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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묘 May 19. 2022

와이파이

숙소에서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을 경우 취해야 할 행동을 서술하시오.

오늘 글을 쓴 빨래방. 숙소에서 매우 가깝다.



여행하면서 불편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사실 과거형은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외국에서 사실상 임시 거주하는 중이니 모든 불편을 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피할 수 있는 불편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그제부터 묵고 있는 호텔 방에 와이파이가 오락가락하더니 한 시간 이상 연결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호텔 주인아저씨가 공유기를 껐다가 켜 주셨는데 어젯밤에 또 그래서 혼자 멘붕이 왔다. 참 별거 아닌 걸로 인생이 힘들어진다 싶었다. 그렇게 어려운 출입국, 짐 싸기, 도시로 들어오기는 다 수월하게 해냈으면서 고작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는다고 울상이라니. 아니 근데 웃긴 건 일주일 동안은 아무 문제없이 잘 터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더 짜증이 났다. 차라리 영어가 주 언어인 영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더라면 영어로 잘 설명을 했을 텐데, 하필이면 말이 잘 안 통하는 파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서 두배로 열이 뻗쳤다. 하필이면 리셉션에 계시는 분들이 모두 친절하셔서, 또 호텔 주인아저씨도 나를 볼 때마다 공짜 물을 주셔서 더 컴플레인을 걸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영국이었다면 내 상황을 잘 설명하고, 너무 불평하지 않으면서 내가 이러이러해서 불편하다~를 잘 설명했을 텐데 프랑스어를 못하니까 내가 문제가 있다고 설명하면 문제라는 단어에만 꽂혀서 미안한데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할까 봐, 그러면 진짜 답이 없어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 답답해한 것 같다. 


내 문제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에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더니 커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휴.


하지만 이게 다 내 인생의 사소한 톱니바퀴들이 원활하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피곤함이다. 사소한 것들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실제 여행의 즐거움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자고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나는 배부르고 등 따듯해야 마음 놓고 즐거워할 수 있다. 외국에 나와있어서 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냥 마음 놓고 풍경을 즐기고 싶은데, 소매치기당해서 한참을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늘 주변을 경계해야 하고, 정처 없이 걷고 싶은데, 이상한 동네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늘 구글맵이 알려주는 대로 다녀야 한다. 마치 게임처럼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전략을 짜야한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의 편의를 위해. 그니까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다면 좀 긴장을 풀고 다녀도 되겠지만 눈뜨고 코베이는 파리에서, 그것도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여행을 통해서 어떤 걸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려서 예전과 같은 설렘이 없다. 배부른 소리다. 그래도 고민은 고민이다. 예쁘고, 즐겁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니까 재밌고 좋은데 뭔가 맛이 심심하다. 한국에 계속 있다가 파리에 왔다면 파리를 보고 내가 느낀 충격이 더 컸을 텐데, 외국에서 외국으로 옮겨 다니니까 신선함이 조금 줄어든 느낌이다. 여행을 가면 신선한 충격에 대부분의 불편과 결여가 가려져서 신나야 하는데, 나는 지난 4개월 동안 충격흡수 스펀지만 온몸에 칭칭 감았나 보다. 


향수병이 생기지는 않는다. 친구들과 부모님이 보고 싶지만 뭐, 어차피 진짜 곧 볼 텐데 아주 그립지는 않다. 다만 내가 익숙하던 한국의 시스템들이 그립다. 예를 들면 잘 터지는 와이파이라던지, 잘 터지는 와이파이라던지, 아니면 잘 터지는 와이파이 같은 것들? 또 제시간에 오는 깨끗한 대중교통, 주문하면 한 시간 내로 음식을 가져다주는 배달앱(여기도 배달앱이 있긴 한데... 그 돈 내고 그 시간을 기다려서 먹느니 내가 가서 포장해오는 게 훨씬 이득이다),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쓰고 보니 향수병이 좀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국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다다음달이면 입국이니까 최대한 이곳 생활을 즐기고 싶다. 출국할 때 즐거운 마음이 아니라 아쉬운 마음으로 공항으로 향하고 싶단 소리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은데, 그 이유는 내가 한국이 그리워서라기보다는 그냥 공항이라는 장소를 사랑하고 비행기 타는 것을 무진장 즐거워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 또 한 가지는, 지금까지는 매일매일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여행만 해와서 여유로운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힌 것 같다. 꼭 새로운 날이 밝으면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제 한 것을 오늘 또 하면 약간 하루를 헛보낸 것 같은 느낌? 여기까지 왔는데 진짜? 오늘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정말? 이런 목소리가 은연중에 계속 머릿속에서 나를 쿡쿡 찔렀다. 하지만 두 달 내내 매일매일 색다른 무언가를 찾아 하면서 노는 것이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스몰웨딩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부지런하고 목표가 확고한 사람만 그런 일정을 소화할 수 있다. 또 내가 편안하게 여행을 하려면 오늘처럼 빨래도 돌리고, 물도 사 오고, 조금 쉬는 날이 필요하다. 머리를 비우고 재충전을 해야지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풍경과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새로운 것을 많이 보면 그걸 소화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냥 휙휙 여기서 뭘 보고 저기서 사진 찍고 이렇게만 여행하는 건 나랑 맞지 않는다.


쓰고 나서 보니 뒤죽박죽에 자기 합리화로 가득한 글 같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리고 또 파리에 대한 감상은 한마디도 없는데 그건 다른 글로 따로 적어 볼 예정이다. 사실 글 한편을 적을 정도로 느낀 게 많은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뭐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써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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