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망가진 존재로 느껴졌던 때

by 사라리


스미골과 골룸. 지킬박사와 하이드. 브루스 배너와 헐크. 맷 머독과 데어데블. 하나같이 주옥같은 캐릭터들이다. 이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들이 가진 양면성 때문이다. 선한 본성에 반하는 모습들이 나타날 때 보이는 괴리가 클수록 우리는 이들의 캐릭터에 더 빠져들게 된다. 우리에게도, 아니 나에게도 두 얼굴은 존재한다. 이 두 얼굴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봐도 어쩔 수 없는 나의 본성을 반복해서 일깨워준다. 나의 이중성을 제대로 알게 된 건 중학생 때였다. 열네 번째 생일날, 더없는 축복과 사랑을 받으며 침례를 통해 비로소 믿음의 길을 걷는 이들과 보조를 맞추게 되었다, officially. 그냥 그렇게 늘 밝고 즐겁기만 할 줄 알았던 그 길이 사실 고생길의 시작이었단 걸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이기를 힘쓰는 자들과 함께 하고 싶은 소원을 가진 부모님은 우리가 오랫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 교회 근처로 아파트 분양을 받으셨다. 게다가 기적적으로 중도금을 마련하여 내가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얼마 후에 이사를 하고 전학을 왔다. 교회가 가까워진 건 좋았다. 그렇지만 학교 생활은 전혀 딴판이었다. 전학오기 전 학교에서는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친하고 담임선생님과 교과 선생님들도 모두 좋은 분이셔서 공부도 재밌었고 중간고사 성적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거기서는 정말 즐겁고 순조로운 학교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전학생의 일상은 그렇지 않았다. 공부하던 책과 진도가 맞지 않아 기말고사를 완전히 망쳤다. 친구가 없어서 며칠 도시락을 싸갔지만 안 먹고 그냥 집에 가져오기도 했다. 내내 장밋빛이었던 학교 생활은 한순간에 와장창 박살이 났다. 2학년 때는 급격하게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감정이 휘몰아치는 사춘기가 찾아왔다. 게다가 하필이면 액취증이 내 2차 성징의 신호탄이었다. 동급 남학생들에게 이것은 증오와 놀림의 대상이 됐다. 수군거림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걔들이 날 살짝만이라도 건드린다 싶으면 앞뒤 없이 엄청난 육두문자를 때려 박았다. 걔들은 불에 덴 것처럼 놀라 자리를 피했다. 그날부터 나는 학교에서는 잘못 건드렸다간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무지막지한 쌍욕을 퍼붓는 개쓰레기가 됐다. 모든 남자를 증오하고 혐오했다. 이 혐오의 감정은 꽤 오랜 시간 나의 이성관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달랐다. 나는 학생회와 성경 공부에 열심인, 그 누구보다 신실한 학생 자매였다. 모든 학생회 활동에 빠지지 않았고 신앙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학교에서 채울 수 없는 정서적 안정과 또래와의 친밀감을 나는 교회에서 찾으려 했다. 교회에서의 나를 보고는 그 누구도 개쓰레기인 나를 상상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 나의 위장술은 철저하고 기민했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무너져 내리기만 했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 괴리감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몸서리쳤다. 이제 막 주를 따라 살겠다 결심했는데 나는 더욱 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위장술이 더는 없을 줄 알았는데 그로부터 8년 후,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성경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호주로 갔다. 성경 학교에서 매일 성경을 읽으며 공부했고 현지 초등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을 가르치는 실습도 했다. 초반 3개월은 정말 즐거웠고 재미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연애도 했다, 같이 공부하던 학생과. 문제는 연애와 공부를 병행하면 둘 다 잘 안 된다는 거였고 더 큰 문제는 그 연애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수료를 마치기 3개월을 앞두고 그와 결국 헤어졌다. 얼굴은커녕 뒷모습도 보기 싫은데 그를 피할 수 없었다. 아직 집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은 기간 동안 매일 보고 살아야 하는 그 상황이 정말 싫었다. 그렇지만 더 고역인 건 내가 매일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경의 모든 본문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성경을 공부하러 갔으니 나는 그 배움을 실천해야 마땅했다. 실천은 무슨. 알면서 하는 건 더 나쁜 일이니 나는 더 이상 알고 싶지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는 내 처지에 그냥 정말 눈 딱 감고 죽고만 싶었다.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진 내가 말씀을 공부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보다 더 나락은 없을 것만 같았다. 괴로운 마음에 나는 인적 없는 성경 학교 주변 강가를 미친년처럼 울며 걸었다.


성경학교 강의 일정 중 요한복음을 공부하던 때였다. 요한복음을 강의하신 선생님은 내게 최고의 스승이 되어주셨다. 짧은 2주간 선생님과의 개인 상담을 통해, 강의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깊이를 제대로 배웠다. 12장에 이르러 이윽고 그 사랑의 말씀 앞에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통해 나의 이 더러운 발을 내어드려야만 그분과 "상관있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발은 아무리 깨끗하게 하려 해도 어쩔 도리 없이 더러워지는 법. 이미 죄 사함을 받은 깨끗한 내가 씻어야 하는 것은 더럽고 냄새나는, 내놓기 창피한 그 발이었다. 염치없지만 더러울 때마다 그분 앞에 발을 내밀어 주님이 씻기시어 깨끗하게 되도록 말이다.


중학생 때 학생회 선생님이셨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손 안에서 녹지 않는 M&M 초콜릿" 같은 거라며 그분의 장중에 있을 때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정말 그랬다. 하나님과 세숫대야를 사이에 두고 앉을 때가 바로 M&M 같은 순간이었다. 또 다른 선생님은 나 자신을 주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참된 자아실현을 불가능하며 게다가 자기 연민과 열등감에 허우적거리게 되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니 더더욱 말씀을 대하기를 힘쓰라 편지를 써주셨다. 그렇게 말씀하셨던 이유가 이 요한복음 말씀에 있었던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이중성의 굴레. 그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어떡해서든 하나님을 피하고 싶었다. 그럴수록 나는 이 추악한 본성의 민낯을 더욱 직시하게 될 뿐이었다. 그런 나를 구원한 건 역설적으로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모든 죄의 권세를 물리치신 그분의 은혜였다. 하나님이 나에게 왜 필요한지를 비로소 절실히 체감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분의 손을 벗어날 수도, 벗어나려 해서도 안 된다. 아니, 애초에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그분은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에.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세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