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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호 Sep 23. 2022

"비루한 것들에서 건져 올리는 애틋한 희망"

[조용호의 문학공간] 김연경 소설집 ‘명왕성은 왜‘

소설집 '명왕성은 왜' 펴낸 러시아문학 연구자 김연경

연애 관계 설정해 중년의 쓸쓸하고 애틋한 정서 탐색

누가 어떻게 보든 충분히 가치 있는 '아름다운 실존'

"쓰고 있을 때 대상과 합일되는 충일감 너무 행복"



명왕성은 1930년 발견된 이후 태양계의 아홉 번째 행성으로 불렸지만, 국제천문연맹의 행성 분류법이 바뀌면서 행성의 지위를 잃고 왜소 행성으로 분류됐다. 이 행성을 아이에게 가르치던 소설가 김연경은 태양계에 여전히 존재하는데 인간들이 자신들 멋대로 행성의 지위를 주었다 박탈한 명왕성을 모티브로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김연경이 최근 펴낸 네 번째 소설집 '명왕성은 왜'(강)의 표제작에 등장하는 인물 '김광석'이 그 명왕성이다.


'연애소설'을 표방하는 연작 소설집을 묶어낸 김연경. 그는 "파리한 사랑, 힘없는 사랑, 그런 중년의 사랑도 소중하다"고 말한다. [김연경 제공]


주변부에서 희미하게 겨우 존재하는 별처럼 김광석도 자신의 삶을 힘겹게 지탱해 나왔다. 수술실과 응급실을 드나들며 피와 고름과 토사물과 분비물과 배설물을, 그런 오물로 뒤범벅된 의료 폐기물을 처리하며 이십 년 넘도록 병원에서 일했다. 어느날 응급실에 실려온 결혼할 뻔했던 옛 여자를 보면서 죽비를 맞은 듯 그 일을 그만두고 마을버스 기사로 취업했지만, 경미한 사고로 그만둔 뒤 운전면허학원 강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혼자 사는 김광석의 주머니에는 누나가 쏠쏠하게 '빨대'를 꽂아놓았다. 그는 어느날 자신의 내부가 진앙지인 지진을 느끼고 병원을 찾는다. 고독사를 내심 걱정하는 처지이지만 그럭저럭 삶을 견디어나간다.


"명왕성은 거기 있는 거잖아요, 그대로. 그런데 그거를 태양계에 끼워주고 말고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명왕성 입장에서는 태양계 행성 체계에서 튕겨져 나가든 말든 사실은 계속 돌고 있는 거고, 위성도 거느리고 있는 거죠. 그런 입장에서 보면 김광석도 조금 안 됐다기보다는 명왕성이 여전히 태양을 돌고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죠."


시시한 대로, 고독하면 그런대로, 자신의 처지에서 자신의 궤도를 따라 돌고 있는, 살아내고 있는 사람을 두고 왜 주변에서 마음대로 재단을 하느냐는 항변이다. 김연경은 전화기 너머에서 "누가 어떻게 보든 그 나름의 충분히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실존'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빠르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소설집은 초두에 배치한 표제작의 인물 '김광석'을 필두로 이어지는 중단편들에 동일한 인물들이 중첩돼 배치는 연작소설 형식을 띠고 있다.


이어지는 중편 '모르핀의 법칙'은 애초에 장편으로 구상했지만 규모가 줄어들었다. 이 작품에는 특이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른바 상류 직업에 종사하는 판사와 의사 부부가 그들이다. 창원지법 거창지원으로 발령을 받은 김지훈 판사는 좌천성 인사로 늘그막 귀양살이를 떠올리지만, 오래전 청춘기 첫사랑의 고향으로 내려가는 설렘도 있다. 그는 그곳에서 첫사랑 유경인의 귀농한 숙부를 만나 함께 어울리다가, '묻지 마' 관광버스를 타고 놀러다니는 어울리지 않는 일탈을 감행한다. 그 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아줌마'의 몸을 만지며 터널을 지나다 사고를 당해 지체장애 신세로 전락한다.


그의 세련된 아내이자 정신과 의사인 김여운은 연하의 남자 문지웅에게 마음을 주고 '정사 없는 불륜'을 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들 부부가 이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를 바라보는, 소설을 지망하는 20대 딸 김흔재도 심각하게 이 사태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김지훈 판사와 김여운 의사의 불륜은 햇빛 아래 이루어지는, 누드비치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이를 두고 평론가 노태훈은 "사생활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리는 '김혼재'의 태도에는 가족이라는 혈연, 끈끈한 유대감, 온갖 부채감과 죄의식, 기대와 배반 같은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드러나지 않는다"면서 "그런데 이 산뜻함은 새로운 세대가 획득한 전위적인 포즈가 아니라 이미 중년의 고민을 끝낸 시(세)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썼다. 과연 흔해빠져서 '불륜'은 이제 '중년의 고민' 축에도 끼지 못하는 시대의 산물인지는 모르되, 김연경 소설들에서 공통으로 '비루한 처지'를 아우르는 점도 눈길을 끈다. 상류 계급의 판사와 의사 선생이 묻지마 관광버스를 타거나 연하의 힘없는 남자를 탐하는데 이어, '앤디와 나, 그리고 김광석'은 양 극단을 전형적으로 오가는 설정이다.


