부터 학과 내 화젯거리가 되었다.


-


대망의 첫 촬영날.

안유지와 킨지가 처음 어두운 골목에서 만나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리고

퇴폐적 분위기의 재즈바로 킨지를 유혹해서 끌고 간 안유지는

일부러 술에 취해 무대 위의 조명 아래서 서로 옷을 벗기고

관계를 하는 장면을 찍을 땐 촬영 전날부터 얼마나 선배들 사이에서 난리였는지  

캐스팅되지도 않은 연기 전공 선배들 몇몇이 간식을 준다는 핑계로 몰려와 구경을 했다.

하지만 N은 동요되지 않고 두 명의 남녀 무희가 어우러져 마치 무대에서 현대 무용을 하듯

몸을 움직이며 관계를 하는 연출을 선보였다.

그날 오이도 노래방을 재즈바로 바꾼 N의 연출력과

자칫 움츠러들 수 있는 장면에서 배우들이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이끌어낸 N은 하룻밤새

스타가 되었다.

그간의 숱한 지저분한 뜬구름 같은 비난들을 죄다 가라앉히고

'리더십 대박인 연출 천재'의 별명을 얻으며 그간의 상황을 깡그리 전복시켰다.

사실 N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자신 안에 그런 의연함과 리더십이 숨어있는 줄 몰랐고

그저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만들어지는 기분이었다.


-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배경은 인천 오이도에 있는 빨간 등대였다.


마지막 촬영 소식이 다시 학과에 전해져서 그 장면을 촬영할 땐

필요하지도 않은 스텝을 자처한 선배들이 나타나 잡일을 도맡겠다며 나섰다.


빨간 등대에 도착해 카메라를 세팅하고

배우들 위치를 정하고 리허설을 한 후 촬영 소품을 꺼낸다.

그중 중요한 것은

신문지로 둘둘 말아온 식도였기에 N과 스텝들 모두 조심스러웠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하는 강렬한 주황빛 태양이 작렬하는 골든 타임.

등대 위 난간 위에서 끌어안은 안유지와 킨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로 온몸을 파고들듯 뜨거운 혀를 움직이며 키스를 나누는데

안유지는 천천히 벽돌에 숨겨준 칼을 꺼내 일본인의 목덜미와 등에 찔러 넣으려는 상황.

안유지의 그 손을 클로즈 업으로 촬영하는데

갑자기 칼에서 번뜩! 하며 어떤 눈부신 빛이 반사되었다.  

불현듯 광선 같은 빛이 칼날에서 번쩍거리니 그걸 들고 있던 여배우는 깜짝 놀라서

그만 칼을 손에서 놓쳐버렸다.

무려 5m 높이에 달하는 등대 난간에서 말이다.

N이 특별히 비싸게 구매해서 마트의 칼 갈아주는 정육점에 부탁을 해 날이 서게 만든 식도였다.

그 살아있는 흉기가 5m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두 동강이 났다.


오이도 빨간 등대는 주말을 맞아 제철 회나 조개구이를 먹으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5m 위 하늘에서 갑자기 땅으로 추락한 빛나는 칼이 챙! 하며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칼날이 튀어 다니는 광경을 목격하곤 아연실색했다. 


N은 눈앞이 아찔했다.

잠시 후

여러 명 목격자의 불같은 신고를 받고 달려온 인천 경찰아저씨에게

N과 일행들이 포착되었다.

두 동강이 난 식도는 증거물로 수집되었다.


위용위용위용 ~~ 난생처음 타 본 경찰차 안에서 N은 그저 속으로 하느님조상님부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달빛도사를 만난다면 이건 또 무슨 세계가 영향을 끼친 것인지

물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혹시 이것 때문에 인생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건지,

퇴학을 당하는 건 아닌지 온갖 망상에 빠져있다가 조용히 파출소에 도착해 경찰 아저씨 책상 앞 의자에

다소곳이 앉는다.


