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위스키 140년의 진화
위스키에 대한 내 기억은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는 집에서 조니워커와 시바스 리걸을 즐겨 드셨다. 학교에서는 '캡틴큐'라는 게임을 즐겨 했는데 TV 광고 속 이미지를 연상하며 우리는 깔갈댔다.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캡틴큐'나 '나폴레온'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묘한 향수와 함께 숙취의 기억이 떠오르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학시절에는 'VIP'와 '패스포트', 직장인이 되어서는 '윈저'나 '임페리얼'을 가끔 마시기도 했는데 가짜가 많다며 경계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한국 위스키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편의점에서 순식간에 매진되는 '김창수 위스키'나 해외 품평회에서 수상하는 '쓰리소사이어티스 기원'을 보면, 한국 위스키 시장에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한국 위스키의 역사는 단순히 술의 변천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소비문화 변화를 고스란히 담은 시대의 거울이다. 1880년대 개항기 '유사길(惟斯吉)'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들어온 이후, '가짜 위스키' 시대를 거쳐 현재의 '직접 증류' 시대까지, 한국 위스키 140년의 여정을 살펴본다.
우리나라에 위스키가 처음 들어온 시점은 1880년대 개항기로 알려져 있다. 주로 일본을 거쳐 들어오거나 개항장을 통해 서구 상인들과 외교관들에 의해 반입되었다. 1883년 조일해관세칙(朝日海關稅則)에 '유사길(惟斯吉)'이라는 한자어 표기로 등장하며 공식적인 수입 물품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고종을 비롯한 왕실과 일부 상류층 사이에서 '서양 술'로서 향유되기 시작했다. 커피(가배)를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한 고종 황제는 위스키도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교관들과의 연회에서 위스키나 샴페인을 대접하며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다지려 노력했고, 왕실 전용 식단이나 연회 기록에는 '유사길'이라는 이름 대신 영문 이름을 그대로 쓴 기록들도 남아 있다.
1880~1890년대 신문 광고와 기록을 보면, 현재 우리에게도 익숙한 브랜드들이 등장한다. 올드 스머글러(Old Smuggler)는 당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브랜드 중 하나였고, 하얀 개와 검은 개 캐릭터로 유명한 블랙 앤 화이트(Black & White),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위스키 가문인 헤이그(Haig)의 제품들도 수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위스키가 단순히 술로만 취급된 것이 아니라, '약'이나 '고급 기호품'으로 인식되어 약국이나 잡화점(양행)에서 팔리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위스키 한 병 가격은 일반 노동자의 한 달 치 월급과 맞먹을 정도로, 대중적인 술이라기보다는 부의 상징이었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일반적인 서민 주막에서 위스키를 잔술로 팔기는 어려웠다. 주로 서울의 '손탁 호텔' 같은 서구식 호텔이나, 인천·부산 같은 개항장의 외상(外商)들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판매되었다. 하지만 종로 등 도심의 큰 주막이나 '목로주점'에서는 호기심 많은 모던 보이들이나 고위 관료들을 위해 위스키를 구비해 두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사발에 막걸리 대신 위스키를 부어 마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1900년대 초반으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산토리(Suntory) 같은 회사들이 서양 위스키를 모방해 만든 제품들을 조선 시장에 대량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위스키는 조금 더 대중적인 '양주'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되었다.
개항기 이후 한동안 위스키는 특권층의 전유물이거나 일본 제품이 주를 이루었다. 70년대 한국은 위스키에 대한 욕망은 넘쳐났지만, 위스키 원액을 수입할 외화조차 부족했다. 이 간극을 메운 것이 바로 '기타 제제주'였다.
주정에 위스키 원액을 20% 미만으로 섞거나, 심지어 원액 없이 위스키 향료와 색소만 넣어 만든 술이었다. 법적으로 '위스키'라 부를 수 없었기에 '기타 제제주'로 분류되었고, 캡틴큐(1980년)나 나폴레온(1976년)이 대표적이었다. 사실 캡틴큐는 럼 향을 낸 술이었고 나폴레온은 꼬냑이 17% 남짓 들어간 것이었지만, 당시엔 모두 '양주'로 통칭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진짜 위스키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셨다. 외국 술을 마신다는 상징성, 그 자체가 중요했던 시대였다. 물론 대가는 혹독했다. 어마어마한 숙취는 '서민의 양주'가 치러야 할 세금이었다.
