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브런치북
너의 운명을 치유해 줘
08화
실행
신고
라이킷
18
댓글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남바다
Sep 09. 2024
선택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는 걸까.
인연은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593년.
크고 깊은 호수 위.
고즈넉하게 지어져 있는 정자.
화려한 한복을 입은 N과 열댓 명의 여인들.
정자를 향해 걸어가는 그들의 공기에 결연한 의지와 긴장이 감돌았다.
그녀들은 저마다 한쪽 팔에 나무 바구니에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과일과,
양념된
고기 산적, 기름칠된 동그랑땡, 진달래꽃 화전,
여러 개의 술병과 술잔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이 여자들..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지?'
N이 그녀들을 파악한 결과.. 분명 그 세계의 기녀. 기생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는 무엇이 있는지 덮여있는지 천 보자기를 들춰보니
탐스런 머루포도 대여섯 송이가 담겨있다.
이 세계로 빠져들기 전 달빛도사와 함께 나타난 포도와 같은 향기이다.
순간 N은 그 긴장되는 공기 속에서 그녀들과 발을 맞춰 부지런히 길을 걸으면서도
달빛 도사의 존재에 대해 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스쳤다.
N이 어떤 상황을 겪을 때마다 마치 운명의 방향을 틀어버리듯 달빛도사가 나타나서
꼬여버린 세계로 이동하고.. N에게 자발적으로 운명을 바꾸도록 만든다.
덕분에 N은 어린 시절 지옥 같았던 그 집에서 격정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운명을 개선.. 아니 거칠고 험난한 운명 그 자체를 치유하듯 스스로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데
어떤 존재가 되어왔다.
그렇게 중첩된 세계로 들어가 선택지를 바꾸고 결국 거대한 운명의 길을 바꾸도록 하는 게
달빛도사의 존재라면.. 그의 목적은 무엇일까?
왜 하필 N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정말 N이 원해서였을까. 이제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세계를 바꾸는 중요한 순간에 사실 N이 할 수 있는 없었다.
그 시점에 달빛도사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힘들이 N을 이끌어가지 않았다면
세계를 바꾸는 것도 운명을 바꾸는 것도 사실 불가능이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런 가슴의 질문들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다가
어떤 냉정한 여자의 목소리로 인해 생각이 멎었다.
"촉석루에서 꼭 나케우지의 오른쪽에 앉아."
누가 말을 한 건지 고개를 들어보니
N의 바로 앞에서 걸어가던
다부진
걸음걸이와
결연한
눈빛의
여인이었다.
상기된 채로 무게감 있고 대감집 마님 같은 낭창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
N이 대답이 없자 여인은 휙 - 하고 뒤를 돌아본다.
대답을 촉구하는 눈빛.
N
"어... 네? 뭐라고?"
여인
"촉석루에서.
나케우지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내가 왼쪽!"
다시 한번 엄청 비장함이 서린 그 목소리를 듣고
N은 지금 이 상황이
그저 기녀들이 양반들과 어울려 술 한탕하러 가는 자리가 아님을 실감했다.
N
"아.... 그.. 그래.. 아, 예.. 알겠습니다."
여인
"자네. 정신 똑바로 차리게! 실수하면 다 죽는 걸세.
모두 술에 취하면... 나케우지 왼쪽에서 내가 그의 목을 찌른다.
자네는 날렵하니 그가 오른쪽에 찬 칼을 뽑으려 하면
자네가 그의 팔에 매달려 무기력하게 만들어야 해."
N
"아.. 응... 네?!
제.. 제가 긴장이 돼서.... 이.. 잊어버렸나?
그러니까 무기력하게 어떻게... 요?"
여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뒤따라 따라오던 기녀들 역시 우르르 멈추었다.
"자네 정말..!
우리가 그들이 마실 술잔에 모두 꿀독을 발라 놓았잖니.
그래서 평소보다 빨리 취할 거다.
최대한 음식을 먹지 못하게... 그들이 술만 연거푸 마시고 젓가락을 들어 올리지 못하도록..
