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재 Apr 18. 2022

비닐봉지를 거절하면 예뻐진다?

  INTP의 특징을 설명한 나무위키 페이지의 마지막 스크롤을 내리고 와우, 작게 탄성이 나왔다. 누가 내 속마음을 훔쳐보고 쓴 것같이 그저 맞는 말 대잔치였다. MBTI 검사는 사람의 성격을 16개의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각각의 유형은 4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그 첫 번째 알파벳은 I(Introversion)와 E(Extroversion)다. 내향적, 외향적으로 나누는 것이 성격을 분류하는 첫 관문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잠깐 슈퍼에 갔다 오는 것도 다 외출이고 스케줄임, 한 번 나온 김에 모든 걸 처리하고자 함, 집에서 딱히 하는 것도 없는데 행복해함, 한 번 외출하고 돌아오면 오래 쉬어줘야 충전됨, 사람 만나는 거 귀찮아함 등등….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내향적인 사람 특징을 정리한 글을 읽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고 만다. 나, 내향적인 사람 맞다.


  아마 이토록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쇼핑 방법은 비대면의 끝판왕인 인터넷 쇼핑일 것이다. 누구의 얼굴을 보거나 대화할 필요 전혀 없이 스마트폰 액정 위 손가락질 몇 번이면 다음날 새벽에라도 문밖에 박스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세상이다. 차선으로는 도시마다 즐비한 대형 마트도 나쁘지 않다. 냉난방 쾌적한 신식 건물 속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걱정이 없다. 서른 명당 한 명 정도로 만나는 직원도 프로답게 시선을 저 멀리 능숙하게 처리한 채 바삐 걸어갈 뿐이다. 유일하게 사람과 말을 섞어야 하는 계산대가 난관이었지만 그나마도 요즘은 셀프 계산대가 부담을 덜어 주기까지 하니, 내향적인 사람들에게는 참 좋겠다.


  찐 내향인이자 결혼 사 년 차인 내가 아직도 마켓컬리, 쿠팡의 아이디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신기하다. 아, 이마트몰로 주문해본 적도 없다. 첫 구매만 해주신다면 무료 배송은 물론이요, 뭘 100원에 주고 뭘 1,000원에 준다며 읍소하는 광고에 몇 번 흔들릴뻔한 적이 있지만, 단전으로부터 의지를 끌어모아 다 이겨낸 결과다. 누군가 왜냐고 물어봐 준다면 나는 흐린 눈을 하고 먼 산을 응시하며 "그때 그 한 권의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하고 슬프게 중얼거릴 것이다.


  내가 2017년 여름, 합정동의 한 북카페에서 만난 책은 <나는 쓰레기 없이 산다>(비 존슨 저)였다. 그 독특한 제목에 끌려 책장을 펼쳤고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한 궤적을 따라 걷던 내 삶이 그날 이후로 조금 비딱하게 각도를 틀었다. 비 존슨 작가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부였는데 쓰레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생활방식을 찾아보기로 한다. 두 아이와 남편까지 설득한 그녀는 1년 동안 가족과 함께 5Rs를 실천했다.


Refuse; 거절하기 : 일회용품, 사은품, 쇼핑백, 비닐, 포장지 등 무료일지라도 필요 없는 모든 것은 받기 전에 단호히 거절한다. '쓰레기를 받지 않을 권리'도 있다.     
Reduce; 줄이기 : 주변에서 낭비를 줄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 실천한다. 물, 전기, 돈, 샴푸와 세제, 식품, 일회용품까지 다양한 아이디어로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Reuse; 재사용하기 :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을 지양하고 하나의 물건을 계속 재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한다. 쉽게는 잘 알려진 텀블러, 장바구니 등을 쓰는 것이 좋은 예다. 물티슈 대신 손수건, 랩 대신 밀랍 랩, 휴지 대신 와입스, 일회용 생리대 대신 면 생리대나 생리컵 쓰기, 이면지 알뜰하게 쓰기,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업사이클링까지 재사용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Recycle; 재활용하기 : 택배 박스에서 송장과 테이프를 떼고 납작하게 접어서 버리기, 종이팩과 멸균 팩은 종이와 별도로 주민센터에 갖다주기, 투명 페트병은 라벨을 떼고 정해진 장소에 모으기 등 올바른 방법을 제대로 숙지하고 배출해야 한다. 그러나 재사용보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과정이고 선별 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탈락한 60%이상이 허무하게 매립, 또는 소각되는 현실이다.     
Rot; 썩히기 : 비 존슨 작가는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있어서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면 땅을 파고 묻어서 퇴비화를 실천했다. 집에 텃밭이 없어서 곤란하다면 플라스틱 대신 썩을 수 있는 소재, 나무, 흙, 종이로 된 물건을 선택하는 것도 좋겠다. 단, 요즘 유행하는 소위 '생분해 플라스틱'은 특정 온도 조건에서 일정 기간이 지나야 썩을 수 있는데 이것저것 다 뒤섞인 쓰레기 더미에서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맹신하면 안 된다.     


