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센터 이야기
"의사 선생. 거 손 좀 풀어주고 내 말 들어보소. 내가 정신 나가서 이랬다 생각하면 곤란해. 몸뚱이가 성치 않아 그렇지 정신은 또렷하거든. 나는 이제 가야 해. 세상 떠야 한다고. 이만 좀 보내줘. 내가 중정부장 XX 씨 저택에서 평생을 일했어. 청년 시절부터 꼬부랑 노인이 될 때까지 일생을 다 바쳤다고. 그 집이 얼마나 큰지 아나? 수 만평이 되는 대지를 내가 다 관리했어. 여기 이 손가락 관절들이 하나하나 다 굽도록 말이야. 그런데 권력이라는 게 다 무용한 거야. 날던 새도 떨어뜨리던 나라님도 때가 되니 늙고 병들어 죽더군. 아 박정희의 오른팔인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주인 양반이 그래 죽고 나니 허드레 일이나 하던 나 같은 일꾼들은 이제 전부 나가라더군. 그런데 내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겠어? 평생을 그 집에서 죽어라 일만 했는데. 남은 건 늙고 병든 육신 밖엔 없었던 거지. 와중에 우리 할멈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 악성으로다가 뭐가 생겼는데, 치료도 안된다데. 이제사 남은 여생 함께 보내나 했는데, 좋아질까 싶어 똥오줌 다 받아내며 간병을 했지.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 결국 영원히 갔어. 참으로 허망하대. 성치 않은 몸으로 3년을 간병하고 나니 내 몸도 더 안 좋아졌어. 더 이상 소일거리도 할 수가 없드만. 그때부턴 아들딸 집을 전전하기 시작했지. 그래도 내 몸 갈아가며 먹여 살린 자식들이니까. 우리 자식들은 그래도 다 착해. 아들딸들, 손주들 보며 사는 재미도 한동안은 괜찮았어.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야. 한 해, 두 해가 흐르고. 그러면 이제 눈치라는 게 보여. 끼니때가 되면 밥상에 밥은 차려져 있어. 노인네 굶길 수는 없으니 저들 나가면서 뭐라도 채려 놓는 거지. 그게 점차 번거로워지는 게 내 눈에도 보여. 서로 대화도 없어져. 그러면 이제 아들 집에서 딸 집으로 옮겨 가는 거야. 딸 집에서도 첫 며칠은 그렇게 저렇게 지내. 그런데 또 짐짝 되는 것 같으면 다시 아들 집으로 쫓겨가. 옮기는 간격이 점차로 짧아지는 거지. 그러던 와중에 아들놈이 은퇴농장이라는 데로 날 보냈어. 노인들끼리 모여 살며 이것저것 경작하는 건데. 아 처음 몇 년은 그것도 재미지더라고. 야채 같은 거 수확하면 사장이라는 사람이 적은 액수지만 돈도 쥐어주거든. 이렇게 지내다 생을 마감하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을 했어. 그런데 웬걸. 온몸의 빼마디가 다 아파지니 이제 그것조차 할 수가 없는 거라. 밭에다 물 주는 그 단순한 일이, 되지가 않아. 병원엘 가도 방법이 없대. 그러면 이제 생각이 드는 거야. 아, 나는 이제 하등 쓸모가 없구나. 이 몸뚱이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렇게 농장을 탈출해 버스를 타고 중정부장 저택으로 다시 가봤어. 내가 어디 달리 갈 데가 있었겠어? 평생을 거기서 일했으니, 이제는 거기가 내 고향 같고 그런 거야. 그런데 그 으리으리했던 저택이 전부다 폐허처럼 변해있었어. 완전 폐가가 됐더라고. 그걸 보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는 거야. 그때까지도 내가 그렇게 서럽게 울진 않았거든. 그런데 내 평생을 바쳐 가꿨던 곳조차 그리 된걸 보니 더는 참아지지가 않더라고. 계단이며 창틀이며, 늘 윤이 나고 빛이 나게 해 놨었는데. 세월이라는 게 무서워. 내 바스러진 몸뚱이보다 더 처참한 광경이었다네. 그렇게 밤을 새워 부서진 계단 참에 앉아있는데 아들놈이 왔어. 요양병원에라도 가라고 하더군. 내가 요양병원서 우리 할멈의 마지막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두 눈 똑똑히 본 사람이야. 그럴 순 없다고 하니 다시 농장으로 데려다주더이다. 그때 확실하게 생각했어. 그냥 세상을 뜨자. 늙고 병든 몸으로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 스스로 앗을 힘이라도 남아있을 때 뜨자. 내가 그렇게 장고 끝에 마음먹은 거야. 그러니까 의사선생 나 살려주지 마. 그냥 제발 떠나게 해 주라고."