피부도 말투도 거칠거칠하고 배가 남산처럼 부풀어있던 인천의 경찰아저씨는

N의 카메라와 촬영 소품을 확인하고 여자저차 사연을 들은 후

서천대학 영화학과 사무실에까지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한다.


어찌 된 건 진 알았지만 신고가 동시에 6건이나 들어왔으니 우리도 서류 처리를 해야 한다며

다행히 친절하게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그런 식도를 함부로 가져와서 조심성 없게 쓰면 어쩌냐고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고,

밑에 누가 서있다가 칼이라도 맞았으면 너희는 그날로 감방행이라느니...

상상만 해도 손이 떨리는 엄포를 놓고는 귀찮은 표정으로 사건조서를

마무리하고 N과 촬영팀을 보내주었다.


다음 날

학교는 또 아주 스펙터클한 사건소식에 한바탕 시끄러웠다.

영화를 찍으러 가서 진짜 영화를 찍으면 어쩌냐는 둥..

지나가는 선배들마다 한소리씩 해대니 N은 부끄럽고 민망해서 낯이 뜨거운 날이 이어졌다.  


결국 이 난리를 피우고 폐기처분 해야 하나

고심했던 영화는 예상을 뒤엎고

카메라 메모리카드 속에 아주 완성도 높은 장면으로 고이 저장되어 있었다.

N은 삭제버튼을 수십 번 누르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어쨌든 연출 수업 최종 결과물로 제출은 해야 했기에 편집을 시작했다.


-


드디어 모두의 관심 속에 강의실에서 상영되는 N의 첫 단편영화!

'낡고 붉은 킬러'

20분의 짧은 러닝타임이 끝난 후 반응은 아주 판타스틱했다.

몇몇 선배는 마치 등대 위에 지는 붉은 노을과 번뜩이는 칼날의 미쟝센이

히치콕의 ‘싸이코’ 를 연상시킨다느니..

별의별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수업은 겨우 끝이 났다.


'휴... 제발... 조심하자.

N...  진짜 뭐 하러 자꾸 자살에 꽂혀 가지고는...

내가 미쳤지.. 다음부터 누구 찔러 죽이는 건

절대 안 써! 등대 비슷한 거 근처에도 가나 봐라... '

 

N은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허허 웃으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


그 학기 영화연출 수업에서 N은 놀랍게도 A를 받았다.


N의 간절한 바람대로

칼이나 등대와의 인연은 그 후로 더 이어지지 않았지만

어떤 새로운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 영화가 불러일으킨 나비효과가 시작되었다.


그날 후배들의 첫 단편 영화를 감상하겠다고 강의실에 들렀던

04학번 남자 선배 한 무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변종수'였다.


서천대학교는 본관 2층에서 5m쯤 떨어진 별관 2층으로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야외에 지어진 노출형 나무다리.  

그런데 그 다리를 이용하는 학생이 별로 없을 거라 예상하고

어쩔 수 없이 임시로 지어놓은 건지 다리의 폭이 매우 좁았다.

마주 보고 두 사람이 걸어오게 되면 한 사람은 다리 난간에 바싹 붙어

길을 비켜줘야 하는 정도였다.

그런 불편함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다리를 건너느니

차라리 1층 계단으로 내려가 정문으로 걸어서 출입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 다리는 지나다니는 학생들 없이 거의 텅 비어 있을 때가 많았는데

가끔 그 사실을 아는 학생은 혼자 그 다리 위에 걸터앉아

조용히 담배를 피우거나 사색을 즐기거나 허공에 앉아 멍 때리는 분위기를

즐기기엔 나름대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더운 여름의 어느 날.


땀이 삐질삐질 나는데

N은 별관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문득 그 다리에 아무도 없을까? 하는 이끌림에

나무다리를 건너기로 한다.


'아무도 없겠지. 그럼 잠깐 앉아서 바람이나 좀 쐬고 갈까...?'

