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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lmz error Oct 16. 2023

마지막 남은 열정을 온전히 꺼내어,

카트린느 브레야 LAST SUMMER

<라스트 썸머 LAST SUMMER>, 2023


남녀가 뭔가 하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미친듯이 옷을 벗어 제끼는 영화들을 볼 때면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다. 별 것 아닌 순간에 찌르르 나를 건드리는 감각, 서로를 탐닉하고 몰두하는 장면에 공감하게 만드는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섹스신을 보며 두근 거림을 느꼈던 것은 다섯 번도 채 되지 않는데,(내가 로맨스 영화를 굳이 찾아보지 않는 까닭도 있겠지만) 애드리안 라인의 <언페이스풀>을 볼 때 그랬고, 이번 <라스트 썸머>를 보며 그랬다.


카트린느 브레야의 <라스트 썸머>는 내가 볼 부산국제영화제 기대작 중 하나였지만, 최고로 기대 됐던 건 아니었다. 단지 예전에 <팻 걸>을 재미있게 보았을 뿐이고, 폴 버호벤의 <엘르>와 같은 영화를 보며 감탄하면서도 느꼈던 죄책감(여성의 뒤틀린 욕망에 대한 이야기는 여성 감독으로부터 나와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을 <팻 걸>을 비롯한 카트린느 브레야의 영화들은 조금 더 마음 놓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호기심이 들었을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며 감독 인사 영상이 나왔다. 영화제에서 일했던 경험에 의하면 해외 감독들에게 한국의 관객에게 인사 해달라는 영상 요청은 상당히 귀찮은 일로, 말을 준비해 영상을 찍어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도, 이를 부탁하는 스태프의 입장에서도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이긴 하다. 수 차례 보낸 영상 요청 메일을 무시하거나 읽지 못하거나, 차마 여력이 없어 그냥 보내지 못하는 사례도 부지기수, 찍은 영상 포맷이 잘못 된 경우도 많다. 브레야는 거장이니 한국 관객에게 으레 하는 아주 간단한 인사만 남기겠지 생각했다.


영상 속 그녀는 나이 든 여성이 지닐 수 있는 우아함과 원숙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관객석에 앉은 많은 사람 중 오직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여유있고 편안한 말투와 고결한 눈빛,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여러분들과 이야기 나누지 못해 아쉽지만, 영화는 저의 가장 깊숙한 내면이고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제 영화를 보는 것 만으로도 나와 대화하는 것과 같아요."


어쩌면 나는 영화를 보기 이전에 카트린느 브레야에게 먼저 매혹된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감정을 나타내는 도구" 라는 말을 들으며, 도덕과 규범, 사회의 틀을 벗어 던지고 모든 감정과 감각에 충실하도록 내 안의 이데올로기를 모두 내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나면 <라스트 썸머>의 주인공 처럼, 심연위로 끓어 오르는 뜨끈한 열정에 온전히 자신을 내 맡길 수도 있을 거다.


영화는 무모한 관계의 책임자를 묻거나 파국을 그리려는 시도보다는손에 잡힐 듯 현실적인 대안과 그 비틀림을 조망한다.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서있음이 너무나 명백한 질문 앞에서, 잃을 것이 너무 많았던 여자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소년을 향해 칼자루를 쥔다. 젊음과 늙음의 격차는 육체에서 오는 것 뿐만 아니라 선택지의 갯수와 망각의 폭에서도 느낄 수 있다. 늙은 육신은 조금 후면 잊혀질 젊음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커다란 눈으로 네가 곧 이 일을 모두 잊을거란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들의 관계는 성장과 망각을 전제하기에 이루어 진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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