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이 되지 않는 답변들 앞에서 마음이 식어갔을 때
하루는 학생들의 시험 문제를 출제 편집하며 시험지를 분철했고 다음 날은 퇴근 후 눈썹이 휘날리게 학교로 달려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시험과 고시를 준비했다. 나의 20대의 중후반은 학생이자 선생으로 사는 시간이었고 대학원을 졸업하니 서른이었다. 번 돈을 학비로 쓰며 그렇게 열심히 달리기 바빠 결혼은 아직 먼 일 같기만 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라, 생각보다 꽤 나이를 먹었네, 생각이 들었다. 20대 후반 즈음에 남자 동기들도 장가를 가기 시작했건만 나는 아직이었다. 결혼을 늦게 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네, 했다. 그렇게 학생의 스테이지를 마치니 새로 열린 스테이지의 이름은 비정규직이었다. 난 기간제 교사로 3개월, 6개월, 길어야 1년을 이리저리 순회하는 보따리장수가 됐다. 학교에 자리를 구하지 못했을 때는 한국어 강사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부모님에게는 과년한 딸이자 혼기 지난 교회 누나(이건 내가 만든 말이 아니고 실제 어느 기독교 신문의 기사 제목이었다)가 된 나는 결혼 시장에서 나이도 나인데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한 사회인이었다. 어른들이 주선해 주시는 만남의 자리에서 나는 매력도가 떨어지는 후보자였다. 내가 마음에 드는 후보자인 것을 차치하고 더 큰 문제는 내가 나와 신앙적 배경이 같고 신앙적으로 성숙한 형제와 결혼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내가 괜찮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흘렀고 내 나이는 어느덧 3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분을 섬기며 주어진 삶을 충실히 대하는 나의 모습에 누군가 분명히 매력을 느낄 거라고,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게 될 거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며 배웠는데. 나에게 “You are the one.”이라 말하는 사람은 도무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일은 참 공교롭게 중첩된다. 6개월 기간제가 끝나고 일을 구하는 중에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싶어 지원한 코이카 한국어 단원에 덜컥 합격했다. 그런데 내가 원했던 지원국이 아니라 제3 국으로 최종 파견 발표가 났다. 이게 뭐람. 제3 국의 치안 상황에 대해 부모님은 염려하셨다. 무엇보다 일도 결혼도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현재 상황을 그냥 피하고 싶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결국 입교를 포기했다. 그러고 나니 기간제 계약 종료를 앞두고 방문했던 러시아 선교지에서 한국어 교사를 여전히 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코이카도 나가려고 했던 마당에 이왕이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야겠다는 굳센 일념이 생겼다. 여러 일정과 현지 상황을 타진하며 러시아 입국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고 나는 계속 대기하는 입장이었다. 때마침 존경하는 선생님 한 분과 통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지난 일들과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고민을 말씀드렸는데 다 들으시고는 그 답으로 한 말씀을 그냥 툭 던지셨다. 아뿔싸. 그게 간당간당하던 나의 두려움을 확인 사살하는 트리거가 되어버렸다. 너 그럼 시집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나이가 있는데, 이제 20대에 하던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건 안 돼.
통화를 하지 않았다면 난 괜찮다고 계속 생각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분명 그전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추위건 꼬불거리는 키릴 문자건 두렵지 않았다. 나는 크게 두려운 게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혼자서도 살 수 있고 잘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앞으로 쭉 혼자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좋은 것도 정도껏이지 언제까지 혼자여야 하는가.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친구들은 가정을 이뤄 이제는 자신의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가 되었다. 삶의 여러 고민과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믿음의 선배들도 하나둘씩 싱글 생활을 접었다. 내가 이미 그 선배들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결혼이 늦어도 한참 늦어졌는데 다가올 1년도 그냥 넘기기로 작정하면 어떡하냔 물음에 그건 상관없어요라고 대답할 만큼 난 담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잠재된 두려움을 키우게 된 결정타는 자꾸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 조이스언니였다.
조이스언니는 내가 호주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되어 한참 방황할 때 만났던 믿음의 선배이자 정말 탁월한 싱글 여성 크리스천이었다. 내가 공부했던 호주에 한참 먼저 가 공부했었고 내 아주 아주 어릴 적 꿈이었던 선교사로 살던 사람이었다. 일면식도 없고 오히려 신앙의 색깔이 다르다며 지레 겁먹었던 나를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살갑게 대해주었다. 우리는 한 대학교 영어 동아리에서 학생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중에 알게 됐는데 그때 수업이 끝나기 전, 언니가 짧게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때 나는 언니의 진가를 알게 됐다. 이 언니 정말 보통 아닌 사람이구나.
언니는 동아리에서 함께 섬기는 자매들을 모아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는 '딸들의 기적'이라는 이름에서 앞 글자를 딴 '딸기' 모임이라 이름을 붙이고 룻기를 공부했다. 어쩜 그렇게 말씀을 조곤조곤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해 주던지. 정말 재미있었다. 언니는 큰 솥에 각종 요리를 만들어 수많은 학생들을 집에 초대해서 먹이고 살폈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보듬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언제든 할 수 있는 대로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섬기고 도우며 하나님을 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가 안타까운 선택으로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언니의 어머님이 병환으로 소천하신 후 많이 힘들어했다고 들었는데 그 후 1년 만에 언니도 그 뒤를 따른 것이다. 언니의 소천 소식을 들은 날이 내 임용 1차 결과 발표일이었는데 나는 소천 소식이 내 탈락보다 훨씬 더 충격이었다. 누구보다 그분 앞에서의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었고 그분께 돌아오는 삶의 기쁨과 축복을 룻기를 통해 나에게 알게 해 준 언니였는데. 언니의 이런 마지막을 대하니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겼던 언니의 그 마지막 선택. 만약 언니의 곁에 누군가 함께 했다면 그 선택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 그리고 그런 선택을 내가 안 하리란 법이 있을까 싶은 무서운 생각. 나는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또한 내가 제 발로 혼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려 한다는 것 때문에 패닉에 빠져 버렸다. 두려움에 침잠해 가던 그때. 마침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가 개봉했다. 주인공인 프레디의 행보를 보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모습들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러면서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두려워 말라'는 명령을 다시 묵상하게 되었다. 그분을 힘입어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야 했지만 오히려 그것에 매몰되었던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혼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분의 도움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 자신하는 일을 두려워해야 했다. 두려운 순간에 그분은 항상 말씀하셨다. 가만히 서서 그분의 일하심을 지켜보라고. 두려움으로 피하여 도망가거나 절망에 빠지는 대신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진정한 용기임을 나는 다시 깨달았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겠다고 했지만 사실 러시아행도 코이카 지원과 다르지 않았음을 나는 인정하게 됐다. 결국 나는 그분이 하신 말씀과 교훈을 따라 어딘가로 떠나지 않고 머무는 것을 택했다. 그렇다고 두려움의 그늘이 단번에 걷히진 않았다. 내 인생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거나 프린스 차밍이 갑자기 나타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마음과 결심을 뒤흔드는 일들만 연이어 터졌다. 내 속을 긁는 말을 하는 사람만 늘어갔다. 떠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대해 자꾸 의심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구원하겠다, 복을 주겠다. 큰일을 보이리라 하신 그분의 약속들을 떠올렸다.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기보단 프레디처럼 용기를 내기로 다시 다짐했다. 나는 그렇게 식어가는 마음을 다잡으며 버텼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그분은 그분의 일을 하고 계셨다. 참으로 신실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