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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호 Sep 13. 2022

 "당신의 등에 풀어놓을 사랑의 민달팽이"

[조용호의 문학공간]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펴낸 진은영 시인

사람들과 구체적으로 만나면서 그들 삶을 깊이 끌어들여

고통 받는 사람에게 어떤 사랑으로 다가갈지 모색한 시간

"절망 그 자체보다 절망을 느끼지 못하는 현실이 더 문제"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사랑의 전문가')


시집을 펴낸 진은영 시인. 그는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고 썼다. [©손엔, 문학과지성사 제공]


진은영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첫 시집에서부터 중심 키워드로 삼아온 '사랑'이 이번 시집에 이르러서는 아예 '사랑의 전문가'라는 문패 아래 1부로 묶였다. 돌멩이를 건드리면 가장 연한 싹이 돋고, 식물을 부러뜨려도 새빨간 피가 흐르게 만드는 사랑의 마법사를 빚어냈다. 시인은 그를 '그 방면의 전문가'라고 추켜세운다. 불타오를 준비가 돼 있었지만 그 전문가는 불만 질러놓고 떠나갔던 모양, 침몰한 나는 물과 기름처럼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하는, 영원히 떠도는 사랑의 유령이 돼버렸다. 기실 그는 모자란 '전문가'였던 셈이다.


"고통 받을 일들이 많은 사람들을 주변에서 접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런 사건들을 많이 보면서 그럴 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가 어떤 걸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게 어떤 걸까,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사실 사랑의 전문가가 되기는 힘들었어요. 사랑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확하게 사랑한다는 건 어떤 걸까에 대해서 고민을 담은 시들인 것 같습니다."


이번 시집은 '훔쳐가는 노래' 이후 10년 만이다. 이전 시집들이 4~5년 터울이었던 데 비하면 오래 걸렸다. 심장 수술을 했고 이어진 후유증을 견디면서 학교(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을 치유하는 정혜신 박사와 함께 대담집('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까지 펴내느라 새 시집 묶는 일이 늦어졌다. 전화로 만난 그는 이번 시집은 "예전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사람들과 만나면서 썼던 작품들이 많다"면서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 삶의 목소리가 조금 더 들어간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청혼')



2014년 문예지에 발표한 이래 시집으로 묶이기 전부터 웹에서 이례적으로 널리 각광받았던 이 시는 '사랑의 태도'를 성찰한다. 별들이 벌들처럼 혹은 벌들이 별들처럼 웅성거려도, 어린 시절 맹세처럼 오래된 거리처럼 사랑해온 너, 거창한 불특정 인류가 아닌 구체적인 너 한 사람을 생각하며 슬픔을 공유하겠다는 다짐. 과연 많은 이들 가슴을 설레게 할 사랑의 맹세라 할 만하다.


"결혼의 의미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맹세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즈음에 썼습니다. 사랑은, 완벽한 사랑은 없고 사랑의 태도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한 존재에 대한 성실한 태도가 사랑인 것 같아요.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확하게 그 사랑이 전달되는 경우는 관계에서 쉽지 않은 것 같거든요. 우리는 항상 사랑할 때 정확하게 사랑하지 못해서 실패하는 경험들이 가득한데 그러한 때 그 사람 곁에 있고, 끊임없이 실패하더라도 그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츠만 입게 해서 미안// (...)/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그날 이후')


이번 시집 2부는 '한 아이에게' 바친 시들을 묶었다.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단원고 2학년 3반 유예은으로 상징되는 아이다. 예은을 위한 생일 시를 청탁받기도 했다.

 

"그전에는 제가 자신을 일종의 작은 창조주로 느꼈던 것 같아요. 시를 쓰는 사람은 마음껏 무엇이든 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정혜신 선생님과 작업하고 예은이에 대해서 시를 쓰면서 저의 취향이나 문학적 스타일 이런 것들을 지우고, 그것이 의미 없어지는 순간이 삶에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거기에서는 제가 멋을 부릴 수가 없잖아요. 그 소녀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그 가족들이 어떠했는지를 조사해서 썼거든요. 문학적으로 겸손해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진은영 시인은 "슬픔이 하느님보다 힘세다"고 썼다.   [©손엔, 문학과지성사 제공]


그러니 개장수 하느님께 네가 좀 졸라다오/ 오늘 이 봄날/ 슬픔의 커다란 뼈를 던져 줄 개들을/ 빨리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봄에 죽은 아이')


