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이었을 거다. 여름, 내 생일이 장마와 맞물린다는 걸 그때 처음 인식했다. 아마도 그 전까진 생일에 비가 오는지 맑은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다. 그전 생일을 비롯해 꽤 많은 순간들이 흐릿한 탓일 수도 있다. 얼마 전 다시 본 드라마 <너는 나의 봄>에서 이런 뉘앙스의 대사가 나온다. 정신과 전문의인 주인공 ‘영도’가 하는 말인데, 충격이 될 수 있는 큰 일을 겪으면 그 이전 시간의 기억들이 흐릿해질 수 있다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생일에도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저녁, 비와 함께 바람이 정말, 오지게도 불었고 매장 앞에 둔 종이 박스들이 날아가고 굴러가고. 흐린 눈하기엔 매장이 사람들 많이 지나다니는 길가였기에 우산을 쓰고 나갔었다. 이걸 주워오면 저게 날아가고 저걸 갖다놓으면 그게 굴러가고. 비가 와서 바람이 부는 건지 바람이 하도 부니 비까지 내리는 건지 헷갈릴 정도가 됐을 땐 우산을 거두었다. 쓰나마나한 걸 들고 한 손으로 낑낑대자니 여간 청승맞고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정말 갑자기, 날씨도 종이 박스도 그때 맞물린 여러 사정도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일순간 스스로에 대한 비관이 넘쳐버렸다. 주책이고 청승인 거 아는데 아무튼 그랬다. 왜 우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그걸 쏟기가 싫어 입술 안을 꾹꾹 씹으며 목이 막힐 때까지, 집요하게 울음길을 안쪽으로 냈다.
열아홉 뒤늦은 나이에 고아가 돼버리고 처음 맞는 생일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렇게 새삼스러웠을까. 꾹꾹 누르는 걸음으로 건너는 매일이 갈증 나도록 버거운 건 이미 수년 전부터 그랬으면서. 학교에 있다가 보호자를 찾는 병원의 연락을 받았을 때도, 조퇴 아닌 조퇴를 하고 시내에 나가는 버스를 탔을 때도, 혼자 집을 지키는 밤 중이 무서워 막차를 타고 엄마 병원에 갔을 때도, 병원 비상 계단에 앉아 새벽을 보냈을 때도, 휠체어를 끌고 생전 처음 가본 서울의 큰 대학 병원을 헤맸을 때도 눈꺼풀 한 번 적셔본 적이 없으면서. 이제 그만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스물한 살의 나는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그 해 이후로 몇 년 간 생일을 싫어하고 무서워했다. 그날만 되면 나의 궁상맞음이 극에 달하는 것 같았고, 축하의 말을 들을수록 위축됐고 부끄러웠다. 나만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보듬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잘 되질 않았다. 거울을 보면 ‘하필 왜 니가 나야‘ 같은 답이 없는 질문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누구는 살랑살랑하게 보냈을 유일한 시절의 생일, 나는 꿉꿉했다.
풀은 혼자 나는 법이 없다. 꽃은, 어쩌다 날아온 씨가 어리둥절하면서도 잘도 피어나 홀로 서있기도 한데, 풀은 그러질 않는다. 한 꺼풀이 돋아나면 그걸 시작으로 주변의 초록 점들이 새싹이고 날 풀리면 적어도 손바닥만큼은 밭이 된다.
언제 돋아날까 기다리다 삐쭉해진 풀, 나는 그런 것 같다. 주변이 적막이고 춥기에 아직 아닌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암순응처럼 적막에 적응을 하니, 들리는 거다. 아침을 닮은 소란스러움이. 겨울이었던 게 아니라 주파수가 안 맞았던 거다. 먼저 난 풀들이 내게 들리도록 주파수를 맞춘 것인지, 아님 내게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들렸고, 그래서 삐죽 일어나보니 손바닥만한 풀밭이었다. 계절 타지 않고 내내 싱그러운 잔디가 잘도 떠들고 있었던 거다.
생일이 재밌어졌다. 내가 있는 데가 풀밭인 줄을 알고나니 생일이 도로 산뜻해졌다. 이런데도 태어나 살고 있는 나보다, 이런 나도 친구로 두고 쓸만하다고 있어주는 마음들이 잘 보이고 나니까, 이러려고 태어나 살고 있구나 싶었다.
올해도 내 생일은 더위와 장마가 맞물린 여름이었으나 빗소리보다 풀 사락이는 소리가 더 컸다. 풀이 사락이도록 불어온 게 어느 바람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바람이 있어서 영 덥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