  5Rs를 실천한 결과, 작가와 그의 가족은 1년 동안 고작 작은 유리병 하나에 꽉 차는 쓰레기만 만들었다. 그 병 사진을 뚫어져라 보며 나는 충격에 빠졌더랬다. 나는 사실 이십 대 초반부터 환경 보호에 꽤 관심이 있었던 지라 빨대와 종이컵 거절은 물론이고 장바구니나 머그컵 같은 것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장바구니를 지참한들 어쩌랴, 그 속에 구매한 물건들이 이미 플라스틱으로, 비닐로 단단히 포장되어 있는데. 그래도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줄 알고 만족하던 나에게 유리병 속 쓰레기 사진은 내가 하던 노력의 10배 정도가 더 가능하며 쓰레기를 '줄이는 것'을 넘어 '거의 제로에 가깝게' 없앨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죽비로 어깨를 한 대 얼얼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 죽비소리와 함께 낯선 길로 한 발짝 한 발짝 서툴게 내디디며 나의 제로 웨이스트 도전이 시작됐다.


  결혼을 하게 되고 신혼집에 입주하고도 여전히 내향적이던 내가 처음 집 근처 재래시장을 방문했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장바구니는 물론이고 속 비닐 대용으로 쓸 천 주머니 몇 개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출발했다. 내가 사고 싶은 건 과일이었는데 세상에나, 시장 하나에 그렇게 과일 가게가 많은 줄 몰랐다. 시장을 빙글빙글 돌면서 열 몇 군데의 과일 가게를 봤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번쩍거리는 비닐 포장이 된 곳이 많았다. 그래도 다행히 그중에 한 군데를 발견했다. 과일들이 포장 없이 무심하게 쌓여 있는 가게였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 사장님이 그 앞에 앉아 계셨는데 어떻게 첫 마디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괜스레 시장을 한 바퀴 더 돌고 와서야 해볼 용기가 생겼다. 주춤주춤 과일 쪽으로 다가가자 사장님이 바로 일어서서 나를 반기신다. 인터넷과 대형마트에서는 이런 상호작용 없이도 과일을 살 수 있었지만, 재래시장에서는 어림없지. 이미 사장님이 일어서신 이상 어쭙잖게 내뺄 수가 없었다. 떨렸지만 침착하게 과일 몇 가지를 골라서 말씀드렸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까만 봉다리'를 뜯는 사장님을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제압하며 준비한 천 주머니를 내밀었다. 미리 이 중요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여러 번 연습해 본 덕이렷다. 


  "주머니가 더러워질 수도 있어요."


  영 미덥지 않은지 사장님이 한 번 더 까만 봉다리를 권했지만 그렇게 살 거면 모처럼 재래시장에 온 이유가 없어진다. 연신 괜찮다고 말씀드리며 마침내 비닐 없이 과일 사기, 그 역사적인 첫 성공을 해냈다. 준비해온 지폐를 내미는데 손끝에 느껴지는 종이 질감이 참 낯설었다. 나, 카드만 쓰던 도시 여자였는데…. 물론 재래시장에서도 카드 사용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첫 도전이니만큼 영수증 쓰레기조차 받고 싶지 않았다. 카드 결제 후 나오는 매끈한 종이 영수증은 종이처럼 보여도 화학 처리가 됐기 때문에 재활용이 아닌 일반 쓰레기로 버려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만 한 해 종이 영수증이 146억 건이나 발행되며 그 길이는 지구를 여섯 바퀴 감을 수 있을 정도라니, 작은 영수증이라도 가볍게 받고 버릴 수 없다.


