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일상
인생에는 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 살면서 꼭 해야 할 일의 양은 정해져 있다는 법칙이다. 행복 총량의 법칙, 심지어는 지랄 총량의 법칙도 있지만, 글쓰기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 책이 좋았고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문과에 가고 싶었고, 국문학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토지, 태백산맥이 문학의 정점을 이루던 시절인데도, 당돌하게 소설가가 되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또렷한 이유 하나 없이 마냥 좋기만 한 것에는 어떤 잣대나 경계선도 없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국문학과 나와서 어떻게 수입을 만들 건지 구체적으로 묻는 질문들에 할 말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과 돈을 번다라는 개념을 같이 생각해 보지 않아서였을까?
분명히 느낀 건 좋아한다는 의미에 첨가물 같은 현실적인 근거가 필요해지는 순간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번 흐릿해진 좋아함은 점점 연해지고 연해지더니, 나중에는 내가 그때 좋아했었지 정도로만 기억되는 정도가 됐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 시국으로 전에 느껴보지 못한 변화들은 다시 그 좋아함을 찾아내도록 도와줬다. 사람이 겪어보지 못한 벽에 직접적으로 부딪히면 다시 초기 상태를 복기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좋아했던 원색 같은 좋아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찾아냈다는 것이다. 글을 써야 하는 총량이 아직 한참 덜 채워져 있었기에 어떤 계기로라도 다시 찾게 도와준 것 같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다. 지금도 가끔 ‘왜 글을 쓰지?’라는 의문부터, 물기 없는 고구마 먹을 때처럼 막연함을 느낄 때가 있다.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시대에 끄적거리고 있는 나를 보면서, 이젠 스스로 좋아함과 현실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글쓰기 총량의 법칙이란 저울이 있다면, 좋아함이 이길 때가 되었지 않았을까? 이유 없이 좋아함이 중량을 늘려가도록 계속 써보고 써볼 생각이다.
사진: Unsplash의 Piret ll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