미인계로 붙들어야지! 그간 익혀오지 않았는가!"
N
"미..... 인계...? 그... 나으리 ~ 나만... 보세요..
뭐 그렇게요??"
여인
"최대한 저고리를 풀어헤치게.
발정 난 그놈들을 홀려서 음식이 아니라 자네 젖가슴을 만지려고 애가 타게 만들어야지.
그렇게 술에 취해 정신줄을 놓으면... 내가 틈을 타서 비녀에 꽂아둔 칼로 목의 급소를 찌른다.
오늘 밤이.. 내 지아비의 원수를 갚는 날이야... "
N은 소름이 돋았다.
'내가 결국... 사람 목을 찔러 죽이는 이 세계까지... 발을 들였어?
아니 내가 그럼 살인에 동조하는 건가? 아님 살인을 막는 건가?
살인자가 되라는 거야?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도사님 ~~!!! '
정신없이 긴장한 와중에 N을 포함한 기녀들은 촉석루라는 정자에 오른다.
이미 커다란 잔칫상이 4개나 이어 붙여진 채로 펼쳐져있고
잔칫상 아래 주변을 빙 둘러 뱀무늬 금박 자수가 놓인 두꺼운 푸른 방석들도 정갈하게 놓여있다.
기녀들은 저마다 약속한 듯 각자의 자리에 가서 앉는다.
N과 은밀한 계획을 나눴던 여인은 가장 첫 번째 - 대장이 앉을 법한 테이블의 가운데에서 왼쪽.
아까 말했던 다케 우지 라는 남자가 앉을 중심자리의 왼쪽 편이다.
N은 들었던 대로 그 중심자리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테이블 위엔 기녀들이 가져온 갖가지 음식과 술병으로 거하게 상을 차렸다.
누가 봐도 침이 고일 듯했다.
그러나 몇몇 기녀들이 주머니에서 왠 숨겨온 흙더미를 한 줌씩 잡아서 꺼내더니
그 먹음직스러운 음식들 위에 손을
탈탈 털며 흙을 뿌려대는 것이다.
여인이 기녀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보아하니
음식에 흙바람이 날아온 척하여 많이 먹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의 일부였다.
촉석루 앞에 드넓게 펼쳐져 흐르는 남강에 어둠이 깔렸다.
N
'뭐야... 나 진짜 어떻게 해야 돼...? 여기선 무슨 말을 하고,,
뭐가 바뀌는 건데...! 설마 내가 누굴 죽이진 않겠지..."
그때 낡은 삼베한복을 입은 머슴 같은 남자가 달려오더니
다급한 소식을 전했다.
"... 아씨들! 아씨들!
왜장들이 이제야.. 궐에서 축하연이 끝나고 출발한다 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서 그곳에서 주전부리를 이미 한차례 먹었다네요...
촉석루까지 도달하려면 꽤 오래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이럴 어쩌지요!"
여인과 기녀들은 낭패를 본 듯 순간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남자가 다시 소식을 얻으려 돌아갔다.
자글자글한 눈가 주름이 있어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기녀가
나케우지 왼쪽자리에 있는 대장 같은 여인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주 씨 부인!
왜놈들이 뭔가를 먹고 오면... 술에 취하기는 더 시간이 지체될 텐데... 어찌할 것이오!"
N은 순간 머리에 뭔가가 띵- 하고 울리는 듯했다.
'주 씨 부인..? 뭐지... 기녀들이...
서로를 무슨 부인이라 부르던가? 나 나름 국사 1등급인데...
그런 법은 없어.
게다가 이런 한복을 입은 시대에 이 정도 만찬이라면 사실 날고기는 양반들 잔치에서도
다 보기 힘든 수준의 값비싼 음식들인데...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게다가.. 성은 고사하고, 본명도 없이 남자들이 지어주는 기녀 명칭이나..
그나마 꽃이름 같은 걸로 불리던 게 기생이란 직업인데...
