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우리 곁에 있는 죽음

by 무지카
모리 교수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


아주 유명한 책이다.

난 이걸 20여 년 전, 대학교 1학년 때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이해를 못 했던 것 같다. 내용을 이해 못 했냐고? 설마... 난 모리 교수의 마음을 사실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다.


'어차피 죽는 죽음, 더 가치 있게 살자. 사랑하며 살자. 행복은 먼 것이 아니다.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모두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왜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하지?


그럼 다들 이렇게 말하지.


"그럼 죽기 전까지 악에 바쳐서 처절하게 고통받으며 죽는 게 좋을까? 죽을 때까지 술에 쩐내를 내면서? 개죽음당하면서?"


그럼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볼일을 보러 들어간 곳에 주차할 곳에 공간이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주차를 하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건물 상가 차가 있길래 장사하는 차니까 오래 안 빠져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내 딴에는 안 빠져나가는 차 앞에 주차를 했다. 그 앞차만 아니면 다른 차들은 다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전화가 왔다. 차를 빼 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당연히 앞 차일 줄 알고 내려갔는데 앞차의 옆 차였다. 내가 굳이 빼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는데 굳이 전화를 한 것이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군말 않고 차를 빼 주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선 순간, 그 차 주인이 내리더니 중얼거리듯, 그러나 들으라는 듯 이렇게 말했다.


"차를 왜 저따위로 대놔?"


그 순간 난 고민했다.

이건 뭐지?

주차할 공간이 없어 이중주차를 한 것이 그렇게 큰 잘 못인가?

내가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하지?


평소 같으면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을 것이다. 속을 끓이면서...

하지만 그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속 깊은 곳에서 울컥거리는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그래서 올라가 마자 그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저 죄송한데요, 아까 차 빼준 사람인데 혹시 저한테 뭐라고 하셨나요?"


나는 화는 나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쪽은 난리 난리 대 난리가 났다. 기가 막히다며 자기는 암 말도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러느냐더니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냐며 기분이 나쁘단다.


어쨌든 결론은 그 여자는 내가 싹수없다는 인신공격을 하며 내가 말하는 도중 전화를 끊었고 나는 화가 나서 사람이 말하는데 전화 끊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 싹수없게...라고 문자를 보내고는 끝을 맺었다.


그래서 내 기분이 어땠을까?

내가 그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기분이 어땠을까?


지금에서야 차분히 생각하는 거지만, 둘 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태 너무 오래 참았다. 부당하지만 그냥 더 상처받고 싶지 않아 참은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세상에서 영생을 살 것 아니다. 굳이 참으며 성인군자를 흉내 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고 나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얼마나 더 참아야만 하는가? 왜? 무엇을 위해서?


사랑만 하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


바람둥이 남자들이 잘하는 말이다. 이 말에 속아 나는 20대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인생이란 말에는 동의하지만, 사랑만 하기에는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에 매우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네이버 어디선가 퍼온 이미지... 기억이 안 난다. 저작권 위반이면 말씀 주세요.


모리 교수는 '죽어간다'는 것이 곧 '쓸모없어진다'가 아니라고 했다. 가족과 즐겁게 식사를 한다는 것,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등 사소한 일상의 삶에서 불어오는 소소한 행복들을 느끼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좋다.

너무 좋은 얘기들이다.

그런데 내가 직업도 없고 찢어지듯 가난하여 당장 내일 먹고살 돈도 없다면? 소한 일상의 삶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위의 그림처럼 노인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닐 힘도 없는데 아들, 손자, 며느리 그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고 독거노인으로 죽어간다면? 그런데도 그런 평화로운 말이 나올까?

물론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분명 사랑은 존재한다. 사랑은 어떤 이에게는 목숨까지도 버리게 하는 그 어떤 정서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곧,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기에 어쩌면 그것도 굉장히 이기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사랑이라는 근간에도 자기 사랑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곧 죽어도 자신은 선비라 궂은일을 하지 못하고 평생을 글만 읽다가 죽은 조선시대의 많은 선비들이 있다. 군자의 도를 따르고 공자의 도를 따라 사는 삶에 그들은 만족하며 과연 행복했을까? 그들의 아내 되는 아낙네들은 그들을 뒷바라지해서 행복했을까?


나는 도저히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고상하게 죽는 방법을 모르겠다. 는 것 자체가 비참한데 어가면서도 고귀하고 가치 있게 죽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는 환경 속에서도 악을 쓰고 사랑하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이유를... 정말 난 모르겠다. 현실이 악에 받치는데 어찌 행복하다 웃을 수가 있으랴...



매슬로우의 욕구


매슬로우 욕구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론이다.


매슬로우는 위와 같은 이론을 주창하면서 아래 단계가 충족되지 않으면 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고 밝혔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이것이다.


나는 내 동생의 죽음으로 이 욕구가 완전 혼란에 빠졌다.


모리 교수가 생각했던 가치 있게 살며 죽는 것과 그렇지 않고 살며 죽는 것이 결과론적으로 뭐가 다르다는 것인가?


가치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고, 맨날 가족을 괴롭히며 몹쓸 병에 걸려 죽는 것보다는,


자식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며, 앞으로 살아갈 지혜로움을 전해주는 것과는 천지차이가 있다.


누가 들어도, 누가 생각해도 후자가 더 낫다고 한다. 그래, 다른 사람에게 이롭고 자기에게도 이로우며 파괴적이지 않으니 당연히 누가 봐도 후자가 더 낫다.


그런데 아래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는데 과연 위의 욕구가 충족되면서 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아래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었어도 죽을 때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많다.


죽음 앞에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누가 의연해질 수 있을까......


또한 우울증이란 병이 들어 전혀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기지 않는 사람은?


문제는 정작 죽음이 코앞에 있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겐 그러한 가치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것이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과 재잘거리는 소리들과 커피가 만들어지는 그런 소리도 듣고 있다.


아이들의 정서를 위해서는 따뜻한 말을 해주고, 웃어주고, 가르쳐주며 그렇게 제대로 된 엄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겠다.


그러나 난 지금 멍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알게 뭐람... 어차피 죽을 건데... 그런 생각들이 지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지금 죽음 앞에 태로운 생각들로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을 위해 연극을 한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나 같은 생각을 주어선 안되니까...... 나는 이해가 안 될지라도 외삼촌 같은 죽음을 주어선 안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는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모리교수님.


난 아직도 당신의 책이 어렵지만, 왜 가치 있게 죽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삶을 보여주고 나에게도 더 나은 삶과 동시에 인생의 끝을 후회하지 않고 맞이하기 위함이겠지요.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의 책을 묵상하면서 내린 제 결론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차피 죽으면 끝이다'를 외치고 있네요.


참 이상하죠?


당신이라면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줬을까요???


죽음에 대해 더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도 저 책에 나와있는 것처럼 죽음에 의연하고 생명을 쉽게 생각하지 않으며 가치 있는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보고 싶다. 그러면 내 삶이 조금 달라질까? 죽음 앞에서 조금 더 의연해질 수 있을까? 그러면 남은 생을 진심으로 조금 더 웃을 수 있을까?


시선이 삐딱한 내게 고결한 죽음이란 것은 참으로 어려운 숙제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고 할지라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때에는 '이렇게 살아 참 다행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있다. 그렇게나 이해가 안 된다고 난리를 치더니 참 아이러니하지 아니한가!


이것이 아마 인간이 타고난 '본능'이 아닌가 싶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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