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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부스터 Oct 27. 2024

금주 다이어리 11~12 Day

두 번째 주말, 가족 모임

요 몇 주 늦여름 같기고, 초 겨울 같이 오락가락하더니 날씨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완연한 가을 날씨! 하늘은 높고 맑고, 선선하게 부는 바람!

평일 내내 밀렸던 잠을 자고 일어나서 러닝 준비를 해서 밖으로 나가본다. 오른쪽 골반이 살짝 뻐근한 감이 있었지만 최대한 스트레칭으로 풀어본다.

나처럼 게으른 러너는 많지 않은 듯하다 ㅎ 뛰는 사람들은 거의 못 만났다.

러닝을 할 때면 참 인생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긴 땡볕 길을 지날 때면 힘들고 지루해 죽겠다 싶다가도 그늘 길에 들어서면 한결 뛸만해진다. 왜 이렇게 힘들지? 알고 보니 오르막길이었다. 내리막은 쉽겠지? 거만한 생각을 하는 순간 헥헥! 포기할 지점이 아닌 곳에서 무너지기도 한다.

도착점을 보고 달리면 힘이 날 때도 힘만 들 때도 있다. 땅만 보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여기에 와있을 때도 지칠 때도 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잠깐의 숨 돌리기가 다시 달릴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지난 내 인생을 돌아봐도 곳곳에 경험이 다 떠오른다. 이때는 오르막을 올라가느라고 그렇게 힘들었었구나. 어느 정도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그늘길을 만났을 때처럼 갈만한 구간도 있고, 내리막처럼 쉬운 길도.. 잠깐 쉬었기에 다시 뛸 수 있었기도 했던..

백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뛰다 보면 6킬로를 달리고, 쿨 다운에 들어간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듣고 싶은 노래를 선정하고 생각들을 정리하면 천천히 호흡을 정리한다.

쿨 다운하려고 6킬로를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집을 어느 정도 정리했는데, 뭔가 부족하다. 지난번엔 봐놨던 가구가 있었는데 아이들이랑 같이 쇼핑하느라고 고민을 마무리 못해서 못 사들고 온 가구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린다. 집에 돌아와서 그 가구를 놓을 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사이즈도 재고, 다른 가구와 색 조합도 상상해 보고, 오케이!

형님과 어머님이 광명에 임장 하러 왔는데, 우리 집에 놀러 와도 되냐고 연락이 왔다. 당연히 된다라고 흔쾌히 응답하고, 광명에서 만나기로 한다!

우리 친정집과 마찬가지로 시댁도 술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각자만의 암흑기의 편차는 좀 있지만 지난 과거에 상처를 술 마시면 끄집어내어 누구의 생각이 맞는지를 비교한다.

나는 우리 아버님을 만나 뵌 적은 없지만 풍문으로 들었을 때 안 뵙길 잘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 여전히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오신다. 마음의 상처와 함께..

우리 형님은 중/고등학교부터 아버지의 학대 어머님의 엄격함 속에서 자랐다. 우리 신랑은 남자 아이고 둘째만의 애교 필살기로 그리 많이 타깃이 되진 않았던 거 같다. 그리고 대학교 생활과 군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떠나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 어머님과 형님은 고스란히 아버지의 폭력과 학대를 견뎌야 하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버님이 떠난 그 해가 어머님과 형님은 날개를 단 듯 훨훨 날아다녔다고 한다. 날씨가 이렇게 좋구나 하면서..

당해보지 않으면 말을 말라고, 감히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순 없지만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서인지 어머님, 형님, 신랑 셋은 무척이나 서로가 애틋하다. 서로의 시간을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거 같기도 하다.

난 신혼 때는 그런 부분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에게 결혼이란 부모에게서 정서적, 육체적, 정신적인 독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떨어져 봐야 소중함을 안다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 집 청소, 빨래 등 온갖 집안일을 처음으로 온전히 하면서 엄마의 노고에 깊은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때론 기대고 싶고, 남편과 싸웠을 땐 과거의 내 집이 그립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결혼이고, 선택한 사람이고 결론은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임이라는 건 무조건 참고 살라는 게 아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람을 그대로 존중하기 위한 노력. 엄마는 나에게 항상 이야기했었다. 잔소리하지 말라고, 그러는 본인은 엄청나게 잔소리했던 기억이 나지만.. ㅎㅎ

잔소리해봤자 서로 기분만 나쁘고, 나의 기대에 상대가 못 맞춰줬을 때 우리는 보통 잔소리를 한다.