장검이 찢은 그의 살점과 소장들은 수술을 통해 모두 복원되고 말았다. 그것은 나로 인해 행해졌다. 그리고 노인은 결국, 그가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요양병원으로 전원 되었다.
하루 평균 9.86명의 노인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2016년의 통계이니, 오늘 하루는 더 많은 노인들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아주 확실하게도 노인 자살은 최근 더 급격하게 늘었다. 고령화에 코로나까지. 그나마 서로를 다독이던 동료 노인들과의 단절은 이 과정에서 매우 핵심적인 요인을 제공했다. 이제 외상센터에서 자살에 성공했거나, 또는 성공하지 못한 그들을 맞이하는 일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노인들이 자살을 감행하는 이유는 배우자의 사망이나 경제적, 신체적 문제도 있지만 결국 그 기저에는 '외로움'이 있다. 고독, 고립, 소외 등의 단어들과 흔히 혼용되지만 그중에서도 외로움은 좀 다르다. 뭐랄까, 고독에 비해 비자발적으로, 선택의 여지없이 그러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는 수동의 의미가 더 담겨있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일상생활 수행능력이 감소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자립적인 생활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아주 기초적인 활동들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노인은 타인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 속에 노인들은 스스로를 점점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이 우울감은 곧 외로움과 버무려져 결국 자살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모두, 결국에는, 노인이 된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유기체로 이루어진 숨 쉬는 동물이라면 누구나 그렇다. 인생의 마지막 장을 향해 달릴 때, 외로움이라는 딱지는 필연적으로 따라붙게 되어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감행하기 전, 분명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거나 이를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따라서 자살시도를 막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게이트키퍼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전문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만, 그저 무심한 듯 따뜻한 말 한마디 만으로도 자살사고의 고리가 끊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 그들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다며 화를 내게 된다는 것이다. 노인들의 경우, 화를 내는 주체는 대부분 자식들이다.
어김없이 추석 명절이다. 노인들이 자살을 생각하고, 기획하고, 시행하는 것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제도적 도움이 그들을 세상에 더 머무르게 하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오히려 개인적인 도움은 즉시 시행이 가능하다. 지금 나의 부모님, 혹은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깝거나 먼 미래에 우리는 누구나 그와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된다. 외로움에 잠식되어 세상과 연결된 끈을 놓으려 하는 나의 가족이 있지는 않은지, 한 번 더 살펴보는 따뜻한 명절이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안순태, 이하나, 조정희. (2022). 일개 농촌 지역 노인의 자살 리터러시 수준과 자살 낙인 인식 및 자살 위기대처 능력의 관계: 부정적 정서 경험에 대한 사회적 기대의 조절된 매개 효과. 지역사회간호학회지, 33(2), 164-174.
양승경, 이수정, 이은주. (2022). 지역사회 노인의 자살생각 영향요인: 우울, 외로움, 자아존중감, 일상생활수행능력을 중심으로. Global Health and Nursing (글로벌 건강과 간호), 12(1), 7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