뭐지... 내 옆에 이 대장 같은 여자. 설마 기녀가 아닌 건가?"
그때 주 씨 부인이라는 여자가 다부지게 기녀들을 압도하며 말한다.
"자네들... 두려워 마시게.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테니.
그대들은 거사가 끝난 후.. 무사하도록 할 것이오.
나는... 지아비의 복수를 성공하지 못하면 더는 사람으로 살 이유도 없소.
음식을 조금 먹고 와서 술에 취하는데 지체된다 해도... 나의 계획은 변함없소.
그러니.. 그대들도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N은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고등학교 시절 스치듯 배운 어떤 시대 속 인물.
'보아하니... 왜놈이면. 일본이 침입하던 시대란 거고... 이들은 기녀들...
강이 흐르는 이 지역은... 어디지?
그런데 저 여자는 주 씨 부인이라... 기녀가 아니란 것이다.
주 씨 부인... 누구지?'
기다리는 왜군들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는 소식 이후
긴장했던 기녀들은 잠시나마 숨을 쉬는 듯했다.
가장 용기 있어 보이던 주 씨 부인이라도 얼굴에 서린 두려움의 그늘은
가려지지 않았다.
'무엇이 저 여자를... 누군가를 죽이기까지 하는 용기를 내게 만들었을까..?'
N은 그런 생각에 빠져 옆에 있는 주 씨 부인을 바라보는데...
주 씨 부인이 자신의 저고리 품 속에 손을 쓱 넣더니
작게 접어 숨겨 온 듯한 하얀 종이를 꺼낸다.
딱 보아도 깊은 사연이 담겨있을 법한 서찰이었다.
서찰의 겉면에는 빨간 직인과 함께
'
兵馬節度使 書信(
병마절도사 서신)'이라는 한자가 써져 있다.
주 씨 부인은 조용히 그 서찰을 펼쳐 읽는다.
N의 시선에도 훤히 보이는 서찰에 당연히
읽지도 못할 한자가 빼곡할 거라 예상했지만
N은 그 종이에 써진 글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훈민정음이다...!
당시 백성들과 여인들이 언문이라며 익혀 썼다는 세종대왕의 글자...'
지금 시대의 한글과는 모양새가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웬만한 것은 그대로 보고 읽을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훈민정음을 실제로 붓으로 써 내려간
그 글씨들을 보자 N은 경이로움마저 느껴졌다.
주 씨 부인이 처연한 눈빛으로 서찰을 읽는다.
<안사람. 보시오.
전쟁이 길어짐으로 인하야 나의 모든 부하와 관군들이 모두 전사하였소.
나는 진주성을 지키지 못하였으나 남은 내 육신마저 왜적의 손에 전리품이 되어 이 나라의 약점이
되지 않겠소. 이렇게 나는 나라의 신하로서
마지막
내
몫을
다하려
하오.
모든 집과 세간살이를 버리고,
부디
몸을
피해
살아가며
새로운
지아비라도
만나
평온하길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으나
왜적이 창궐하여 이 강산을 짓밟는 이 시국에 여인으로써 어찌 평온하게
절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부인 또한 이 유약한 조선에서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하길 바라오.
내가 죽어 저승에 가면 다음 생에 그대를 또 만나게 해 달라 염라대왕에게 간청이라도 올려보겠소.
이만 줄입니다. _ '최'가 '경회'.>
촉석루
-
N은 혼란스러웠다.
'진주성... 주 씨 부인... 왜놈들... 저 강물... 뭐더라..? 뭐지?'
그 순간 까만 서양식 복식에 허리마다 커다란 칼집을 찬 채
낄낄 거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간부급으로 보이는 왜군들 십여 명이 이 걸어온다.
까맣고 맨질맨질한 구둣발로 촉석루의 나무바닥 위를 헤집고 걸어 다닌다.
그러다 각자 직급에 맞게 자리에 앉아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있는 기녀를 만지고 주무르기 시작한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한 채 죽음의 연극을 시작한 기녀들은
아랑곳 않고 사내를 홀리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들에게 연거푸 술을 따르고
비위를 맞춰주기 시작한다.
