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먹어도 아무 맛도 못 느끼는 것
사실 휴가라고 하면 아이들이 같이 와서 쉬지도 못하는 휴가였는데, 영어캠프를 와 있어서 아이들 공부하러 가 있는 동안 엄마 아빠는 쉬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다 보니 쉬는 시간이 많아져 정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신랑은 나 혼자 쉬도록 배려해주고 있으니...
아... 아이들과 친정집 가는 와이프를 반기는 남편들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프리덤? ㅎㅎ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산책을 한다거나, 딱히 즐겁거나, 기대된다거나 하지 않는다. 다만, 쉴 수 있어서 좋다 그것뿐이다.
밥을 안 차릴 수 있고, 청소 안 할 수 있어서 좋고 단지 그거.
풍경이나 바깥을 누릴 수 있는 여유 같은 건 전혀 없다.
산책을 나가자 해도 딱히 마음에 와닿는 게 없다. 산책? 그저 귀찮다.
사실 해외에 나가는 것도 같았다. 아무런 기대감도 없고, 그저 북적이는 것이 싫고, 사진 찍을 때 웃음을 박제하는 그런 느낌?
이번에도 휴가로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 아이들과 신랑 사이에, 나 혼자만이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었다.
아이들은 입이 댓 발 나왔다. 영어캠프를 가자고 하니 이게 무슨 휴가냐고.
그래서 다시 휴가계획을 잡는데 엄마인 내가 도와주지 않는다.
난 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길 가도, 저길 가도, 그냥 밥 안 하고 청소만 안 하면 어디든 상관없기 때문에... 미안하긴 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무감각해진 것인지...
이건 마치, 밥 먹을 때 맛을 못 느끼는 것과 같아서 씁쓸하기도 하다.
흙냄새에, 산 냄새에, 시골냄새에, 그냥 너무 좋다 하고 설레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감수성이 풍부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산책조차도 귀찮아져 버리게 되다니...
울증 친구는 약이 그것을 막아버리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슬쩍 약을 끊어버릴까 생각도 해본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ㅎㅎ
그래도 내가 색을 찾을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 보니 가볍게 장르소설을 읽을 때가 그나마도 웃고 있더라.
주인공들이 흥미진진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열심히 살 때?
그걸 보고 그나마 위안을 찾는 것 같다.
내 대신 열심히 살아주고 있으니. 대리 만족인 것 같기도 하고...
아, 힘찬 음악을 들을 때도 그나마 색을 찾는 것 같다. wildest dreams 같은 그런 음악들...
산책은 싫지만, 신랑이 산책을 나가자고 세 번이나 말하니 나가서 한 번 찾아봐야겠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걸으면서 나무도 자세히 살펴보고, 공기도 한 껏 들이마셔 보고, 매미소리도 잔뜩 들어보고, 덥지만 벤치에 앉아 햇살도 뜨겁게 맞아보고... 그렇게 자연을 만끽하다 보면 조금은 회색이 밝아지지 않을까?
나가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