그 다리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불어오는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기에

다리 가운데 서있으면 매우 시원하기도 했다.


N은 별관 문을 열고 홀로 유유자적 다리 위를 건넌다.

그런데

그 맞은편에서 누군가 본관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는데

04학번 변종수 선배였다.


N

'어라... 저 선배는 왜 여기 온 거야..

혼자 바람 쐬긴 글렀네....'


그때 N을 발견하고 환한 미소 띤 표정으로 걸어오는 변종수.


"N. 안녕."


변종수는 거의 N과 호흡이 닿는 거리까지 밀착한다.


"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뵙네요..."


변종수

"아... 이 다리?  04가 이 다리에 올 일이 있겠냐?

아까 건너편에서 너 보는데..  이쪽으로 가길래. 따라왔지."


N

"네? 아... 저를요?"


변종수

"응. 있잖아. 지난번에 네가 찍은 영화.... 진짜 잘 봤어."


N

"아.. 네.. 감사합니다... 그때 강의실에 오셨나 봐요?"


변종수

"어. 동기들하고.  

후배들 영화 상영한다는데 보러 가자 해서 다 같이 갔지.

나 너 수업하러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자주 봤는데?

우리 인사도 자주 하고, 그때 술자리에서도 봤잖아?"


N은 그제야 어렴풋이 스치듯 인사를 나눈 기억들이 났다.

학과에서 모일 때마다 주로 근거리에 있었던 변종수의 묘한 시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가끔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N

"아.. 네네... 맞아요... 하하"


변종수

"나 항상 네 근처에 있었어. 몰랐나?  

아무튼... 너 술 좀 취했을 때.. 내가 연애상담도 했는데... 니 덕분이다. 그때."


N은 도무지 금시초문인 얘기라 생각하던 차에 문득 흐릿한 데쟈뷰처럼 뭔가 떠올랐다.


N과 2학년들의 첫 영화 발표가 끝난 후

수고했다는 의미로 강사와 선배들이 술자리를 만들어 초대를 했었다.

당연코 화제성 1위였던 N의 양옆엔 얼굴이 달아오른 남자선배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별 질문을 다 해댔다.

거기다 자꾸 들이붓는 술을 어거지로 마시다

N은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러웠다.

 

겨우 기숙사까지 동기들 부축하에 기어가다시피 하다가

한바탕 전봇대에서 오바이트를 하고 필름도 끊긴 채 곯아떨어진 그날.

그리고 다음날 뒤집어지는 위장의 쓰린 고통을 느끼며

다시는 술 따위 취하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기억은 바로 그날이었다.

그 술집에서 정신을 못 차리며 테이블 의자에 늘어져있던 N에게

어떤 남자 선배가 다가와서는 무용과 여자애랑 사귀는데 걔가 영 태도가 이상하다느니

여자들의 성욕이 어떤지 저떤지 뜬금없이 질문 공세를 해댔다.

무용과 그 여자애가 하도 들이대는데 착한 애 같아서 사귀기로 했다느니

근데 알고 보니 걔가 색기 폭발하는 걸레인 것 같다며 밤에 너무 능숙해서 자기가 무서울 정도라느니..

그렇고 그런 허세 가득한 변종수의 변태적 자랑인지 하소연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귓전으로 흘려 들었었다.

그렇게 20년 인생 독보적인 솔로였던 N에게 자꾸 여자의 심리와 스킨십 취향을 묻던

그 묘한 느낌의 선배가 바로 변종수였다.


N

"아... 아~! 아! 선배님.. 그때~~!"


변종수

"하하 그래. 그때 ~~ 기억나지? 어!"


N

"네네... 기억이.. 납니다."


뭐 반가운 기억이라고 그걸 들먹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빨리 이 다리를 벗어나고만 싶었지만 변종수는 일찍 보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변종수

"근데 너 그때 나랑 약속한 거... 언제 지킬래?"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N

"네?..... 약속.. 이요?... 제가 무슨 약속을 했나요? 쓰읍.... 죄송한데 기억이. 안 나요..."