나름 의식적으로 이런 노력을 하면서 남편과 정을 붙여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남편은 막상 결혼하고 나니 엄마와 누이만 남겨둔 듯한 느낌이 컸었던 것 같다. 지금은 나도 아들을 낳고, 그들의 관계가 어떠한지.. 어떤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지..  일정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걸 인정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신혼 때는 마치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를 겪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머님도 막상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운한 마음이 컸었던 거 같고, 아들이 엄마를 잊고 편하게 지낼까 봐 내심 섭섭한 마음도 있었던 거 같다. 어머님도 아들을 장가보내는 건 처음이었으니깐.. 난 정서적으로 아직도 많이 의지하는 모습이 이해를 못 했던 거 같고, 참고로 난 무지하게 독립적인 집안 환경에서 자랐다. 엄마. 아빠는 우리의 인생에 큰 관심이 없으셨다. 그저 남한테 폐 끼치고 상도덕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말라고 소위 사람이 돼라 라는 말을 무척 강조했었다.

맹세코 중간고사가 언제인지.. 기말고사가 언제인지 성적은 몇 점 받았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도, 미-양-가가 수두룩한 성적표를 보고 화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부작용으로 난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거 같다. 결론적으로 공부를 못했었지 하하.

추후에 하고 싶은 게 생겨도 학벌의 큰 장벽을 만날 줄 알았더라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은 해본다. 하지만 돌아가도 또 똑같이 살 확률이 더 높기에 미련은 버려본다.

다시 돌아가 신혼 때 에피소드를 이어나가면 그러기에 남편과 나 사이에는 “시월드”에 대한 서로의 불편한 감정이 생겼고, 그렇기에 나에게 솔직하게 말하기 꺼려졌던 거 같다.   

회사에서 행사 지원을 나가는데, 여의도 쪽이고 너무 늦게 끝나고 다음날 새벽같이 가야 해서 인근 호텔을 잡아줘서 자고 온다고 했다. 사실 먼 거리도 아닌데 잠은 집에 와서 자지..라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밤늦게 끝나고 새벽같이 나가려면 얼마나 피곤한지 알기에 충분히 이해를 하려고 애썼다.

다음날 신랑은 행사가 일찍 끝났다며 봄 제철 주꾸미를 사 올 테니 주꾸미 샤브샤브에 한잔 끽!하자고 연락이 왔다. 난 당연히 Yes를 외치고, 쭈꾸미와 신랑을 만날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맛있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둘이 꽁냥 꽁냥 핸드폰을 같이 보는데. 신랑 문자 중간쯤 카드 사용 내역 같은데, 치킨마루 방화점이 찍혀있었다. 시간은 약 밤 9~10시?

그때 시댁이 방화였다. 난 정말 뒤통수를 씨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그가 배.신.을.했.다.라는 생각뿐

역대급으로 화를 내고 그때도 물론 화가 나면 술을 진탕 마시고 새벽에 들어가기가 해결방식이었다.

또 서러운 건 결혼했다고 놀아주는 사람도 현저히 줄어서 만날 사람도 없어서 혼자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편의점에서 맥주랑 과자를 사 와서 홀짝거리면서 서러워진다.

그 좁은 집에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감정을 가진 사람과 한 공간에 있을 생각을 하니 점심 먹은 게 체하는 기분이었다.

신랑은 화해를 시도하려고, 술 먹고 온 나를 위해 북엇국이랑 우리가 함께 해 먹자고 야심 차게 구매한 돌솥에다가 밥을 했다.   

난 북어 대가리를 집어던지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때 안방에서 던졌던 북어와 아무 말 못 하고 힘없이 나가던 남편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지금 돌이켜서 그때 감정을 돌아보면 날 속여서 화가 났던 게 아니라 나 역시 사랑해서 결혼하긴 했지만 모든 게 낯선 곳에서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고 노력했는데 나도 힘들었는데라는 말과 아직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사춘기 남자와 결혼한 배신감이 들었던 거 같다.

나 또한 정서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남편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아니었나 보다.

막막하기도 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내 선택이 너무 섣불렀나? 오만가지 생각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던 거 같다.