안정민은 출판사에서 퇴직해 런던에 가서 머물다가 일본어 학원에서 스물여섯 살 남자 앤디를 만났다. 어떤 자세를 취하든 단정하고 말쑥한 실루엣,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창백하도록 뽀얀 얼굴, '아마빛'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지닌 이 젊은 남자와 안정민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귀국 후 다시 편집 일을 하고 문학기행을 다니지만 우울한 정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안정민은 운전면허학원에서 예의 '김광석'을 만난다. 함께 술을 마신 두 사람은 김광석의 좁은 집으로 가서 정사를 치르려 하지만 김광석의 멘트는 쓸쓸하다. "저어, 정민 씨, 나, 여자랑 자본 지 너무 오래됐고 이제는 아예 못할지도 몰라." 그들은 술에 곯아떨어진 채 아침을 맞고, 정민은 한국에 온 앤디와 '내 인생에서 최고로 황홀하면서 최고로 상냥한 정사'를 치른다. 김연경은 '정민(제이-민)'을 두고 이렇게 썼다.


김연경은 "삶이 문학이고, 문학이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쓰는 자'의 충일감이 크다"고 말한다. [도서출판 강 제공]


'나무꾼 제이-민이 선녀 앤디를 붙잡기 위해 아이 셋을 낳아야 할까. 우선은 고은영처럼 담배부터 끊어야 하리라. 김광석, 그 아저씨라면? 얼큰한 밥상 앞에 마주 앉아 '또 하루 멀어져간다'를 부르며 실컷 담배를 피우리라. 술 좀 그만 마셔요. 여편네의 체면치레용 잔소리를 해가며 늙어가는 불모의 연인들 특유의 비루한 달관을 쓸쓸히 만끽할 수 있으려나.'


김연경은 정민이 "건물 틈새에 쪼그려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이 영락없이 시궁쥐 신세였다"고 맺었다. 정민은 젊고 잘 나가는 행성 '앤디'와 희미한 명왕성 같은 '김광석' 사이를 오가는 것인데, 왜 굳이 '비루함'을 탐하는 것일까.


"비루함 속에 문학의 힘 같은 게 있어요. 우리가 삶을 견뎌내는 어떤 방식 같은 것을 돌아보면 힘드니까 자꾸만 희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잖아요? 비루하고 한심하고 되게 천박하고 절망적이고 그런 것들 속에서 희망 이런 게 있는 거죠. 사실 비루하다는 게 마이너스 가치만 있는 게 아니에요.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뭔가 자꾸 막 얘기하려고 하고 뭔가 붙들려고 하고 그런 과정에서 저는 그게 문학인 것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릴 거고 음악을 하는 사람 음악을 하겠죠. 저는 글을 쓰는 게 실존이니까 계속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면서 출구를 찾아보려고 하는데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도 해요."


김연경은 1975년 거창에서 출생해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사범대학에서 29세에 도스토옙스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러시아문학 전문가이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안톤의 平凡해장국'은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유튜버를 등장시켜 전공을 녹여낸 경우이고, 30대에 집필한 '19세기 러시아문학 산책'은 러시아 유학시절 이야기를 흥미롭게 담아냈다.  


김연경은 "삶이 문학이고, 문학이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쓰는 자'의 충일감이 크다"고 말한다. [도서출판 강 제공]


서울대에서 오랫동안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는 중이고,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죄와 벌' '닥터 지바고' 등을 번역했다. 21세에 '문학과사회'에 단편을 발표하며 등단해 소설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 '내 아내의 모든 것'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 장편소설 '고양이의 이중생활' '다시, 스침들' '우주보다 낯설고 먼' 등을 펴냈다. 쉼 없이 번역하고 연구하고 창작하는 '쓰는' 삶을 이어왔다.


김연경은 도스토옙스키처럼 주변에서 접하는 사람과 사연을 모두 소설로 풀어내고 싶다. 최근 3년 동안 피붙이들이 죽거나 중병에 걸리고 몸이 불편해지는 아픔을 겪었다. 삶이 문학이고, 그 문학이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글쓰기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김연경을 좌절시킬 수는 없는 듯하다. '쓰는 사람' 김연경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것보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약간은 미학적 태도도 필요한 것 같다"면서 "매일 스터디카페에서 두세 시간 굉장히 집중적으로 작업을 할 때 쓰는 나와 씌어지는 이 세상 둘 밖에 없는 그 충일감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작가의 말에 밝힌 김연경의 씩씩한 '운명애'.


'대놓고 엄살을 부리자면 연이은 가족 참사 때문에 지난 삼 년 동안 새 소설을 단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소설이 쓰이지 못하는 정황의 고통이 분명히 있었지만, 몸(들)의 고통에 비할 바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최악은 아니다. …이판사판이다. 모든 것이, 여전히 점과 굿의 효험을 믿고 싶어 하는 칠순 노모의 말대로 내 복이자 업이다. 타인에 대한 원한이든 과거의 나에 대한 원한이든 모두 버리고 나의 운명으로 도피하자. 아모르 파티.'




*이 글은 UPI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20923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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