변종수

"그때 너한테 상담 받고 받고..

그 무용과 여자애랑 계속 사귀다가...

나 최근에 헤어진 지... 며칠 안됐어.

사실.. 네가 찍은 그 첫 영화... 그게 나를 아주 미치게 하더라.. 하하 

나 걔랑 헤어지면... 너랑 사귀기로 한 거 기억나냐?"


N은 이 무슨 개뼉다구 같은 망언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사실일리는 없었다.

변종수 같이 문란하고 변태끼 다분한 인간에게 자신이 그딴 약속을 했을 리는 만무했다.


N

"어..... 선배님... 뭔가..  잘못 기억하시나 봐요!  하하하!!

저 말고 다른 애랑 약속하시고... 저랑 막 헷갈리시나 봐요."


변종수

"그래...?"


N, 격하게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변종수

"아닌데..?  니 눈빛이.. 엄청 나를 원하던데"


N

"에....?"


변종수

"N. 우리 사귀자."


N은 정말이지 그 나무다리를 폭파시켜 버리고 싶었다.

꽤 학번 차이가 나는 선배라 뭐라 쉽게 차버리기도 퍽 난감했다.

뒷말 많고 여자관계 문란하기로 소문한 변종수였다.

N이 듣기엔 그 무용과 여자애랑 사귀면서 08학번 연기전공 여자애랑 양다리를 걸치고

지하철역 모텔로 수시로 여자랑 들어갔다는 목격담도 한 둘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애매하게 엮이는 순간 평화로운 학교 생활은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아주 예의 있어 보이게 거절할 수 있는 건지 혼란스럽던 와중에

변종수는 점점 더 느글거리는 눈빛을 장착한 채

N의 팔에 슬금슬금 손가락을 대고 쓸어내렸다.


객관적으로 변종수는 처음에 뭣모르는 여자들이 얼굴과 몸만 보고

침을 흘릴 정도로 혹하게 생긴 얼굴이다.

하지만 이 여자 저 여자 다 건드리며 개처럼 행동하는 그의 본질을 알면

그보다 더 추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안 그래도 숱한 고백을 다 거절하며 누구 하나 성에 차지 않을 만큼 기준이 높은 N이었기에

그런 쓰레기의 고백 따위 대차게 거절하고 가는 게 그리 힘들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 N의 의지와 달리 

갑자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으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떤 세계에서 쏟아진 귀신들이 N의 온몸을 밧줄로 꽁꽁 묶은 듯한 기분이었다.

 

'어... 어..  내 다리 왜 이러지?'


N은 점점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기가 힘들더니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풀썩하고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변종수가 아래로 미끄러져 주저앉은 N을 갑자기 와락 끌어안았다.


"어어...!  N.  괜찮니?"


N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아오 씨...  내 몸이 왜 이래... 미치고 환장하겠네 진짜!!'


변종수, 느끼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너 고백을 이렇게 받는구나? 풋.  귀엽네."


N은 속이 메스꺼워졌다.

"아.. 아니요.  저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나서... 어... 몸이 좀 이상해서요.."


변종수

"그래그래 알았다 ~~ 너 자존심 센 여자구나. 잘 알겠다.

그럼 난 개방적이고 자존심 따위 없는 남자니까 내가 잘 맞춰주면 되지 뭐.

우리 오늘부터 1일이네?"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속은 메스꺼운 N의 머리 위로

불현듯 호출하고 싶은 그 존재.


'도사님... 아니.. 달빛 도사... 이... 새키....   이번엔 또 뭐야....!! '


느끼함과 만족감으로 가득 찬 변종수에게 안겨 질질 다리를 끌며

겨우 나무다리를 건너 함께 본관으로 들어가는 N.