처연하고 화려한 연극의 시작이었다.
기녀들의 웃음소리과 왜군들의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죽음의 신호탄으로 터지며 물결 위로 퍼져나간다.
-
가운데에 앉은 왜군의 대장. 나케우지는
잔뜩 흥에 겨워서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는데
굵고 푸른 옥가락지였다.
나케우지는 알 수 없는 일본말을 쏟아내더니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왜군들이 일제히 저마다 바지 주머니에서, 상의 주머니에서
저마다의 옥반지를 꺼낸다.
나케우지는 주 씨 부인의 손을 췩 낚아채더니 손가락에 옥반지를 끼워준다.
다른 왜군들도 일제히 자신의 옆에 있는 기녀들에게 옥가락지를 끼워주며
손가락부터 목, 입술을 물고 빨고 해 대는 것이다.
보아하니 반지 하나씩 껴주면서 조선인 애첩 하나씩 들이자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 순간. 점점 술에 취해 몸이 달아오른 다케 우진
도발을 한다.
"너는 최근에 조선에서 본 적이 없는 기생인데
이름이 뭐냐? 나는 처녀만 안아주는데 말이다.. 낄낄
너는 처녀인가?"
주 씨 부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띠며 답을 한다.
"내 이름은... 주가 논개요. 처녀가 맞소."
그렇다.
논개였다.
잊고 있었던 국사 교과서 속 한 페이지.
분홍치마를 입고 다부진 표정으로 그려진 한 여인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N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N이 배운 역사 속 그녀는 비극의 결말을 맞았다.
왜군 대장의 목을 찌르려다 비녀에 숨긴 칼이 들켜...
결국 악랄한 왜군 대장에게 치욕스럽게 겁탈을 당하고..
강물에 뛰어내려 자살한... 조선의 기생.. 논개.
'그 세계에선 비극으로 끝이 났다.
다시 그 세계가 돌이켜진 거구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럼 무엇일까.
결말을 바꿔야 한다.
논개의 죽음을 막아야 해!'
다케 우진 점점 술에 취해 악랄한 본성이 튀어나오며
달아오르는 아랫도리가 통제하지 않고 미쳐가는 듯 보였다.
이미 정신줄을 놓고 미끈미끈한 검은색 바지를 무릎까지 질질 내린 후였다.
여인의 손을 잡아채서 자기 팬티 속으로 넣어 조물거리게 하고 연신 그 끈적한
침을 토해내듯이 그녀의 저고리 고름을 풀어헤치고 드러낸 젖가슴을 마구 빨아대며 말했다.
"이 머리는 도대체 어떤 놈이 틀어 올려 준 것이냐? 아~?
조선 놈이겠지? 그렇담 너는 처녀가 아니라는 건데...
마음에 안 드니 머리를 다 풀어 내리거라! 당장!"
그리고는 여인을 바닥에 팽개치듯 엎드리게 하고 그녀의 틀어 올린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큰일이다.
이대로 가다간 저 왜놈 대장이 칼을 꺼내
논개의 비녀 꽂은 머리채를 잘라버릴 것이고
그 비녀 끝에 꽂힌 칼을 발견하면.....
바로 죽여버리겠지.
그러면... 비극의 반복이다.
N은 생각했다.
'아.. 정말 지옥 같다... 끔찍해.
이딴 지옥 같은 세계가 반복되고 있다니.. 너무 역겹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여인은 칼을 숨기고 있는 그 비녀를 들키지 않기 위해
다케 우지의 손을 잡고 힘껏 저항하며 몸부림을 쳤다.
열이 잔뜩 오른 다케우지는 꽥하고 연거푸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더니
여인의 저함이 거세지자
그가 차고 있는 칼집에서 무시무시한 칼을 빼어 들려고 했다.
그때
N이 다케우지의 오른쪽 팔을 온몸으로 부둥켜 끌어안는다.