1980년대 초반, 전량 수입은 여전히 부담스럽고 '기타 제제주'는 너무 가짜 같던 시절, 묘한 중간지대가 등장한다. 위스키 원액 25~30%에 국산 주정을 섞은 '특급 위스키' 등급이었다. 베리나인 골드, 블랙스톤 같은 이름들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이 과도기는 짧았지만 중요했다. 한국 주류 기업들이 원액 배합 기술을 익히며, 곧 다가올 '진짜 원액' 시대를 준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상황이 바뀌었다. 외국인 손님을 맞이해야 했고, 국민 소득도 증대되면서 '진짜 위스키'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이때 등장한 것이 VIP, 패스포트, 썸싱스페셜 같은 브랜드들이다.
이들은 외국에서 위스키 원액을 100% 수입해와서 국내에서 병에 담아 파는 방식이었다. 비로소 한국인들은 '100% 몰트/그레인 원액'으로 만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생산, 즉 증류는 스코틀랜드의 몫이었다. 우리는 '병입(Bottling)'만 했을 뿐이다. 진짜 원액을 마시게 되었지만, 여전히 '반쪽짜리 국산' 시대였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은 전 세계 스카치 위스키 소비량 상위권 국가로 부상한다. 이 시기의 주역은 윈저, 임페리얼, 골든블루였다. 세계적인 주류 기업 디아지오와 페르노리카가 한국 시장만을 겨냥해 만든 브랜드들이었다.
특히 2009년 등장한 골든블루는 '36.5도'라는 저도수 전략으로 시장 판도를 바꿔놓았다. 부드러운 목 넘김과 화려한 병 디자인은 한국 소비자의 취향을 정확히 저격했다. 이들은 주로 룸살롱이나 단란주점 같은 접대 문화 기반의 유흥 시장에서 소비되었다. 원액은 여전히 스코틀랜드에서 가져왔지만, 브랜드 기획과 마케팅은 한국 기업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2세대와는 달랐다.
하지만 이 전성기는 코로나19를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회식 문화가 사라지고 '홈술'과 '혼술'이 대세가 되면서, 유흥 시장 중심의 위스키들은 힘을 잃었다. 싱글몰트와 하이볼용 위스키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골든블루와 윈저는 여전히 시장 점유율 90%를 유지하고 있지만, '성장 동력'이 약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내 위스키 시장의 성장의 중심축이 '접대'에서 '개인 취향'으로 옮겨가며,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고 있다. 바로 'K-위스키'다.
4세대 K-위스키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전통 증류식 소주 브랜드들의 변신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화요(XP) 같은 브랜드들이 오크통 숙성 제품을 내놓으며 위스키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은 보리가 아닌 '쌀'을 베이스로 하여 오크통에 숙성시킨다. 해외에서는 이를 '라이스 위스키' 범주로 보기도 한다. 소주와 위스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자산인 쌀을 이용한 위스키형 주류의 등장은 4세대의 중요한 한 축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K-위스키가 등장했다. 원액 수입을 넘어, 한국의 땅에서, 한국의 곡물로, 직접 증류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쓰리소사이어티스의 '기원', 김창수 위스키 양조장의 '김창수 위스키', 그리고 여러 신생 증류소들이 보리를 발효·증류·숙성하는 전 과정을 한국에서 수행한다.
김창수 위스키는 CU 편의점에서 150병 한정 출시되었는데, 10분 만에 매진되었다. 쓰리소사이어티스 기원은 336병이 판매된 후 중고 시장에서 200만 원에 재판매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은 전체 시장의 1%도 안 되는 소량이지만, 상징하는 바는 크다. 한국이 단순 소비국에서 '위스키 생산국'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1880년대 고종의 연회 테이블에 올랐던 '유사길'부터, 70년대 서민들이 숙취를 감수하고 마셨던 캡틴큐, 2000년대 유흥 시장을 장악했던 윈저, 그리고 지금 편의점에서 순식간에 매진되는 김창수 위스키까지. 한국 위스키 시장은 14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흔히 캡틴큐나 윈저를 떠올리며 한국 위스키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그동안은 외국 원액을 가져다 쓰던 '소비의 시대'였다. 지금의 K-위스키는 우리 기후에서 직접 원액을 숙성시키는 '생산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