부실하게 지었는지 끼익 끼익 거리는 나무다리 위에서

묘하게 달빛 도사의 쯧쯧.. 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다음 날부터, 그다음 날에도

변종수는 완전히 신이 나서 온 동네방네에

N과 사귄다는 소문을 퍼트리며 자랑을 했다.


N은 절망적 이게도 또다시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지나가는 08학번 연기전공 동기 여자가 한마디 비꼬고 간다.

"어머... N. 너 04에 변종수 선배랑 사귄다며?

네가.. 그 말로만 듣던 얌전한 고양이구나... 대 ~~ 박."


갓 제대해서 가십거리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니던

선배들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후배님아. 너 변종수 그 새끼 감당이 되겠냐?

걔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 애들이 한 트럭이다 ~~

그 새끼는 근데 벗고 춤추는 거 좋아한다면서.. 크큭

자칭 무용과 킬러였는데~  변 씨가 이번엔 웬 일로 같은 과 후배를 꼬셨지?

어... 혹시... 후배님... 내숭 백 단? 설마 후배님이 꼬신 거...?"


N은 함부로 나불대는 그 입들을 다 꼬메버리고 싶었지만

일을 돌이키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장난질에 걸려들어

며칠이 흘렀다.

분명 어떤 어떤 세계의 중첩점에서 일이 꼬인 게 분명하다.

이번엔 사태가 심각한데 달빛도사는 도통 나타날 기미가 안보였다.


억지로 어떤 기운에 저항하며 그와 연을 끊으려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 할수록

N에겐 오히려 이상한 상황들이 연출되고

그가 내뿜는 강한 압력에 휘둘려선 수시로 강의실 구석에서,

그의 차 뒷좌석에서 입속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그의 뱀 같은 혀의 놀림을 당해내야 했다.


그러던 중

학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늦은 밤 기숙사로 올라가는 숲길.

변종수는 방향을 틀어 자기 자취방에서 영화를 보고 가라는 것이다.


소문대로 듣던 변종수의 뻔한 수법이었지만

N은 차라리 기회다 싶었다.

얼마 전부터 해외 직구 대행 쇼핑몰에서 휴대용 전기 충격기를 구비한 바 있다.

이걸 쓰는 날이 오지 않길 바랐지만

운명은 물건과 함께 어김없이 펼쳐지듯 발현한다.


전투모드를 장학하고 변종수의 자취방으로 향한다.

변종수는 설탕 가득 넣은 달달한 커피를 한잔 주더니

그 커피의 뜨거운 연기가 다 식기도 전에

소파 위에 N을 밀쳐 눕히고는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는 N의 상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다 못해 잡아 뜯어버리기 시작했다.


N은 안간힘을 다해 변종수를 밀쳐낸다.

하지만 발정 난 남자의 힘을 이기긴 너무 버거웠다.

셔츠와 브라는 이미 쥐어 뜯겼고

이젠 청바지 단추까지 뜯어버리려는데

N은 정말 모든 힘을 다 모아서 양 발로 변종수의 어깨팍을 걷어차서 밀어낸다.

밀린 변종수는 눈을 희번뜩 하게 뜨는데 그 흰 눈자위가 노래지며 실핏줄이 서는 게 보였다.

그는 혼자 연거푸 욕설을 내뱉으며  

다행히 이런 위태로운 순간에는 어떤 강력한 압력에서 벗어나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었다.


"꺼져 이 개새끼야!"


-


잠시 눈알이 빨개진 짐승의 발광이 멈추었다.


변종수는 어이없다는 듯 썩은 표정이었다.

 

"뭐냐...?

너도  기대하고 온 거잖아? 어?"


"아니!! 전혀!

너 같은 새끼한테 당하는 건... 정말 역겨워.

너 이거 범죄야 이 미친 새끼야."


변종수는 다시 느글한 미소를 장착하고 회유를 시작하려 했다.

