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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 Dec 12. 2023

기다림의 미학

<고도를 기다리며>

"그럼 갈까?"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고도'라는 알 수 없는 존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 소설을 처음에는 인간의 삶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행복, 기쁨, 만족과 같은 긍정적인 결과들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며 일련의 것들을 인생에서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고고와 디디가 고도를 기다리며 이야기하고 싸우는 그 과정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오겠거니, 그것만 내 손에 닿는다면 더욱 행복해지겠거니, 기대하는 마음들이 떠올랐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정작 무엇인지 잘 인지하지 못한 채 바라고 또 바라는 막연한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의 스토리가 교훈처럼 보였다. 정말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면, 그 자리에 멈춰있지 말고 움직이라는 식의 일반적인 조언들과 닮아있었다.


사실 그렇게 끝났다 해도 내게는 나름의 의미가 남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음에도 나무 밑에서만 고도를 기다렸고, 왜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같은 마음으로 기다렸고,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로 소년이 들고 온 소식에 있는 그대로 순응했다. 이런 식의 해석을 한다면 고고와 디디는 사유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인간상을 묘사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만약 정말 작가가 무기력한 인간상을 비판하고, 사람들에게 행동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 소설을 창작했다면 이들이 자리에서 벗어나 고도를 찾아 길을 떠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2막에서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소년은 같은 정보를 전달해 주고, 이들은 또다시 이 답변에 순응한다. 가자고 말하는 사람도, 그러자고 대답한 사람도,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왜 이들은 나무 밑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들은 정말 고도를 만나고 싶은 것은 맞는가? 럭키의 횡설수설한 답변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겼던 내가, 이들이 이토록 끈질기게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도저히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너무나 철학적이고 모호해서 잘 쓰인 소설인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까지 생겨났다. 추상적 의미를 배배 꼬아서 독자로 하여금 의미를 찾아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의미를 찾기 힘들게 혼란을 주려 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일종의 불친절함을 느꼈달까. 어쨌거나, 이 이야기가 단순한 교훈 소설은 아니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다 문득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정확히 아는지, 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내가 고고, 디디와 다른 건 무엇일까? 사실 나도 왜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하려 애쓰는지 잘은 모르지 않는가?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아스팔트 길에 발을 들여 상처 내는 이유를 나는 정확히 알고 있나. 내가 그들보다 목표, 과정의 이유, 그리고 결과에 더 확신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들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고도가 언제 도착하는지, 고도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 고도를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사실 처음부터 고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 성찰이 가져올 후폭풍이 두려워 마음을 둘 곳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한다. 그동안 너무 헛되게 살아왔다는 잔인한 반성이 두려워 하염없이 이상향을 그리고 있는, 일종의 성장 회피였다는 생각도 든다. 무언가를 탐닉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올 것이라 믿으며 애쓰는 그 시간을 필요로 했을 거라는 생각.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 그래야만 인생에 의미가 생겨나니까.


이들은 어리석은 것도 무식한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그저 두려움에 찬 인간들일뿐이다. 흔히 어른들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 경험, 또 경험하는 것이라는 말, 시야를 넓히고 많은 것을 익히라는 조언은 식상하기까지 하다. 이들에게 과연 고도를 찾아 떠나보라는 조언이 효과적일 수 있을까? 나는 고고와 디디 같은 사람을 마주했을 때 너무 위선적으로 위로했던 게 아닐까?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두 사람이, 이제는 조금 안쓰러워 보인다. 그래도 다행인 건 둘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나무 밑을 벗어나 소년의 손을 잡아보기를, 고도를 향했던 시선을 서로를 향해 한 번쯤 돌려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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