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회에서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을 때
추운 겨울이었다. 수요집회에서 침례를 앞둔 분들의 구원 간증을 듣고 우리는 모두 교회 근처 목욕탕으로 갔다. 예배당에 침례탕이 없어서 그때는 근처 목욕탕에서 침례식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90년대 초, 평일 저녁시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였냐는 질문과 자신의 신앙고백에 따라 침례를 베풀겠다는 형제님들의 안내가 끝나면 양팔을 잡힌 몸이 목욕탕 물 속으로 잠기는 걸 볼 수 있었다. 온 몸을 완전히 담가야 하기에 우리 교회에서는 이 예식을 ‘침례’라 칭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로 시작하는 찬송가의 후렴이 은은하게 목욕탕 안의 공명을 울렸고 모두 한 마음으로 작은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침례식은 마무리가 되었다. 나의 엄마와 아빠는 같은 목욕탕에서 2년 터울을 두고 침례에 순종하셨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 때까지의 일이었다. 물론 침례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의식은 우리가 하나라는 것, 그리고 이곳에서 함께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임을 확실히 깨닫게 해준다는 걸 말이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여섯 살 때 처음 교회에 가게 되었다. 그곳이 30년 동안 나의 신앙의 토대이자 배경이 되었다. 교회에 가기 전까지 나의 사회적 관계라고는 그래봐야 우리 가족 아니면 유치원 친구 정도였을 텐데 많은 어른들, 선생님들, 삼촌이모들, 언니오빠들이 거기에 있었다. 다양한 연령대와 많은 사회적 접촉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교회였다. 지금처럼 유튜브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런 다양한 자극이 있는 교회가 나는 좋았다.
열심히 공과공부를 하고 암송을 했더니 예배당 중앙 기둥에 붙어있는 내 포도송이가 하나 둘 씩 채워졌다. 포도송이의 이름을 확인하신 어른들은 종종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영문을 모른 채 따라간 삼촌이모들의 청년회 수련회에서 흥겨운 포크댄스를 처음 접했다. 삼촌이모들은 우리 어린이들을 데리고 함께 포크댄스를 추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몇 년 후, 성탄절 즈음에 있었던 송년 발표회에서 주일학교 시간에 배운 성탄 어린이 찬송을 부르고 싶다고 했더니 청년 삼촌이모들이 나와 내 친구에게 기회를 주었다. 우리 둘은 피아노 발표회를 위해 엄마가 만들어준 드레스를 입고선 손을 꼭 붙잡고 무대에 섰다. 현재 CCM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내 친구에겐 그게 첫 데뷔 무대가 됐다. 너무 떨렸는지 난 내가 맡은 1절 마지막 부분의 고음을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처리하며 겨우 노래를 마쳤다. 노래가 끝나고 조명이 꺼지자 엄청난 환호성이 나왔다. 엄마아빠와 이모언니들도 엄청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쑥스러웠지만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많은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더 이상 포도송이는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새로운 자극들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청소년 시기에는 학생들인 우리가 직접 준비하는 <생명의 샘> 공연이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끼리 싸웠다가 화해했다가 하면서 공연을 준비했다. 이렇게 공동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시간은 우리로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실제적으로 배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기회가 됐다. 나와 함께 싸우고 화해했던 친구, 언니오빠, 동생들, 그리고 끝까지 다독이며 그들을 지도한 헌신적인 선생님들의 섬김이 있었기에 나는 질풍노도의 파고를 넘어 진정한 신앙인으로 다듬어져 갈 수 있었다.
교회가 없는 나의 성장기가 어땠을지 상상해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교회라는 물리적 장소와 그 구성원들이 지난 30년간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해주었다. 이뿐 아니다. 함께 동역했던 학생회 교사 선후배(특히 여교사들), 호주 성경학교 재학 중 외국인 학생인 나를 보살펴 주셨던 현지 교회 할머니 할아버지들, 네팔 봉사활동 기간에 보호자 역할을 해주었던 성도님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면서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몸이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내 노력으로는 다 갚지도 못할 사랑의 빚을 너무 많이 졌다.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다른 곳을 생각하지 못하고 계속 버틴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더운 여름이었다. 교회 수양회로 계곡에 온 나는 시원한 계곡물에 몸을 담그며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침례에 순종했다. 물에서 나오자 익숙한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찬송가 후렴이 계곡 사이에서 메아리 쳤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망울이 “이는 내 사랑하는 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고 말하고 있었다. 14번째 생일날,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