"뭐...?  우리 N이 아직 순진해서... 좀 당황했구나?

그래... 경험이 없으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근데 말이야...

네가 진짜... 안 해봐서 그런 거다?

여자애들이 처음엔 좀... 싫다 하고 그래도 말이야. 막상 사랑하는 남자 친구랑 하면...

그 뒤론 엄청 좋아하거든~? 그리고... 범죄라니... N아...  학교애 모르는 애들 없어~

니가 나 좋아하는 거 ~~ 우리 애인사이인 거~~ 하하하"


더 대담해져야 했다.

전기충격기가 정답이 아니었다.


N

"하하하! 진짜 웃긴다.

나 처음 아닌데?"


변종수

"뭐?"


N

"내가 좀 순진해 보여도. 전~~ 혀! 처음 아니거든.

남자새끼들 대충 사이즈만 봐도 나오지.

너 같은 새끼는 소문만.. 말만 허세 쩔어선 여자들이 너 얼마나 더럽다고 욕하는지 아냐?

니가 내 근처에서 숨만 쉬아도 역겹도록 싫어!"



변종수

"뭐라는 거냐...  그래? 다 해봤어?  그럼 뭐 무서울 것도 없네~

네 실력 좀 보여줘. 어? 이리 와."


N,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내가 너 같은 새끼랑 왜 사귀기로 한 줄 아냐?

너한테 성희롱 당한 여자애들, 성폭행당한 전여친들...

내가 싹 다 만나서 녹음했거든. 니가 했던 그 더러운 변태플레이.

니 얼굴 제대로 찍어놓은 여자애들도 있더라?

더해봐 이 새끼야.

지금도 생중계되고 있으니까."


변종수는 순간 당황한 얼굴로 N의 휴대폰을 쳐다본다.

정말 발신번호에 112가 찍힌 채로 빨간 녹음 버튼이 깜빡거렸다.



변종수 짜증과 함께 일그러지는 표정.

"아오... XX. 진짜.."



N

"너한테 당했던 무용과 여자애들이 그러더라!!!

너같이 미쳐 날뛰는 변태새끼라서 잘하기라도 하나 했더니

니꺼 완전 코딱지만 하고. 더럽게 못해서. 고자인 줄 알았다던데?"



변종수

"........   뭐라고?!!"



N

"사귀기로 한 거 당연히 뻥이다 이 새끼야.

제대로 만난 적도 없이 맨날 어디 방으로

차 안으로 자취방으로 불러들여서 덮치려고 하는 이 변태 개새끼... 같은 선배님?

내가 모은 증거들 벌써 경찰서 넘겼다. 이 녹음은 마지막 결정타가 되겠지.

니 더럽게 날름대는 혀 받아주느라... 나는 정신과 상담받아야 될 판이야."


N은 잽싸게 일어나 흐트러진 옷을 부여잡고 가방을 집어든 채

미친 듯이 달려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엘리베이터는 생략하고 숨이 차게 계단을 나르듯 뛰어 바깥으로 탈출했다.


-


그 후

변종수는 어찌 되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N은 그동안 변종수에게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밀려

그 더러운 키스를 견뎌내야 했지만

그 외엔 변종수를 만났다는 여자애들을 실제로 만났고

변종수의 온갖 추잡한 성관계와 비겁한 협박등을 모두 동의하에 녹음을 해두었다.

112에 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미리 저장해 둔 친구의 이름을 112로 바꿔놓고

변종수의 자취방에 들어가기 전에 녹음을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분에 못 이긴 뒷말 많은 변종수가 XX 년, XX 년 등 온갖 추잡한 소문을 내며

복수하려 들거라 예상했지만

학과 내에선 이상하게 소문 한 가닥도 없이 평화롭기만 시간이 흘렀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렇게 변 씨와 N 커플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보이던 관종들이

둘이 사귀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보였다.


모든 것이 미묘하게 변해있었다.


