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11) 민구<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어떤 게 시가 될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한다. 어쩔 땐 '아, 이런 것이어야 시가 될 수 있구나' 싶고, 또 어쩔 땐 '그래, 이런 것도 다 시가 될 수 있지' 싶다. 시는 그래서 어렵다. 교묘하고 때론 교활하기까지 한 제멋대로의 유기(有機 또는 遺棄)물.
어제는 양치를 하다가 내 이름이 김은유였으면 시를 기똥차게 빚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양치하는 시간은 자려고 누운 시간 못지 않게 생각을 훨훨 펼치기에 좋다. 훨훨. 염색한 천을 자연 바람에 말리려 널어놓은 들판의 콧노래처럼 훨훨.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점에게 끌렸다
서툴지만 고백도 했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망했어요
- 민구, <점>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남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때, 근본없는 우월감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글프기도 하지 않나. 여름에 대해서 특히 그렇다. 더워도 축축해도 여름을 좋아하는 나는 추운 게 낫다며 "여름 언제 가"하는 사람들을 보면 꼭 지가 여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먹먹해진다. 그치만 긴 시간을 돌아왔는데 언제 가냐며 질색하는 건 정말이지,
이 계절엔 꼭, 이 계절과 닮은 초록색 시집을 읽게 된다. 안희연의 <여름의 언덕에서 배운 것들>도 그랬지.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도 그랬고. 그러면 마음이 녹진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름을 사랑하는 마음이 녹진해지는 것이다. 끈기보다는 찰기에 가까운 게 생겨 여름에게 붙어버리고 싶어진다.
여름은 시집을 사서 읽기 좋은 핑계가 되어준다, 라고 쓰는데 마이쮸 같은 걸 건네며 한 마디라도 더 걸어오는 새학기 학생의 우물쭈물 손짓 같은 풋내가 얼핏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