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기술자 왕가위
영화 “중경상림”에서 드러나는 왕가위는 영화기술자다.
중경상림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 장면의 편집물이다. 감독이 전달하려는 진실에 기반한 메시지를 위한 구성이 아니라 단지 영화적 장면을 나열한 편집 속에 시간의 흐름만 있다.
100년이 넘은 영화 역사 위에 남겨진 그 수많은 영화 그 수많은 장면 중에서 왕가위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장면을 끌어와 홍콩이라는 무대에 뒤섞어 왕가위식으로 찍는다. 영화 흉내 내기, 영화적 편집하기다. 이것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현재를 가리키는 끝없는 착각과 몽상과 공상과 환상의 영화적 장면이다.
1부에서 경찰 하지무(금성무)는 4월 1일에 여자친구 아미에게 차인다. 유통기한이 5월 1일로 되어 있는 파인애플 깡통을 매일 하나씩 사들이고 결국 먹어치우고...... “사랑.... 유통기간 만년”이라는 대사 등...... 이 뻘짓, 멍소리 장면을 보고 공감하고 감동하는 것은 자유다. 이 영화적 장면에 뒤섞인 사랑과 이별과 슬픔과 고독을 보며 심오한 철학적, 시대적, 은유적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유다.
술집에서 금발 가발을 쓴 마약 밀매상 여자(임청하)를 만나 수작을 걸어 호텔 방으로 함께 간다. 지쳐 쓰러져 잠든 여자를 두고 떠나면서 넥타이로 여자 구두를 닦아준다. 이 놀라운 찌질 몽상 영화적 장면에 웃음도 화도 없이 설레는 연민을 느낄 수도 있다. 놀라운 기술이다.
왕가위는 관객에게 ‘너도 이렇게 해본 적 있지?’ ‘상상이라도 해본 적 있지?’라며 어깨동무 해온다. ‘그래 맞아’라는 낄낄거림 속으로 관객을 데리고 가는 왕가위의 영화 기술이 재미있다.
2부는 수많은 영화에서 보았던 사랑과 이별과 질투와 밀당 에피소드를 모아 버무린다. 홍콩식 X세대 우렁각시도 들어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비누를 붙잡고 “너무 야위었어. 전엔 뚱뚱했었는데.......”, “이 방이 점점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아”라는 등의 혼잣말에 더해서 페이와 경찰 663 왕조위가 나누는 어처구니없는 대화들과 다리에 쥐가 나서 도망가지 못하는 등의 행위.....
왕가위의 놀라운 기술은 관객에게 반복적으로 너도 이런 적 있지? 이러고 싶었던 적 있잖아! 상상이라도 했었잖아! 낄낄거리자고 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 페이가 종이에 비행기 표를 그리면서 경찰663에게 묻는다.
“어디 가고 싶으세요?
경찰663이 대답한다.
”아무데나 당신이 좋은 곳으로.”
그리고 페이가 부르는 몽중인이 흘러나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 사랑 고백이 너무 뻔해서 그럴 줄 알았다. 라는 생각조차 못 하게 하는 기술이 눈부시다.
영화기술자 왕가위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굴러가는 돌멩이 보고 웃은 적 있지! 떨어지는 낙엽 보고 운 적 있지! 라며 어깨동무하고 관객에게 함께 낄낄거리자고 하는 영화가 “중경상림”이다. 극장을 나올 때, 껌을 씹고 뱉은 상쾌함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