'뭐지..? 그 비겁한 새끼라면 미친 듯이 발악을 하면서

온갖 이상한 소문은 다 내고 다닐 텐데..?

반응이 왜 이렇게 조용해...  수긍하기로 한 건가...

사람 그렇게 쉽게 안 변하지. 그럴리는 없어.

아님. 그 새끼 진짜 내 말대로 고자인가..?

그동안 무용과 여자애들과의 양다리니 섹스니 하는 소품은 죄다 허세에 쩔어 만들어낸 거품이고

알고 보면 성욕에 미친 고자가 맞나?

내가 자기 고자라고 먼저 소문낼까 봐 숨죽이고 있는 건가!'


그 순간

N의 코에 갑자기 달달한 포도향이 풍겨왔다.


'음? 이 달달한 냄새...?  청포도 사탕 냄새...?'


그 달달한 냄새에 이끌려 어딘가로 걷다 보니

학교 구내식당 옆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것 같은 틈새 같은 공간에

웬 포도나무가 한 그루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었다.



'뭐지?... 식당 옆에 이런 게 있었어?   왜 지금 보였지?'

 

그때였다.


"달달~~ 한 머루포도~  한 알 맛볼 텐가~?"


익숙하고 그리웠던 그 목소리.

달빛 도사였다.



N은 이제 그런 식의 갑작스런 도사의 등장이 놀랍지도 않았다.


"예예... 어째 이번엔 꽃이 아니라 포도알 위에 계시는군요~?"


도사

"너 얼마 전에... 속으로 내 욕했지?"


N, 뜨끔해서 입만 쩝쩝할 수밖에..

"하하....   제가 무슨.... 욕이라곤 배워 본 적도 없습니다."


도사

"... 변종수 그놈.. 타고난 태생이 여자들 홀리는 뭔가가 있긴 한데 말이야..

희한하게 너는 안 넘어갔어~?"


N, 역시 도사는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흥... 어차피 다 알고 계시면서...  근데

사실.. 저도 좀 흔들리긴 했어요.. "


흔들렸다는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당시 N은 자신의 솔직함을 과장해서라도 달빛도사에게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N은 변종수와 처음 대면했던 그 뒤풀이 술자리에서 그를 뚜렷하게 기억했었다.

옆에 와서 은근히 치근덕대며 연애 상담을 하는 척했지만

N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어필하기 위한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동기들에게 질질 끌려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변종수는 N에게만 특별히 숙취해소 음료와 딸기우유, 청포도 사탕 같은걸 사서

먹여주기까지 하고는 다른 선배들의 술잔을 받지 않게 혼자 흑기사를 자청했던 것이다.

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N은 기이하게도 그의 옷에서 풍기던 은은한 먹물 냄새 같은 것에 마음이 이끌렸다.

서예원에서나 날 법한 은은한 먹의 향기가 왜 그의 가까이에서 풍겼을까.

그의 향기가 맞을까. 확실한 건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N은 그 먹 향기에서 알 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움의 감정에 순간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래서 N은 더럽기로 유명했던 변종수가 불편하긴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고백을 수락하는 쪽으로 어떤 힘에 이끌려 버렸다.

하지만 그의 본질을 느낀 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N의 마음에 살랑거리는 설레임과 그리움이 스며들게 한 그 먹의 향기는

확실히 변종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도사는 별 다른 표정이 없었다.


도사

"그렇지. 니가.. 싫은 걸 억지로 할 성격이 절대 아니지.

그런데 아무튼 다행히도...  악연을 잘 끊어냈구나."


N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저를 이끌었어요.

그 묘한 먹 향기가 그랬죠... 그의 것이 아니었을 거예요.

또 다른 건요... 고백을 받았던 그 나무다리 위에서 뭔가가 더 있었어요.  

누가 자꾸 제 귀에 대고 속삭이더라고요.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변종수한테 안겨서 그 나무다리를 지나갈 때도...