"다케우지상!
어찌 그리 저 기녀만을 이리 탐하십니까?
옆에 있는 이 소녀.. 너무 외로워 질투가 나려 합니다!"
N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자신의 저고리 고름을 풀어헤쳐선 벗어던져버리고
속옷으로 입고 있던 흰 속치마의 가슴천마저 훌훌 풀어버린다.
하얗고 풍성해 보이는 젖가슴이 훤히 보이자 다케우지는 눈빛이 돌변하며
다시 대상을 바꿔 침을 질질 흘린다.
"오호라... 네년이 요물 중의 요물인가 보구나! 그래.. 나를 이리 원한다니
이런 목석같은 년은 치워버려라! 오늘 밤은 너로 정했다~!"
다케우지의 시선이 논개에게서 떨어졌다.
그때 N은 다케우지가 모르게 팔을 다케우지의 왼쪽으로 힘껏 뻗어서
논개의 머리에 꽂은 비녀칼을 슬쩍 뽑아버린다.
그리고 빠르게 자신의 머리채에 꽂는다.
N은 어떤 각오를 해야만 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이 죽는다 해도 달빛도사가 기다리고 있는 원래의 세계에서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지금의 세계에서 N의 세계가 미래라 해도 반드시 존재하는 세계이기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N
"어머... 그런데... 어쩌지요.. 다케우지상... 저 ~ 목석같은 기녀는 제가 알기로...
다른 사내들의 유혹이 워낙 많아서~ 거짓으로 가채를 올리고 유부녀인 척할 뿐..
처녀가 맞답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 전 강제로 혼인을 하게 되어
이렇게 머리를 틀어 올린 유부녀가 맞지요 ~~
다케우지상.. 송구합니다...
허나... 저는 처녀가 아닌데... 누굴 선택하시겠소?"
N이 비녀 칼을 슬쩍 가져가자 논개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버렸다.
칼이 발각될 위기는 넘겼지만 N이 뭘 어떻게 할 계획인 걸까 가늠할 수 없었다.
N조차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없는 그 순간
머리가 다 흘러내려 허리까지 풀어진 논개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른 기녀들에게 가야금을 켜라고 소리를 지른 후
춤을 추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논개의 매혹적인 춤사위에
다케우지는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옮긴다.
목석같은 처녀를 취할지, 요물 같은 유부녀를 취할지 고민하며 돌아가는 눈알에 광기가 서려있다.
촉석루 전체에 흐르는 가야금 선율에 따라 모든 왜군들이 정신을 잃어갔다.
논개
점점 판단력이 흐려지는 왜장들을 보며
다케우지의 부하들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다.
"오늘 밤은 ~ 이 몸이 다케우지를 모실 것이오!
그대들이 다케우지 상에게 평생 충성을 서약한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기녀들에게 끼워 준 그 옥반지를 빼내어
모두 나에게 가져오시오 ~~!
그렇다면 나는 밤새 이렇게 벗은 몸으로 춤을 출터이니!
다케우지상!
그대의 부하들이 얼마나 당신에게 충성을 하는지 보고 싶지
않소~?"
N은 세상에서 가장 요염하고도 대담한 기녀를 연기하는
논개의 비장하고 처연한 심정을 가늠하며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논개의 그 말에 발정 난 개처럼 일어나 팔다리를 요란하게 휘저으며 춤을 추는
왜장들은 논개의 치마까지 벗겨보겠다며
저마다 옆에 앉은 기녀들의 손가락에 옥반지를 빼내어
논개에게 던져주었다.
논개는 하나 둘.. 셋.. 자신에게 던져지는 옥반지를 양손에 한가득 낀다.
논개는 그렇게 10개의 옥반지를 손가락에 모두 끼고서는
다케우지에게 슬쩍 귓속말을 한다.
"다케우지상..내가 옥반지를 다 가지면 치마를 벗기로 했지요 ~ 허나
오늘 밤 그대에게만 보일 내 속살을 어찌... 저 부하들 앞에 내보이겠소?
