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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at Apr 15. 2022

[Life] 웰컴 투 까사데리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요리먹구가.


잠실에는 신기하고 신나는 집이 있습니다. 3백 번 가까이 사람들이 드나들며, 빈속으로 들어가더라도 속이 꽉 찬 포만감은 물론이고, 마음마저 든든히 채워주는 집입니다. 또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으로 시간의 채도가 높아지는 곳이기도 해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개성 넘치는 슬리퍼, 파티용 안경, 벽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메모지 등 재미난 아이템들과 호스트의 밝은 인사로 기분 좋을 만큼 환대를 받았는데요. 이 집의 주인공은 바로 에리카팕입니다. 집이 가진 사연만큼이나 특이한 이름을 가진 그는 스스로 ‘요리먹구가’란 직업명을 지어 요리를 매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까사데리카(Casa d' Erika)’라 불리는 그의 환상적인 아지트에서 좋아하던 요리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주하고 여기에 감칠맛을 더했는지 들어봤습니다. 까사데리카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에리카팕 님 반갑습니다. 이름이 평범하진 않아요.

본명은 박지윤이에요. 독립 출판을 준비하면서 필명을 고민했어요. 동명이인이 많다 보니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 겹치지 않는 이름으로 정하고 싶었어요.



‘요리먹구가’라는 직함도 그에 못지않죠. “난 이런 사람이 되겠어!”라고 선언하는 것 같아요.

작년 여름에 퇴사하고 정체성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만의 차별화 포인트에 대해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은 힘들어하는 반면 나는 힘들지 않은 걸 찾아보니, 요리와 집들이더라고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는 건 자신 있었어요. 다만 ‘요리 연구가’는 아니라서, ‘요리 먹고 가라’는 뜻으로 지었어요.



작명 센스가 남달라요.

원래 꿈은 카피라이터였어요. 광고홍보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이탈리아어과에 합격했고, 광고회사를 지원했는데 IT회사에 붙어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요. 대신 책을 만들기도 했고, 메뉴나 프로그램 이름도 최대한 재미있게 지으려고 해요. 의미도 전달하면서 말맛을 살리는 위트는 놓치고 싶지 않아요.


와인 5, 오렌지 주스 3, 사이다 2의 비율로 만든 ‘532샹그리아’


원래부터 요리를 즐겼나요?

그것도 계기가 있었어요. 사회 초년생 때 우연히 독립 출판 수업을 듣고 책을 냈는데, 지인들이 그걸 사주는 거예요. 괜히 미안하고 고맙더라고요. 밥이라도 해줘야겠다 싶어서 요리를 시작했고, 집들이 겸 출판기념회를 열었어요. 그 뒤로 집들이를 250번 정도 했어요. 최근 열었던 모임까지 합하면 3백 번은 되겠네요.



와, 그럼 집들이를 할 때부터 ‘요리먹구가’로 활동한 건가요?

7년 동안 남들이 보기엔 안정적이고 좋은 회사에 다녔지만 정작 제 적성에는 안 맞고 너무 힘들었어요. 퇴근해서 저녁밥을 예쁘게 차려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죠. 2년 전 스트레스가 극심했을 때는 요리 유튜브 보면서 마음을 달랬어요. ‘나도 해볼까?’ 싶어서 2~3명 모아서 안 해본 음식을 많이 만들기도 했어요. 때마침 독립 출판 수업을 열었던 책방 사장님이 소셜 다이닝 행사를 해보자고 제안하셨는데, 그게 ‘잇어빌리티(EatAbility)’ 프로그램이에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요리먹구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잇어빌리티’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어요.

품은 적게 들면서 혼자서도 그럴듯해 보이게 차려 먹을 수 있는 레시피를 알려주는 원데이 프로그램이에요. 요리는 저만 하고, 오시는 분들은 드시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죠. 보통 샹그리아, 파스타 같은 서양식 메뉴를 해드려요.



