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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호 Nov 11. 2022

사막에서 만난 '그리움'의 모래바람

[조용호의 문학공간] 천선란 장편 ‘랑과 나의 사막’

소설가 천선란 SF소설 '랑과 나의 사막'

망가진 지구의 사막에서 그리움에 빠진 로봇

인간과 외계인과 로봇을 통해 전하는 '희망'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의 '질주'



'랑'의 엔진이 꺼졌다. 아니 심장이다. 인간은 엔진을 심장이라 부른다. 랑이 모래 더미 속에서 발견해 어렵게 전원을 넣어 살려낸 '고고'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들은 자신과 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 태어난다는 건 목적 없이 세상에 배출되어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평생 찾아야 하는 것이고, 만들어진다는 건 분명한 목적이 존재하는 경우다. 다시 전원이 들어온 이래 '랑'의 뜻에 따라서만 움직여온 고고는 이제 사막에서 목적과 방향을 상실했다. 어디로 갈까. 젊은 작가 천선란의 소설 '랑과 나의 사막'(현대문학)은 천 년 넘게 작동돼 온 '고고'가 죽은 랑을 다시 만나기 위해 사막에서 '과거로 가는 길'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다.


짧은 시간에 한국 SF작가의 선두 반열에 올라선 소설가 천선란. [현대문학 제공]


"단 하나였던 삶의 목적을 잃은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구의 환경조차도 삶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고고에게는 랑이 세상의 전부였고, 랑이 고고에게 다음 목적을 만들어주지 않고 떠난 탓에 고고는 덩그러니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대로 툭 놓인 상태의 덩그러니. 그렇게 삶의 선택지가 랑 하나였던 고고는 결국 또다시 랑을 자신의 유일한 목적으로 둡니다."


랑이 떨어뜨린 망치를 머리에 맞는 바람에 가끔 멋대로 고고의 기억장치가 과거를 재생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 오류는 랑이 가고 없는 사막에서 랑과의 과거를 돌아보는 유용한 기능으로 작동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사막은 단숨에 그림이 된다고 랑이 말했을 때, 고고는 논리적으로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라고 반박했다. 그림에는 감정이 들어가고 사진에는 의도가 들어간다고 덧붙이면서. 고고는 어떤 왜곡도 없이 논리적이고 사실적으로 모든 지난날을 사진처럼 떠올리지만, 인간은 안타깝게도 '슬픈 거부터' 그리고 '내가 잘못했던 것들'을 떠올린다고 했다. 고고가 보기에 이런 인간의 기억은 그림일 수밖에 없다.


고고는 랑과의 추억을 하나씩 재생시키면서 사막의 폭풍 속을 헤쳐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인간 '버진'과 고고처럼 만들어진 '알아이'와 외계인 '살리'를 만나고,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 과거로 가는 길을 찾아 떠나간다.



"그렇게 여정을 떠난 고고에게 랑이 아닌, 고고의 목적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에 계속 물을 붓는 마음을, 그런 상태와 그런 사람과 그런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저의 일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가끔 잊어도 땅이 메마르지 않게 비가 내릴 것이고, 심심하지 않게 새가 앉았다 갈 것이며 잠시 눈을 돌린 사이 잎이 움틀 수도 있다는 말을 가장 먼저 그 마음에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지구가 완전히 망가져 모래 폭풍이 몰려다니는 27세기쯤이다. 이른바 지구 멸망을 다루는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1993년생 천선란은 2019년 이른바 '뉴클리어 아포칼립스'(핵전쟁으로 인한 지구 멸망) '무너진 다리'를 웹소설 플랫폼에 연재해 큰 호응을 얻어 그해 9월 첫 단행본으로 묶어냈다. 이어 같은 해 장편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받으면서 한국 SF 소설계의 기린아로 급격하게 부상했다. 2020년 펴낸 '천 개의 파랑'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같은 해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도 펴냈다.


2021년에는 뱀파이어 로맨스 소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와 청소년 소설 '나인'을 동시에 펴냈다.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흐름 속에서 '나인'은 '창비'에서 출간했고, 이어 올 6월에는 '한겨레출판'에서 소설집 '노랜드'를 펴냈다. 이번에는 '현대문학'에서 다시 경장편을 출간하는 숨가쁜 이어달리기를 하는 중이다. 불과 3년 동안 장편 5권과 소설집 2권을 펴냈으나 가위 '질주'라 할 만하다. 지난 8월에는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서 매년 실시하는 온라인 투표에서 독자가 뽑은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1위에 올랐다.