다케우지상에게만 내 모든 순결을 바칠 것이니...
자, 나를 끌어안고... 어서.. 이리오시오 ~ "
논개는 열개의 옥반지를 손가락마다 수갑처럼 끼웠다.
그리고
달아오른 다케우지를 끌어안고 죽음을 춤을 춘다.
그렇게 왜장을 끌어안은 채 온몸으로 너울거리며
한 마리 결연한 나비처럼 춤을 추고 또 추다가
촉석루의 끝으로 향한다.
-
첨벙!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논개의 투신.
정신이 번쩍 든 왜장들이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논개가 다케우지를 안고 강물에 몸을 던진 후였다.
깊고 깊은 남강으로 둘의 육신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옥반지 10개를 낀 논개가 다케우지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놓지 않자
다케우지는 숨이 막힌다며 밀어내려는 사이 논개는 온몸을 던진 것이다.
짧은 비명소리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첨벙-"하고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물에 던져지는 듯한
장엄한 소리가 촉석루에 찬물을 끼얹었다.
세계의 운명이 뒤바뀌는 굵직하고 장렬한 소리였다.
그때 이 위대한 희생에 재를 뿌리는 옥에 티처럼...
술에 덜 취해 상황을 주시하던 왜장 한 명이
주머니에서 총을 꺼낸다.
이 모든 계략의 주동자로 보이는 기녀들을 모두 쏴 죽일 태세였다.
N은 눈앞에서 그의 총알이 가장 나이 많은 기녀의 가슴에 박히는
광경을 보았다.
나이 많은 기녀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튀었다.
기녀들은 저마다 비명을 질렀지만
누구 하나 촉석루에서 도망가진 않았다.
N은 자신의 머리에 꽂은 논개의 비녀 칼을 뺀다.
그리고
기녀들에게 마구 총을 난사하는 그 일본인 왜군의 뒤로 달려가
순식간에 목을 베어버린다.
그의 목에서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검붉은 피가
촉석루 바닥에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다케우치 외의 모든 왜장들은 죽지 않았다.
기녀들은 재빠르게 출동한 왜군들에게 붙잡혀 어둠 속으로 끌려갔고
N에게 목이 그어진 일본 왜장은 눈을 부릅뜬 채 N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쏘려던 총은 남강으로 던져버렸다.
죽은 자의 눈을 감겨주는 것은 최소한 인간이길 선택한 자를 위한 마지막 예의이다.
N은 눈을 부릅뜬 채 피를 토하며 죽은 그 일본 왜장의 두 눈알 위에
주머니에 있던 모래를 뿌려버렸다.
'너네는.. 다음 세계에서도 그다음 세계에서.. 영원히 지옥을 살 길 바라.'
그 후
바다도 아닌 호수에서 거대한 해무가 끼인 듯
N의 눈앞이 흐려졌다.
-
얼마 후 정신이 들었을 땐
응급실이었다.
N의 옆에는 동기 여자애가 놀라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다.
"N... 너 괜찮아?"
N은 두리번거리며 달빛 도사를 찾았지만
없었다.
"어... 어어.... 근데 나
왜 여기 있는 거야?"
동기 여자애는 더 눈이 땡그라 지며 되묻는다.
"너 완전.. 기절했어!
누가 사람이 쓰러졌다고... 119를 불러서
그 소리 듣고 내가... 구내식당에서 마침 점심 먹고 나가는데...
쓰러진 애가 너인 거야 ~~!
입술은 완전 시뻘겋게.. 아니.. 완전 드라큘라처럼
시커멓게 물들어서는... 무슨 포도는 그렇게 많이 먹었데?
근데... 포도 먹고 쓰러진 사람도 있나..? 그거 독 포도인가?
그런 포도는 없지 않나...
너 혹시 무슨... 병 있니?"
N은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그 세계가 그 지점에서 끝난 건 분명했는데
왜 N은 기절했을까.