요리를 매개로 활동하는 분들이 많은데, 에리카팕 님은 ‘사람’에 포인트를 두는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해야 시너지가 나요. 친구들이 제 MBTI는 ‘EEEE’라고 할 정도로요.(웃음) 대단한 요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똑같은 메뉴를 제공해도 매번 다른 얘기가 나와서 신기해요. 계속 집들이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해요.



함바집* 콘셉트의 ‘함바데리카’도 궁금해요. SNS로 참여자를 모집할 때 저도 무척 가고 싶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잇어빌리티’를 외부에서 진행하기 어려워져 집에서 다른 모임을 열어야겠다 싶었어요.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해가는 여성 노동자를 위한 함바집’이란 슬로건을 걸었어요. 퇴사하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나 궁금해서 집으로 2명씩 초대했죠. 집밥을 하는 데 비용을 받는 게 조심스러워서 대신 커리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어요. 메뉴는 애호박전, 된장찌개 같은 한식으로 준비했고요.


*함바집: 건설 현장에 임시로 설치된 식당.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왔나요?

대부분 초면인데 직업이 참 다양해요. 직장인도 있고 프리랜서도 많았어요. 내가 진짜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잠시라도 고민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그나마 만족스러운 커리어를 쌓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요리먹구가로서 ‘하길 잘했다’고 느낀 적도 있나요?

‘요리먹구가’로 활동한 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공감해주는 게 가장 보람돼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요. 제가 요리 먹고 가라고 안 했더라면 안 생겼을 일이잖아요.(웃음)



누구에게 내놔도 자신 있는 요리가 있다면요?

전문가는 아니지만, 품을 적게 들여도 있어 보이게 만드는 건 자신 있어요. 특히 허니 갈릭 문어 스테이크! 집들이 음식으로 추천해요. 준비하고 대접하느라 손님과 얘기할 시간은 별로 없고 집들이로 지치는 신혼 부부가 많잖아요. “추천 메뉴 덕분에 손님과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었다”는 피드백을 듣고 뿌듯했어요.



좋아하는 게 일이 되면 싫어진다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 그러기도 해요?

아직까지는 재밌어요. 근데 요리먹구가를 평생의 일로 보진 않아요. 현시점에서 소통의 매개가 요리일 뿐이죠.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많다고 봐요. ‘이것만 하고 살아야 하나?’라는 압박이 있다면 좋아하던 게 싫어질 수 있겠죠. ‘이거 안되면 다른 거 하면 되지!’ 다른 옵션이 많다고 생각하니까 스트레스는 없어요.



그렇다면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하숙데리카’라고 해서 하숙집 콘셉트로 20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함바데리카에 오신 분들과 얘기를 해보니 ‘20대에 무엇을 해봤느냐’에 따라 지금의 일에 영향을 주더라고요. 다들 20대 친구들을 MZ세대로 묶어서 이야기하잖아요. 하지만 개개인의 이야기에는 하나로 특정 지어 요약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봐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내어주고 대화하는 일을 비유하자면 어떤 맛일까요?

다진 마늘 맛! 다진 마늘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음식에 풍미를 돋우면서 감칠맛을 내잖아요. 회사 다닐 적에 요리하고 집들이하는 게 그렇게까지 맛있었는지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제가 그걸 안 했다면 분명 맛없는 시간이었을 거예요. 지금 와서는 삶의 큰 맛을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인생이 참 맛있어졌네요.



5분컷이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허니 갈릭 문어 스테이크’


[재료] 자숙 문어, 다진 마늘, 버터, 꿀, 설탕, 식초


1. 끓는 물에 식초 한 숟갈, 설탕 한 숟갈을 넣고 칼집을 낸 자숙 문어를 5분 동안 데친다.

2. 문어를 데치는 동안 버터를 넉넉히 팬에 녹인다.

3. 다진 마늘을 팬에 듬뿍 넣고 마늘이 노릇하게 익으면 문어 다리 하나당 꿀을 크게 한 바퀴 두른다.
    (꿀은 많이 넣을수록 꿀맛)

4. 데친 문어에 소스가 잘 배도록 1분 정도 익힌 다음 그릇에 담으면 완성!




Editor 안명온

Photographer 김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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