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대치를 감행한 지도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아이의 스트레스는 낮은 곳, 공기는 더 좋은 곳에서 키우고 싶었다. 그때의 결심과 이유들은 시간과 함께 흐려졌다. 아이의 결정과 의도는 관심없어진 전형적인 엄마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주변 엄마들이 대치동으로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들썩였다.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겠다며 호기를 부렸던 나는 한없이 불안해졌다.
차가워진 공기만큼 엄마들 마음은 고등학교 입학 문제로 긴장 모드다. 고입을 앞둔 시점에서 아이는 친구들과 그룹 수업을 하게 되었다. 과학 강사인 아들 친구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포함하여 그룹과외를 맡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엄마들 모인 톡방에서 불이 난다. 아이 과학 썜 카톡이 발단이다.
“오늘 과학 점수 나옴요. 아이들 점수 올려 주세요~”
멤버 중 D 엄마로부터 전화가 온다.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D : 이번에 우리 D시험 망쳤어~! 아휴.. 될 데로 되라지 뭐. 이느므스키 사춘기라 그런지 내가 공부 얘기만 할라치면 눈깔을 뒤집는데 상전이 따로 없어~ 아주 내가 눈치를 보고 산다니까. 시험 전에 그렇게 게임만 하더니,.. 인 서울이라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망쳤다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위로하고 맞장구치는 순간! 나는 헛수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지는 5과목 합쳐 2개 틀려 속상하다는 것이다!
내 기준에서는 전교 1등 감이라고, 우리 집에서는 박수받을 일이라고 차마 말 못 한다.
사실 우리 아이는 이번 시험 내내 새벽 2시 전 자지 못했다. 그때까지 공부를 했는지 간간히 게임을 했는지 모르지만, 하는 공부량에 비해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 언젠가 하교 후 한숨을 푹 쉬며 가방을 내려놓더니 이내 푸념을 털어놓는다.
“나는 어제 하루 종일 수행 준비했는데 00은 오늘 쉬는 시간에 잠깐 보고 다 맞았어. 공부했는데도 기억이 잘 안나. 젠장! 아무것도 하기 싫어!”
아이 마음을 잘 아는지라 더 이상 결과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지만 위로의 말을 던졌다.
“공부는 평소에 하는 거야. 그 친구는 집에서 열심히 할걸? 네 눈에는 노는 것 같겠지만 공부를 많이 안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맞겠냐? 조금만 더 해봐.”
아이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삐쭉이며 방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내 딴에는 위로라고 한 말이었는데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며칠 전 그룹수업 엄마들 모임이 있었다. A는 우등생 아이를 둔 학원 강사, B는 시댁협찬으로 건물주가 된 내년에 아이들 학업을 목적으로 외국에 나갈 예정, C는 행동력 갑에 입에 모터 달린 엄마, D는 회사를 운영하며 거름망 없는 말투를 지닌 엄마, E는 엄마들 모임을 극도로 싫어하는 엄마다.
이 5명의 아줌마들이 느지막이 저녁 한 식당가에서 모였다. A가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의미에서 만난 모임이다. 아이들이 모두 예비 고1이어서 자연스레 학업 이야기로 넘어갔다.
A: 학교 어디 보낼지 정했어요?
C : 언니, D학교 어디 보낼 거야? ㅈㄷ갈 거지?
D : 뭔 소리야, 우리 D 수학 못하는데 밑에 깔아 줄일 있어? 얘는 그냥 동네 가야지.
(참고로 D는 외국에서 4년 어학연수를 하고 왔으며, 역사를 좋아하는 아이다. 또래에 비하면 수학 진도는 늦지만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아니다.)
B : 요즘 교육 과정이 개편됐는데 얘들 재수하면 불리한 건가?
A : 공부할 과목이 늘어나는 거지. 일단 내신 생각하면 고등학교는 인원 많은 데 보내는 게 유리해.
C: E는 어디 보낼 거야?
E: 집 가까운 데 가야죠. E는 워낙 잠이 많은 아이라.
(이젠 아이들 학원 물색이 시작된다.)
C: (d에게) 언니 우리 C가 대치동에서 D 봤다던데? 어디 다녀요?
D: 그 근방 다녀. 소그룹이라 학원 이름도 없어~ 자기는 어디 보내?
C: 우린 영어 수학 모두 대치역에서 가까운 h 보내요. D는 어디 근처예요?
D: 그냥 그 근방이야. 작아서 이름도 없다니까?
C: 언니 뭐가 그렇게 비밀이에요? 말해주면 안 되는 거야?
D: B엄마 봐.. 우리 얘기해도 계속 먹고 있잖아. 잘 먹네~ 이것도 먹어.
A: c언니랑 d언니는 톰과 제리 같아. 하하하!!
엄마들을 만나고 나면 금방 피곤해진다. 웃으면서 할 말 다하는 엄마, 머리 굴리는 엄마!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만나지 않았다. 내 피로도를 줄일 수 있는 아주 편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하고,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하는 상황들이 펼쳐지곤 한다.
그만두면 끝일 회사 상사에게
어쩌다 마주치는 애정 없는 친척에게
웃으면서 열받게 하는 빙그레 쌍년에게
아닌 척 머리 굴리는 여우 같은 동기에게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에게 더는 감정을 낭비하지 말자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김수현 작가가 쓴 ‘웃으면서 열받게 하는 빙그레 쌍년에게’란 시원한 문장을 찾아냈다. 사이다 같은 문장이 내 체증을 가라앉혔다.
기말시험을 3일 앞둔 시점에도 해맑은 모습으로 일찍 잠자리에 드신 아드님을 보며 난 오늘도 답답한 잠자리를 맞이했다. 아들아! 잠이 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