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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Oct 21. 2023

사표를 낸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해낸 일들, 그리고 남은 일들

공무원을 그만두기로 한 건 오랜 기간 생각했던 결과였다. '엇, 이게 아닌데' 싶었던 건 동사무소에 발령받은 지 한 달도 채 안돼서였고, 얼른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3년을 더 버텼다. 버티고 버티다가 격렬하게 괴로워져서 사표를 제출하기 몇개월 전쯤 부터는 교회도 안 다니면서 밤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힘든 시간들이었다.


결심을 하기까지도 어려웠는데, 또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거쳐야 할 많은 단계들이 있었다. 공무원 퇴직의 과정을 내가 했던 순서대로 나열해본다.


1. 담당 팀장님께 얘기하기

이것이 제일 첫 단계였는데 이마저도 퇴사를 결심한 후 한 달은 걸린 것 같다. 주말에는 항상 '월요일에 출근하면 얘기해야지' 했는데, 막상 월요일에 출근하면 팀장님께 얘기할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다. 동사무소는 월요일이 특히 바쁘기도 하고, 팀원들이 자리에 앉아있는데 "팀장님, 저랑 잠깐 얘기 좀.." 하면서 따로 팀장님을 부르기가 어려웠다. 팀원들이 전부 자리를 비우고 민원인도 안 오는 황금의 타이밍을 기다렸으나 쉽지 않았다. 그렇게 월요일을 보내고 나면 남은 평일에는 또 업무를 처리하느라 시간이 그냥 지나갔다.


또다시 주말이 되면 '월요일엔 꼭' 하면서 출근해서 타이밍을 찾느라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매번 타이밍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그냥 지나간 어느 주말, 나는 결심 또 결심했다. 이번주 월요일엔 반드시, 출근하자마자 팀장님께 얘기할 것이라고.

그리고 정말 월요일 아침, 마침 팀원들이 자리를 비우고 민원인도 없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팀장님께 다가갔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하면서 잠깐 나오라는 듯 뒷문을 가리켰다. 팀장님은 나를 따라 뒷문으로 나오시고는 긴장된 표정으로 물으셨다.


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 아.. 저 일을 그만두려구요.

팀: 그만둔다고? 사표 쓴다고? 왜애..

나: 일이 너무 안 맞아서요.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더는 못 있을 거 같아서요.

팀: 야, 일은 나도 안 맞아. 여기 일 맞아서 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래서 뭐 하려고, 계획은 있어?


나름 대책은 없어도 계획은 있었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라도 둘러대야 했다. 내가 대답할 때까지 나의 계획을 궁금해할 것이기에. 나는 그냥 쉰다고 하기로 했다.


나: 아니요, 아직 계획은 없어요. 그냥 일단 쉬려구요.

팀: 그럼 그만두면 안 되지. 인사과에 고충을 써.


고충은 옛날에 썼었다. 하지만 인사과로부터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 매일 출근해서 내 고충이 접수됐는지 한 달 내내 확인했지만 고충은 한 달 내내 '신청' 상태였다. 나중에 사표를 내고 인사과에서 들은 얘기로는 '너무 바빠서' 확인을 못 했다고 한다. 고충을 쓰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고충을 쓰고 하루하루 답변을 기다리는지 인사과에서는 알기는 할까. 어쨌든 나는 그렇게 1단계를 클리어했다.


2. 담당 과장님께 얘기하기

팀장님께 얘기한 그날, 나는 팀장님과 함께 과장님실로 들어갔다. 팀장님께 이미 얘기를 들은 과장님은 나에게 혹시 가고 싶은 다른 부서가 있는지 물으셨다. 나는 그냥 최대한 빨리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했고, 과장님은 다시 계획이 있는지 물으셨다. 나는 그냥 쉴 거라고 이야기했고, 과장님은 그렇다면 일주일 동안 더 생각을 해보고 다음 주에 다시 얘기를 하지고 하셨다. 가고 싶은 부서가 있으면 말해달라고도 덧붙였다.


엄청나게 오래 생각했는데 일주일을 더 생각하라니. 

"많이 생각한 일이고, 제 결정이 바뀔 일은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생각을 해보고 다음 주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다. 예의상의 답변이기도 했지만, 바로 사표를 내기 불안한 마음도 약간 있었다.


그렇게 나의 퇴사는 일주일이 더 미뤄졌다. 일주일의 보류된 시간이 생기니 마음이 더 왔다갔다 했다. 슬슬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불안함도 올라왔다. '부서이동? 민원 없는 부서에서 딱 일년만 더 해볼까, 환경이 바뀌면 좀 낫지 않겠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새롭게 시작된 고민으로 일주일이 지난 후, 나는 다시 과장님실에 들어갔다.


과: 어떻게 생각은 좀 해봤어?

나: 네, 과장님이 말씀하신 부서 이동도 생각해 봤는데, 혹시 가능하다면 000로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바로 사표 제출하겠습니다.

과: 그래, 000로 가고 싶구나. 그럼 나도 인사과에 전화를 해볼테니까, 나로씨도 인사과에 얘기를 좀 해봐. 잘 되면 좋겠네.


나는 과장님실을 나와 바로 인사과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의원면직을 생각 중인데 혹시 부서이동이 가능하다면 000로 가고 싶다고, 발령이 가능한지 물었다. 인사과 담당자는 '지금은 인사발령 시기가 아니다. 힘들더라도 인사시즌까지만 더 버티면 다음 발령시기에 고려해보겠다'고 답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과장님도 같은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더 이상은 미련이 없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공무원이라는 조직이 어디로 가든 어떤 일을 맡을 지 알 수 없는 곳이기에. 설령 내가 원했던 부서에서 1,2년을 잘 버틴다 해도 그 이후엔 또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기에.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했다. 미련이 없어진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3. 인사과에 서류 제출


인사과에 사표를 제출하는 것은 정말 간단했다. 메신저로 받은 의원면직원을 자필로 작성하고 부서장의 서명을 받은 후 서류봉투에 넣어 체송하면 끝이었다. 공문으로 보낼 것도 없고, 인사과에 가야할 일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한 의원면직원 제출이 어이없게도 제일 간단하고 쉬웠다. 그렇게 나는 사표를 제출했다.


여기까지 잘했다. 큰 일은 다 끝냈다. 이제 정말 회사를 나가기까지 남은 것은 송별회식에 참석하는 것, 자리 및 업무를 정리해 놓는 것, 인수인계 등이다. 모든 단계가 마무리 되면 나는 정말 회사를 떠난다. 수고했다 정말, 민원대도 이제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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