N은 동기에게 그저 괜찮다고 하고 , 영양실조가 아니겠냐 하는 진단에
포도당을 맞고 잠시 누워있다가 병원을 나왔다.
달빛 도사가 걸어온다.
어떤 묵직한 비밀을 숨긴 채.
"고생했다."
N
"... 있잖아요... 논개는 결국 자살을 했어요.
물론... 거사에 실패해서 겁탈당하고 혼자 자살한 결말보단 훨~~ 씬 낳지만...
악랄한 일본놈 한 명 데리고 갔으니... 위대한 여자로... 역사에 남겠지만..
어쨌든 물에 빠져 죽는 자살은 변하지 않네요?
그 세계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서..
나는 계속 누군가가 자살하고 뛰어내리는 그런 장면들이 자꾸 떠오른 거겠죠?
그런데요... 이왕 세계가 바뀔 거면...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훌륭한 주 씨 부인으로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건 불가능인가요?
명예와 의미는 남아도... 그 생의 최후의 결말이 바뀌지 않는다면..
나는 왜 계속 지나온 세계를 바꾸러 들어가는 거죠?
이상하게 점점 이해가 안돼요.
도사님은 내 운명이 재설계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세계에서 원래 내 운명이 있긴 했나요?
그러니까... 이상하게... 원래 제가 있지도 않았던 그 세계에
내가 자꾸 끼어들어가는 기분이 들거든요.
정말 이게 나 하나의 운명을 바꾸는 게 맞나요?
나한테 말하지 않는 거... 있죠?"
도사
"너... 그 세계 속에서.... 뭔가를 알아버렸구나."
N
"네. 맞아요.
내가 마지막에 칼로 찔러 죽이고 눈알에 모래를 던져버린..
그...일본놈 왜장.
그 얼굴!!
변종수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죠?
그래서... 나랑 악연이라 한 거죠?
그런 게 그 악연이 도대체 언제부터였어요?
내가 그 세계에 들어가서 왜놈을.. 아니, 변종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그놈을 찔러 죽이지 않았다면?
모래를 퍼부으며 저주를 퍼붓지 않았다면
이번 생에 그 새끼를 만나서 그렇게 당할 뻔할 일도 없는 거 아닌가요?
정말 그 세계에 제가 있었던 게 맞나요? 대답하세요."
도사
".....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구나.
세계가 끊임없이 흐르고 누군가로 인해 결말이 뒤바뀌고..
뒤바뀐 결말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머리로 감히 가늠할 수 없는 하늘의 큰 뜻일 테니..
너는 그 속에서 그저 어떤 존재로써 쓰임이 되는 것일 테지.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너만큼 모든 것을 아는 듯 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존재일 뿐이다.
너와의 인연이 그저 깊을 뿐이라는 것만 느낄 수 있지."
-
N은 그 후로 휴학 신청을 했다.
아예 새로 입시를 하던 편입을 하던
다른 학교에 지원하자 싶었다.
아니면 차라리 일찍 취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리고 다시는 달빛 도사를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어떤 세계가 떠올라도, 어떤 기운에 이끌려도
모든 것을 외면한 채 그저 정신을 바싹 차리자 했다.
다시는 어떤 세계로 들어가
누군가의 선택을 바꾸고 운명을 재설계하는 일 따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재설계해서 바뀌었다고 믿은 운명 자체가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N은 그동안 모아놓은 돈과 엄마에게 조금 더 손을 벌려
두 달 동안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떠나야만 했다.
N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지금까지의 세계를 잊을 수 있도록 매 순간 낯설고 멀리 떨어져 있는 먼 곳으로.
2009년 12월 31일.
N은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끝 -
-9편에 계속-
keyword
성인
역사
판타지소설
Brunch Book
너의 운명을 치유해 줘
06
(삽화)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면
07
20살 첫 연애의 악연
08
선택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는 걸까.
09
런던의 Knockin' on Heaven's Door
10
1000파운드짜리 그림을 샀다.
너의 운명을 치유해 줘
남바다
brunch book
전체 목차 보기 (총 20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