천선란은 "소설가라기보다 그냥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현대문학 제공]


천선란은 열일곱 살에 소설을 너무 쓰고 싶어 부모 허락도 없이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소설가보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을 꿈꾸었다고 했다. SF는 많이 읽지 못했지만 나중에 좋아하던 것들이 알고 보니 SF였다. 단국대 문예창작과와 대학원에서 이른바 순문학을 전공했던 그였지만, 장르 구분은 이미 의미가 없었던 셈이다. 천선란은 "소설을 쓰는 게 너무 어렵고 무서워서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가끔은 다 쓴 이야기를 그대로 휴지통에 넣기도 한다"면서도 "단 한 사람에게라도 뜨뜻미지근하게 남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 말미에 밝힌 바 있다.


이 소설집 첫머리에 수록한 단편 '사막으로'는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깝다고 했다. 이 단편에 대기업 건설업체에 재직 중인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출장을 가서 딸에게 사막에 대해서 써보라고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딸이 사막에 가본 적이 없어서 힘들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사람이 보는 것을 쓰는 건 아니"라면서 "본다고 믿는 것"을 쓴다고 답한다. 정작 아버지도 사막에 가본 건 아니었다. 이번에 출간한 '랑과 나의 사막'에는 이런 아버지가 촉발시킨 사막의 영감이, 보지 않고도 그려내는 그 경지가 투사된 셈이다.


-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구는 그 많은 행성들 중 어쩌다 생긴 하나에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아주 작은 행성이었으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별 상관 없는 행성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안에서 존재의 이유조차 알 수 없도록 우연히 생긴 생명체였다. 사랑과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은 인간이다. 이 땅을 외롭게 만든 것은 오롯이 인간의 짓이라는 걸 상기할 때마다 나는 그저 이 행성을 떠나야만 그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단편 '사막으로'에서 화자가 중얼거리는 이 외로움에 대한 상념은 '랑과 나의 사막'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지어낸 사랑과 외로움은 로봇 '고고'에까지 전해져 '감정'을 만들어내다가 결국 '그리움'에 빠지게 한다. 고고가 만난 외계인 '살리'는 고고의 기억장치 오류로 인해 불쑥불쑥 죽은 랑의 영상이 재생되는 상황을 전해 듣고 말한다.


천선란은 "단 한 사람에게라도 뜨뜻미지근하게 남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썼다. [현대문학 제공]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그게 그리움이라는 걸… 그건 정말이지 못된 감정이야. 시효도 길어. 우리를 뜨겁게 하는 것들! 사랑! 질투! 원망! 이런 건 다 금방 증발하는데 우리를 하염없이 가라앉게 만드는 이 감정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길어.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체는 잠잠해지나봐.


짧은 시간에 한국 SF의 전위에서 '질주'하고 있는 작가 천선란의 이번 사막 이야기는 서정적이고 다감하다. 굳이 SF가 아니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같은 우화 소설로도 읽을 만하다. 따스한 감성과 탄탄한 문장이 먼 미래의 아득하고 황량한 사막을 지금 이곳으로 애잔하게 이끌어낸다.


은하수가 통과하는 '마차부자리'에서 온 외계인 '살리'는 고고에게 자신과 함께 가자고 청한다. 고고는 사막에 길을 내는 트랙터 안내 로봇에게 팔 하나를 떼어 주는 바람에 그 단면으로 많은 양의 물이 스며들어 언제 망가질지 모르는 처지다. 고고는 살리를 따라가면 몸을 다시 원래대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안다. 고고의 최종 선택은 마차부차부 은하수일까,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소용돌이 너머 과거의 길일까. 작가의 말.


"고고의 여정이 너무 길고 지난하지 않게 그리고 싶었습니다. 고고는 삶의 목적을 잃고 떠나지만 메마른 사막에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나누고 희망을 봅니다. 상실된 마음의 여정도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짧은 여정을 엮어 보냅니다."




*이 글은 UPI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21110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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