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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Sep 22. 2023

명왕성은 그리 슬프지 않을지도 몰라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14) 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고등학교 때 유독 따랐던 선생님이 있다. 100% 문과형 인간인 나의 성향이 반영된 (편파적일지도 모를) 사제 관계. 나는 문학 선생님과 사회(국사) 선생님 두 분을 무척 따르고 좋아했다.

문학 수업을 듣다가 선생님과 나누게 된 대화. 우울과 고독의 차이.


돌이켜보니 참 범상치 않긴 하다. 고1, 2였던 것 같은데. 친구도 아니고 선생님과 우울과 고독이라는 막연하고도 거대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니.

고독이 화두에 오른 걸 보면 아마 시를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시는 팔랑대는 사랑을 노래해도 일말의 고독이 묻어있으니까.


선생님은 우리에게, 고독을 느껴본 적 있냐는 물음을 하셨을 것이다. 응답 없는 한 낮의 교실. 한 호흡이 지난 뒤 나의 대답은, 우울한데 벗어나고 싶지 않은 우울이 종종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을 고른 선생님은 어찌 보면 그게 고독과 우울의 차이일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어찌하고 싶으나 어찌할 수 없게 가라앉은 기분, 우울. 굳이 해치고 싶지는 않은 잔잔한 마음, 고독.






올리비아 랭은, 놀이공원을 만드는 컴퓨터 게임에서 사람을 클릭해 어딘가 동 떨어진 곳에 툭 떨어트려 놓는 것처럼 뉴욕에 불시착했다.

불시착. 생의 어떤 순간에 무방비로 떨어지는 그것을 고독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작가는 고독과 우울을 같은 혹은 닮은 감정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제시된 예술가들의 생이 각각 일정량의 고독과 우울을 지니고 있었다 느낀다.







역시 배움, 학습이란 건 생의 전반에 우습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 고독한 예술가로 제시된 에드워드 호퍼, 앤디 워홀이 고독에 반신욕인 채 사는 삶을 자처했다 생각한다. 또 악몽에서 도망치듯 우울에서 발버둥쳤으나 그건 점액질의 진창이었던 것이다.

고독 반신욕이 그려낸 에드워드 호퍼의 색채. 점액질의 우울이 탄생시킨,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 아트.


(개인적으로) 잘 읽히지 않는 번역체가 곤욕스러웠으나, 그럼에도 이 책이 충분히 감사한 건 워나로위츠라는 예술가를 알게 해줬기 때문이다.







워나로위츠, 이 이는 고독한 것인가 우울한 것인가를 판단하기 가장 어려웠다. 어쩌면 고독이나 우울로 나타낼 수 없는 또다른 상태였을까. 형용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싱고’라 부르기로 한 시인처럼(신미나, <싱고,라고 불렀다>) 워나로위츠에겐 그 이만이 가지는 마음의 상태가 있었던 건 아닐까.


고독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하여 외로운 상태. 고립.

때때로 나는 지구에서 로그아웃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건 나에게서 뻗쳐나가거나 나에게로 닿아있는 네트워크가 너무 많아 트래픽 과부화가 오는 순간 때문이다. 너무 많은 말들. 너무 많은 표정들. 너무 많은, 예상 되는 생각들. 너무 많은 견해와 논리와 결론들. 대충 뭉갠 찰흙덩어리 모양의 결론들. 너무 많은 글과 현상과 형상과 상상들. 그것들이 내 의식에 욱여넣어지면 혼란스럽기보다 아득해진다. 치과 치료 후 마취에서 덜 깬 혓바닥처럼.



“우리 사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고립된 가족이라는 단위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 솔라니스


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중에서



지구에서 로그아웃할 수 없는 나는 고독을 자처하곤 한다. 고독과 고독이 아닌 상태를 오가며, 우울과 우울이 아닌 것의 경계선을 북북 그었다가도 박박 지워버리는, 외로운 도시의 나와 나 아닌 사람들. 당신과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서로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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