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문정희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부족하고 구멍 뚫린 '미완성'으로 '완성'하는 시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여기, 이대로 눈물 나게 좋아
"슬픔은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아름다운 동력"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한 일은/ 그동안 쓴 시들을 고치고 주무르다가/ 망가뜨린 일이다/ 시는 고칠수록 시로부터 도망쳤다/ 등 푸른 물고기떼 배 뒤집고 죽어 가듯이/ 생명이 빠져나갔다// (…)// 나는 울다가 눈을 떴다/ 그래 이대로 절뚝이며 살아라/ 나 또한 헛짓하며 즐거웠다/ 나는 시들을 자유로이 놓아주었다/ 부서진 욕망, 미완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 불온한 생명이여/ 어쩌다 내가 기념비적인 기둥 하나를 세웠다 해도/ 얼마 후면 그 기둥 아래/ 동네 개가 오줌이나 싸놓고 지나갈 것을 ('망각을 위하여')
문정희 시인이 통산 15번째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민음사)를 펴냈다. '작가의 사랑' 이후 4년 만이다. 통상 3년 간격으로 펴내던 시집 터울이 길어졌다. 등단 53년차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시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지난해 여름에는 코로나 시국에도 마스크를 쓰고 캘리포니아까지 가서 이번 시집에 실을 시들을 고치고 또 고쳤다. 고칠수록 시는 망가졌다. 원문이 훨씬 생생하다고 느꼈지만 이미 처음으로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그는 시가 다시 살아나기를 애걸복걸하다시피 했지만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미완성이라는 완성의 경지를, 깨달았다.
"이전 시집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시집을 내고 싶었어요. 똑같은 것을 반복하거나 계승하는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되짚어보니 완전히 고독한 나, 철저히 미완성인 나가 전부더라구요. 50여 년 시를 쓰고 나름대로 책을 읽고 그랬는데 어쩌면 이런 상태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당혹스러웠지만 수긍을 하게 되더군요. 이 수긍이란 마음을 비웠다든가 하는 경지가 아니고, 아 이거 알았다, 미완성이구나, 더 가야 되는구나, 이런 느낌이에요. 그동안 사랑은 불 같이 뜨겁고 다 풀어내야 된다고 만날 생각했는데, 이렇게 추운 사랑도 있구나, 그런 느낌이었던 거죠."
전화로 만난 문정희 시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활기차고 격정적이었다. 그는 설혹 완성된 시를 썼다고 한들, 헝가리 소설가 산도르 마라이의 표현처럼 그 기념비적 기둥 아래 동네 개가 오줌이나 싸놓고 지나갈 것을 떠올리면, 아등바등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쓰고 읽고 생각하고 그 끝이 완성이든 아름다움이든 그 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 행위 자체가 위대하게 보였다고 했다. 그는 "결국은 미완성을 향한 미완성이었고, 어디가 부족하고 구멍 뚫린 거였다는 깨달음, 그것 하나를 체득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수긍하고 나아가는 자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지그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는 쉽게 얻어진 게 아니다. 몸부림과 격정이 흔들고 달구고 식히는 연륜의 담금질 끝에 도달한 경지일 터이다. 그런 세월을 흘러오다보니 슬픔조차도 이제 희미해져, 시가 망해버렸다고 그는 짐짓 탄식하다가 시라는 건 '망한 사랑 노래'라는 생각에 이른다.
요즘 내겐 슬픔이 없어/ 무엇으로 사랑을 하고 시를 쓰지?/ 슬픔? 그 귀한 것이 남아 있을 리 없지/ 창가에 걸어 두고 흐린 달처럼/ 조금씩 흐느끼며 살려고 했는데/ 슬픔이 더 이상 나를 안아 주질 않아/ 멍할 뿐이야/ 행복도 불행도 아니야/ 서양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 들었다 놓아/ 말하자면 폭망한 것 같아/ 슬픔은 안개 속에 서걱거리는 강철/ 그것으로 50년이나 시를 썼으니/ 내가 나를 뜯어 먹었으니/ 당연히 망하지/ 가시도 뼈도 없어/ 상처도 딱지 진 지 오래/ 베레부렀어/ 손에는 허망을 쥐려다가 찔린/ 핏방울...... 오오...... 향기롭고 독한/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내가 본 것이 본 것이야/ 슬픔? 나를 두고 어디로 갔지?/ 아니, 슬픔이 뭐야/ 시? 망한 사랑 노래야 ('망한 사랑 노래')
"슬픔은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아름다운 동력이에요. 인생 자체가 슬픔의 정서 속에 있는 고통 덩어리잖아요. 그 고통의 바퀴 속에서 잠깐 잠깐 빛나는 기쁨, 환희 이런 것들이 너무 좋은 거죠. 이제 그 슬픔이 보여도 저거 다 지나갈 거야, 이런 생각이 들어서 슬픔을 동력으로 삼을 기회를 놓쳐버려요.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비웠다고 하고, 뭘 깨달았다고도 하지만 나는 전혀 마음을 비우고 깨닫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 좀 망한 채로, 슬픔이 와도 그것이 옛날처럼 그렇게 따끔거리거나 미치게 슬프지 않는 것뿐이죠. 이제 여유가 생기고,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홀로 설 수 있게 됐다고 할까요. 옛날에는 휘청거렸는데, 이제 나는 나다, 이런 생각으로 돌아간 거예요.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자꾸 시시, 하는데 시가 뭡니까? 망한 사랑 노래죠."
