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

의심과 질문 속에서도 다가오는 신앙의 말들

by 사라리


철 따라 바뀌는 풍경. 파란 하늘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공간. 우렁찬 첫울음을 울며 태어난 생명. 이것이 Mystery, 신비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과학을 빌어 뒤따라 가는 것일 뿐, 다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신비의 영역인 것이다. 그렇담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아, <알라딘>의 지니를 떠올려보자.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그도 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누군가를 대신 죽이는 것,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 그리고 바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 이건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허니 신비에 해당하는 한 가지를 더한다면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 나는 말하겠다.


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디즈니 프린세스들은 모두 하나같이 각자의 짝을 만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처음 읽은 한국단편소설 모음집도 반 이상이 사랑 이야기였다. <배따라기>처럼 과격한 사랑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도 있었다. 사춘기 중학생 시절에 한참 빠졌던 판타지 소설이며 팬픽은 물론이고 아시아를 넘어 영국이건 미국이건 유럽이건 각종 서양 소설도 결국엔 모두 사랑 이야기였다. 그러다 여성으로서의 지금의 나를 만든, 나의 최애 시리즈가 된 SATC는 제대로 톡 까놓고 여자들의 사랑을 풀어낸 시리즈였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나는 러브스토리와 함께 했고 그 주인공이 되기를 꿈꿨다. 마치 캐리가 자신의 일생의 남자 미스터빅에게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을 마침내 듣고야 마는 것처럼. "Carrie, you are the one."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교회에서 어렸을 때부터 러브스토리와 연애보다는 바람직한 크리스천 가정을 이루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그런 가정을 꾸리기 위해 난 배우자로서 잘 준비되어야 했다. 이렇게 사는 삶이 나와 같은 지향을 가진 배우자를 자연스럽게 만나도록 이끌어 줄 것이라고 들었고 그 말을 굳게 믿었다. 그게 내가 올바른 크리스천 싱글 여성으로 살아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애당초 사랑의 신비를 찾을 생각보다는 신앙적으로 열심을 다하며 살았건만. 실상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초 집단인 교회에서 결혼 상대가 될법한 연령대의 남자는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그중에서 나와 같은 지향을 가진 남자를 찾을 경우의 수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신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찾아 처음 보는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겠어요! 할 수 있는 위인도 못 되었다. 외국으로 가면 혹시나 답을 찾을까 싶어 도전해보려 했지만 그것도 안 됐다. 실은 그동안 내가 배우고 믿었던 그 말들을 내버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삶을 통해 배우고 쌓아온 이 자산들에 대해 동의하고 함께 이 길을 걸어줄 사람을 찾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면 결혼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결혼이 아니면 끝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고집과 끈기 덕분에 결혼은 점점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고 급기야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부모님의 근심과 교회의 무심, 그리고 곤두박질치는 자존감의 하락 속에 잠 못 드는 밤과 쉽게 눈 떠지지 않는 아침이 늘어갔다.


내 마음과 상황이 어떤지와는 상관없이 시곗바늘은 착실히 돌아갔고 그 쳇바퀴 속에서도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베푸셨다. 3년 터울을 두고 터키+그리스와 이스라엘+요르단 성지탐방의 기회를 주셨고 신구약의 성지들을 돌아보게 하시며 나를 위로하셨다. 역사의 현장에서 이 복음이 어떻게 나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주셨다. 왜 나에게는 당연한 러브스토리가 허락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악을 썼는데. 내가 그렇게 그리는 러브스토리가 이렇게 생생히 내 눈앞에 실재한다는 걸 실감했다. 그분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렬하고 강력했다. 이를 통해 결혼 역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간과 방법을 따라야 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한나가 기도했던 실로에 가서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게 남편을 주시면 제 것으로 삼지 않고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라고.


그즈음 결혼 대상자로 고려해 볼 수 있는, 내 또래의 크리스천 형제가 실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동년배인 다른 크리스천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싶었다. 당장 교회를 옮기는 건 쉽지 않아 내가 선택한 방법은 크리스천 데이팅 어플에서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여러 개 중 개인 프로필 대신 자기소개 내용을 먼저 보여주는 어플을 골랐다. 조건을 맞추어 소개받아 만나는 것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난 상태였고 그 어플은 자기소개 내용을 작성해야만 가입이 가능하다는 게 괜찮아 보였다. 소개글을 적으며 나 자신에 대해 정리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들어가 보니 3040 싱글 크리스천 형제가 있긴 있었다. 물론 영 아닌 사람들도, 소개 내용이 부실하거나 자기 자랑조 스타일도 가끔 나왔다. 간간이 내 소개글에 좋아요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거의 사역자들이었다. 당시에는 그게 좀 신기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싶다. 나의 역사와 가치관이 인상적으로 먹히는 건 그쪽(?)이었던 것이다.


실재를 확인했을 뿐 별다른 일 없이 몇 달을 보냈는데 어느 날 누군가 좋아요를 보냈다. 그 역시 부목사로 일하는 사역자였는데 이전의 이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자기소개를 아주 공들여 적어둔 것이 첫째였고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들어왔던 건 바라는 배우자 상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는 배우자가 누군가의 아내로 살기보단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자신의 인생을 빛내며 살 수 있길 바란다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여 자신의 꿈과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보통은 내가 원하는 어떤 배우자 상을 상정하여 제시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소개 중 인상적인 몇 가지가 더 있었던 터라 나도 그의 소개글에 좋아요를 눌렀고 서로의 개인 프로필이 오픈되었다.


온라인으로 연락을 주고받다가 한 달 뒤 실제로 처음 만났다. 만나자마자 조금은 특별한 나의 신앙적 배경에 대해 바로 패를 오픈해 버렸다. 이것이 만남의 걸림돌이 될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넘어서지 못한다면 진지한 만남은 가보지도 못할 것이기에 조심스러우면서도 분명하게 조곤조곤 설명을 했다. 그런 나를 그는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다 듣고서는 다년간의 신학 공부를 통해 나의 배경에 대해 이미 알고 있으며 본인의 추구와도 결이 맞는 부분이 꽤 있다는 답을 했다. 걸림돌이라 생각한 것이 그에게는 마치 작은 조약돌 같았다. 내가 이렇게 다른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환영받는 느낌은 조이스언니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코로나 기간에 만남이 시작되어 직접 만나지 못한 시간이 훨씬 긴, 1년 여의 교제 기간이 시작됐다.


교제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 다른 신앙적 배경과 색깔을 서로 이해하고 설득해 가며 우리가 믿음의 한 형제요 자매인지를 검증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기분. 물론 그 시간이 달콤하게만 흐르진 않았다. 상대는 물론이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이 만남이 정말 맞는 건지 매 순간 돌아보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 자리를 지켜주었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나의 이런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상황과 마음을 열도록 이끌어주셨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 1년의 시간을 통해 그동안은 꿈꿀 수 조차 없었던 방법으로 그를 만나고 사랑을 받으며 나누게 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시는 러브스토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하셨다. 결국 나도 캐리 언니처럼 나와 함께 그 길을 달려 줄 사람을 만나게 됐다.


언젠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배울 때 나는 이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도 이 아름다운 연합과 동거, three in one의 관계에 대해 배우고 싶은데 그걸 배울 수 있는 장소가 제게는 교회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저는 어디에서 이걸 배울 수 있을까요. 제가 이걸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는 결혼을 해야겠어요.

그때의 기도와 실로에서의 기도는 그와 결혼에 이르는 것으로 응답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는 계속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 신비의 세계로 점점 더 이끌려가고 있다. 더없는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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