풀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의 가슴속에는 큰 상처로 남아있었다. 시댁과 일이 생길 때면 그때부터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사실 그런 거지.. 내가 정말 시댁과 여러 가지 일로 부딪힌다면 남편은 나를 선택할까? 질문에 확신이 서지 않는 트라우마 같은 거랄까?

좀 더 그때의 내 감정에 예를 들면, “둘이 물에 빠졌는데 누굴 구할래?” 했을 때 남편은 당신은 수영 잘하잖아 어머니를 구해야지!라고 답할 거 같은?

둘 다 정서적 불안감이 있는 상황에서 그의 선택이라고 생각해 버렸으니깐.  

그러고 보니 어쩌다 시간이 흘러서 풀린 게 아니라 난 고민 끝에 집을 나섰었다. 진짜로! 캐리어에 짐을 싣고

신랑한테는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다.

혼자 호텔 갈 용기는 없어서 엄마한테 남편 해외 출장 가서 혼자 집에 있기 좀 그래서 왔다고 둘러댔었다. 근데 아무렴 작정하고 캐리어에 짐을 싸 온 건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 같다. 엄마는 언제나 그랬듯 별말이 없었다. 질문도 없었고.

그 주말 집에서 뒹굴 뒹굴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며 있는데 신랑한테 연락이 왔다. 꼭 같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 예매했다고, 끝내더라도 이건 같이 보자고

그때 영화가 “나의 신랑, 나의 신부” 조정석, 신민아가 옛 영화를 요즘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영화이다.

줄거리는 결혼 후 남녀가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그려낸 영화이다.

그 영화를 보면서 가슴 깊은 속 공감의 눈물을 서럽게 흘렸다. 한편으로는 큰 위로가 되었다. 다 똑같구나. 얼마나 같은 경험을 겪으면 영화로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우린 이 영화에 깊은 공감을 할 수 있는 건가.

남편이 위로를 했다기보다 영화가 날 위로했다. 나만 이렇게 비참한 게 아니구나.. 다들 결혼하면 그런 시기를 겪는구나.라고

남편은 그냥 엄마랑 누나만 있는 게 마음이 쓰였을 뿐 근데 내가 예민한 거 같으니 말할 수가 없었다고. 행동이 경솔했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고,

우린 신혼에 걸맞게 금세 무슨 일이 있었는 듯이 마냥 서로를 보며 행복해했다.

우선 화해할 생각이 없었기에 엄마네 짐을 그대로 두고 왔고, 다음 주에나 오기에 한주 더 있을 거라고 했는데

집에 가 황급히 짐을 싸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나의 모습에 엄마는 그래 ~ 가라 가~라고 “화해했나 보네”라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날 보내줬다.

시집간 딸이 캐리어를 들고 집에 돌아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굉장히 초조했을 텐데 우리 엄마. 대단하고 모른척 해줘서 참 고맙다.

(진짜 모를 수도 있고?)

여하튼 지금은 그들만의 추억에 내가 범접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였다.

어머님은 나에게 시댁식구가 갑자기 놀러 간다고 했는데 반갑게 맞이해 줘서 고맙다고 새삼 감동 메시지를 보내셨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인정하며 살아가는거 아닐까?

가끔 시댁식구 와서 자고 갔다. 시댁 가서 자고 왔다 이런 이야기를 기혼자 친구들에게 하면 날 경이롭게 쳐다본다.

뭐 대수야~?라고 말하는 나는 대단한 보살 대우를 받는다. 그런데 이 기분도 나쁘지 않다. 은근히 이해심 많은 거 같은 나 자신이 대견스러우니깐!

팁이 있다면 서운한 감정이 들 때 역지사지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남편도 우리 엄마, 아빠한테 서운한 게 있었을 텐데, 혹은

남편도 내가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을 거고, 이해 안 되는 점이 있을 텐데..

내 서운한 점 내 화난 점만 보려고 하면 분노가 치밀지만 상대 입장으로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부분도 없는 거 같다.

이야기가 길었는데, 난 이번 주말 가족모임 = 술모임에서도 단 1 흔들림도 없이 잘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주말 동안 운동도 다시 시작하니 살짝 노곤하고 피곤하기도 하지만 컨디션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거 같다.

내일은 신랑이 연차니깐. 6시 50분쯤 일어나서 30~40분 정도 간단하게 뛰던지 모닝 활력운동으로 한주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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