같이 밥을 먹을 때로...

자취방에 일부러 따라갔을 때도...

계속 들렸어요.

그 소리가."



도사

"흠... 목소리라...?  어떤 말이었지?"



N

"외나무다리다.

원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라고...

누가 자꾸 귀에 대고 속삭이길래...

전 도사님 일거라 생각했지만... 목소리가... 도사님하고 영 다르더라구요.

그래서... 직감했죠.

도사님이든 아니든...  또다시... 내가 바꿔야 할 어떤 세계가 드러났구나! 하고요."



도사는 왠지 조금 아련한 표정이었다.

이제 모든 걸 이제 스스로 깨달아가는 N이었다.


도사

"점점 경지가 올라가는구나.  잘 되었다.. 잘 된 일이야.

그래. 변종수는 너와 지독한 악연이다.

다만 이렇게.. 스치는 악연이지."



N

"어우... 악.. 연?  단어만 들어도 무섭네요.

그래도 스친다니... 스쳐서 지나간다는 거잖아요?

제가 뻥하고 차버렸으니... 스쳐 간 거예요?

끝난 건가... 그럼 됐죠 뭐."



도사

"아니다. 악연은 쉽게 지나가는 인연이 아니다.

스친다 해도... 그 스쳐갈 때의 생채기는 결국 피를 보게 만든다.  

네가 그를 끊어낸 것 같지만...  악연이니 다시 만나게 될 운명이다.

그리고 또 지독하게 엮이게 되지.  술이 원수다 ~~라는 말...  들어보았지?

세상 사람들이 푸념처럼 늘어놓은 그 진리 같은 말.

악연이 서로 엮일 때 자주 매개로 쓰는 물질이 바로 그거다.  술.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지.  

신의 세계의 맑은 정기가 담긴 술은 가히 신선이 즐기는 것이지만

그 외에 술이라고 하는 이 세계의 물질은... 인간사 악연을 이어지게 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이기도 하다."



N

"하.....  그놈의 술... 갑자기 우리 아빠 생각나네요. 불쾌하게.

그래... 잘 마시지도 못하는 그놈의 술 때문에 변종수랑 엮여버렸죠...!

정말 더는 엮이기 싫어요.

그런데 저는 왜... 변종수한테서 그런 먹 향기를 느꼈을까요?"



도사

"그건 변종수와 너와 처음 연결되었던 세계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 악연의 실타래 속에 많은 인연이 엮여있지.

그것이 꼬인 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N

"그게 왜 하필 먹 향기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번엔 뭔가...

많이... 복잡하다는 건... 알겠어요."



도사

"자,  구름을 보니...  시간이 촉박하구나!

그 세계가 흘러가버리기 전에 얼른 가서 바로잡아야 한다!

자! 이 머루포도를 한 알 먹어라."


도사는 자줏빛의 머루포도 한 알을 따서 N의 입에 넣어준다.


포도가 입 속으로 굴러 들어간다.

포도 향기가 온몸의 세포로 스며들었다.


-


1593년.

잔잔하게 물결이 일렁이면서 아주 크고 깊어 보이는 호수 위에

고즈넉하게 기와가 고풍스러운 정자 한 채가 있다.  


N은 속살이 다 보이는 투명한 다홍색 한복 저고리에

발목까지 낭창하게 떨어지는 짙푸른 색의 한복치마를 두른 채

비슷하게 오색찬란한 한복을 빼입은 열댓 명의 여인들과 함께

정자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길을 만들어 놓은 숲 길이었다.

입고 있는 화려한 한복과 값진 진주와 보석으로 틀어 올린 머리가 주는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사뭇 긴장되는 공기였다.

화려한 여인들은 저마다 서글픈 게 내리깐 눈빛, 앙다문 입술에서 어떤 굳건한 결심들마저 느껴졌다.  



- 끝 -



- 6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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