그는 "시시! 하다가 그만 시시해지고 말았다/ 뼈 마디마디 숭숭 구멍 뚫려/ 삐걱대는 시간/ 물무늬 반짝이는 백지 한 장이/ 전 재산이다"('시시')고 쓰기도 하고, "직선으로 소리치고 싶어/ 꿩!꿩!꿩!/ 꼬리 흔들기 싫어/ 흔들어야 먹이를 던져 준다면/ 굶어야지/ 갈대숲에서 하늘로/ 뚫린 목청/ 단음이 좋아/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아/ 기교 넘치는/ 저 넝쿨들처럼 뻗어 가기 싫어/ 얽히고 싶지 않아/ 직선으로 소리쳐/ 꿩!꿩!꿩!"('꿩')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그는 "소통을 거부하는 게 현대시의 한 특징이라고 하는데, 나도 앞선 자리의 현대시인이지만 사실 시집을 읽는 독자도 소중하다"고 말한다. 시를 장식처럼, 훈장처럼 여기고 난해한 저편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일갈하는 말이다.
국내 유수 문학상은 물론 스웨덴 시카다 상도 받고, 시집 14권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10개 언어로 번역돼 있으며, 글로벌 축제 현장들에서 초청받아 오가던 시인이었기에 지난 코로나 봉쇄 시절은 무척 답답했을 터였다. 이 기간에 나온 시들이 이번 시집에 다수 포함돼 있거니와, 이 지구적 재앙은 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는 베를린 국제 축제와 우크라이나 오데사 대학 초청에 응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웠다고 했다. 그렇지만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 학생들과 화상으로 만나기도 하면서 직접 같이 호흡은 못해도 시를 나누는 통로를 새롭게 발견하는 소득을 얻었다. '과잉의 넌더리, 넘치는 욕망들/ 이윽고 정체 모를 전염병 시대/ 냉장고는 냉혈 자궁 백신까지 품고 있다'(냉혈 자궁)거나, '꿀 대신 독을 만드는 대단지 구멍에 갇혀/ 사람들은 벌에 쏘인 듯 후끈거리는/ 백신을 살 속에 투여한다'(벌집), 혹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선 것은/ 꼭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닌지도 모른다'(좋은 코) 같은 시적 사유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는 말할 수 없는 비극이죠. 시인의 성감대는 입인데, 포괄적 표현의 도구인 그 입을 마스크로 막아버리니 너무 숨이 막히는 거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인 표현을 막아버린 비극이죠. 이 또한 지나고 보면 분명히 내공으로 쌓인 어떤 것들이 예술의 유산이 될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 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 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도착')
그가 도착한 '여기'는 어떤 곳일까. 그는 "그걸 알면 너무 좋겠다"면서 "그냥 쓸쓸하고 고독하고 미완성인 완성을 향해서 몸부림 치고 있는 그 자리"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실은 늘 그런 상태로 흘러온 것이 시인의 숙명 아니었을까. 그는 "실은 그러하지만 그래도 이번 시집이 그 상태를 가장 절절하게 노래했을 것"이라면서 "이전 시집들은 삶에 치중하느라고 만남이나 위대한 작품에 대한 열망, 그런 것들에 대한 환호가 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번 시집의 시들을 쓰는 지난 시기는 세계적으로는 전염병이 휩쓸었고 국내에서는 정치의 계절이 겹치고 자신의 나이도 '해가 지는' 형국이어서 우울감을 떨치기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 말 끝에 곧바로 "꽃이 뚝뚝 떨어진다는 것, 해가 지고, 단풍 드는 것도 좋지 않느냐"고 특유의 쾌활하고 힘찬 어투로 금방 돌아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헝겊이 슬픔의 메타포로 쓰인다는 논문 하나를 읽고 헝겊을 볼 때마다 슬픔이 떠올랐다고 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옷들도 슬픔의 헝겊인 셈인데, 둘둘 말고 사는 그 슬픔을 은총으로 여기는 사람을 뉘라서 더 슬프게 할 수 있을까.
슬픔은 헝겊이다/ 몸에 둘둘 감고 산다/ 날줄 씨줄 촘촘한 피륙이/ 몸을 감싸면/ 어떤 화살이 와도 나를 뚫지 못하리라// 아픔의 바늘로/ 피륙 위에/ 별을 새기리라// 슬픔은 헝겊이다/ 밤하늘 같은 헝겊을/ 몸에 둘둘 감고/ 길을 나서면/ 은총이라 해야 할까/ 등줄기로 별들이 쏟아지리라 ('슬픔은 헝겊이다')
*이 글은 UPI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20901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