이번 시집에는 유독 하느님을 '불구의 존재'로 그리는 대목이 많다. '개장수 하느님'을 비롯해 '인색한 전당포 하느님'(올랜도)이나 '다리를 저는 하느님'(카살스), '공중화장실 비누 같이 닳은 얼굴이거나 인정머리 없는 하느님'(파울 클레의 관찰일기), '어린시절부터 싹수가 노랬던 신'(빨간 네잎클로버 들판)도 등장한다. 도저한 절망의 표현이기도 하고, 간절한 희망에 대한 반어적 외침으로도 들린다. 시인은 저 하느님들을 어떻게 수용했을까.


"하느님이 저희를 도와주시지 않으니 저희가 서로를 도와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살면서 별로 인생에 대한 낙관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삶은 고통이나 슬픔이 일종의 기본값처럼 주어져 있는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데 그렇게 운명이 가혹하게 닥쳐올 때 곁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운명이 가혹하게 닥쳐올 때 곁에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시인이 언급하는 '민달팽이 사랑법'은 사뭇 울림이 크다. 그는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라면서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당신의 고향집에 와서')라고 거듭 말한다.


"민달팽이는 사실 집이 없어서 견고하진 않잖아요. 그래서 그게 큰 성채처럼 의지가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뭔가 곁에 있다는 작은 목소리가 고통 받는 사람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작고 하잘것없고 사소한 몸짓이지만 옆에 있다는 걸 기억하는 거죠. 달팽이들을 손에 얹어놓으면 사실 너무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느낌이 있긴 하지만 아무런 통증을 유발하지 않잖아요. 그런 감촉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받는 사람의 멘탈에 다가가야 된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종이는 손수건-도무지 손바닥만 한 평화/ 종이는 신의 얼굴- 세상을 통째로 구원할 재능 없는 신의 얼굴/ 삼류 신, 어린 시절부터 싹수가 노랬던 신/ 할머니가 발가락처럼 거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이 먹었는데 절망해도 되나/ 죽을 때까지 절망해도 되나/ 차창 밖에다 물었다/ 검은 상자를 칸칸이 두드리며 물었다/ 기차 바퀴가 끽끽, 마찰음으로 울었다/ 멈추는 것들은 대개 그렇듯, 슬프거든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


진은영 시인은 "건강해지면 시를 들고 청소년이나 시민들을 만나는 작업을 더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손엔, 문학과지성사 제공]


3부 '사실'에 분류해 놓은, 가장 최근에 썼다는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의 절망은 도저하다. 진은영은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나는 고통의 표정을 좋아하지,/ 그건 진실되다는 것을 알기에'를 문패 아래 인용해 놓았거니와, 절망 그 자체로는 절망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다.


"저는 상황이 절망스럽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직시하는 데서 희망의 몸짓이 시작된다고 생각을 해요. 사실 우리가 뭔가 기대하지 않으면 절망할 일도 없잖아요. 절망한다는 건 뭔가 해보고 기대한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들만이 절망할 수 있는 거죠. 절망해야 될 끔찍한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는 것이야말로 저는 정말 나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절망 자체가 나쁜 건 아니죠. 끊임없이 절망하고 환멸을 느낀 사람은 다른 의미로는 뭔가 끊임없이 시도해보고 소명을 갖기 때문인 거죠. 이런 실패나 절망의 환멸을 계속 경험한다는 건 우리가 꾸준히 뭔가 사랑하고 기대한다는 의미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절망해도 되지 않나 싶어요."


슬픔을 망각에 섞지 못한 채 떠도는 이들, 그들이 깨뜨린 사랑의 유리잔들을 진은영은 겸허하게 수용하는 편이다. 다만, 깨진 조각들을 '이 몹쓸 바닥에서' 쓸어 담아주는 태도를 기대할 따름이다('봄의 노란 유리 도미노를'). 그는 조심스러운 우편배달부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다.


"사는 일이 부서지기 쉬운 소중한 것을 동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금이 간 소중한 것을 안 부서지게 잘 운반하기 위해서는 조심스러운 우편배달부처럼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다 깨져서 바닥으로 곤두박칠 때가 있잖아요. 그때 그 이유에 대해서 묻지 않고 부서짐 자체를 거두어주는, 이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아닐까요."




* 이 글은 UPI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20913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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