  그날을 시작으로 과일 뿐 아니라 호박, 깐마늘, 양파, 감자, 가지, 느타리버섯, 잡곡, 두부 등 거의 모든 식재료를 재래시장에서 포장 없이 사는 나날이 이어졌다. 여러 종류를 사야 하는 날에는 미리 계획을 세워서 여러 주머니를 챙겼고 두부같이 물기가 있는 식재료를 구입할 땐 미리 밀폐용기를 챙기는 수완도 생겼다. 도저히 비닐 없이 구입할 수 없는 가공식품은 구입 빈도를 많이 줄이거나 식자재 마트에 가서 식당용 벌크로 구입했다. 요즘 그토록 유행한다는 밀키트는 체험해보기도 전에 그 오밀조밀할 과대 포장부터 눈에 선해 그저 먼 세상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정상 궤도에서 각도를 아주 조금만 튼 줄 알았는데 사 년을 걷고 보니 나는 제법 특이한 사람이 되어 낯선 길 위에 서 있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옆에는 언제나 작은 채소 좌판을 펼쳐 놓으신 할머니가 계신다. 그런데 늘 채소에 말쑥하게 비닐 포장을 해놓으신다. 그래서 매번 그냥 지나치곤 했었는데 그날은 제철 맞은 홍감자가 모처럼 포장 없이 소담스레 쌓여 있었다. 마침 가방 속에 ‘준비물’도 전부 있다.


  "감자 얼마예요?"

  "이거 한 바구니 2,500원."


  채소 파는 할머니들은 늘 당연하게 말을 놓으신다. 근데 그게 별로 싫지 않은 건 왜일까?


  "한 바구니 여기 주머니에 넣어서 주세요."


  말을 하는 동시에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서 천 주머니를 내미는 것이 포인트다. 이번에도 주머니에 흙이 묻을 거라는 염려를 당연히 듣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할머니가 감자를 담으실 때 둘러보니 당근하고 애호박도 보인다. 좋다, 오늘 저녁은 감자, 당근, 애호박을 넣은 볶음밥으로 해볼까?


"당근이랑 호박도 주머니에 담아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두 개의 주머니를 더 꺼내서 서둘러 내밀었다. 들고 다녀야 할 것도 참 많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애호박은 이미 비닐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래도 방법은 있지.


  "호박 비닐 포장 벗겨서 주머니에 담아 갈게요. 그 비닐은 다시 재사용해 주세요."


  그런데 이번만큼은 할머니가 단호히 고개를 저으신다. 애호박은 물러서 상처가 나면 좋지 않다고 그냥 비닐째로 들고 가란다. 하지만 나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집까지 오 분 거리밖에 안 되니 조심히 들고 갈게요, 하며 호호 웃는 얼굴로 계속 주머니를 내밀자 결국 할머니도 알겠다 하시며 비닐 속 애호박을 꺼내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현금을 꺼내 계산하고 잔돈을 받고 돌아서려는데 할머니가 나를 잠깐 불러 세웠다. 주섬주섬 못난이 당근 두어 개를 꺼내서 내 주머니에 푹 넣어주시며 하는 말씀.


  "예뻐서, 예뻐서 주는 거야."


  '예뻐서'라는 말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하셨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돌아서는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열 개쯤 떠올랐다. 내 얼굴이 예쁜 걸까, 아니면 비닐을 거절한 게 예쁜 걸까? 양쪽 다 가능성이 큰,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얼마 전 그에 대한 힌트가 될 것 같은 일이 있었다. 녹아버릴 것 같은 날씨가 이어지는 어느 여름날, 도저히 해가 떠 있는 동안엔 장을 보러 갈 수가 없었다. 행복하게 집순이 생활을 하다가 하늘이 어둑해질 때쯤 비로소 장바구니와 천 주머니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시간이 늦어서 시장은 아마 파장 분위기일 것이다. 이런 날엔 모처럼 아파트 상가 지하에 있는 마트에 간다. 널찍한 채소 코너의 대부분은 역시나 반짝이는 비닐 포장 속에 담겨 있지만 그래도 제철 채소 몇 가지는 꼭 무심하게 쌓여 있다. 그날은 가지와 오이가 그랬다. 가지 다섯 개 천원 실화? 가지튀김 각이다. 오늘은 가지로 가자, 하며 준비한 면 주머니에 가지 다섯 개를 담고 파프리카도 하나 포장 없이 손에 달랑 쥐고 계산대로 갔다. 이런 내가 특이한 손님인 걸 잘 알기에 시선을 애매하게 바닥으로 던지며 채소를 계산대에 올려놨는데 문득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것 아닌가.


  "예뻐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다시 한번 또렷하게 들렸다.


  "예뻐요. 다 고객님 같으면 좋겠는데 그렇게들 비닐을 많이 쓰네요."


  그제야 고개를 드니 마트 계산대 아주머니가 날 보며 작게 웃고 계셨다. 직원과 손님 사이에는 기계적인 과정이 있을 뿐, 보통은 인간 대 인간의 상호작용이 오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분이 내게 말을 건 것은 무척이나 생경했다. 게다가 그 '예쁘다'라는 말이 나를 향한 거라는 걸 깨닫곤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급 쑥스러워져진 나는 감사하다고 두어 번 주억거리다가 다시 쑥스러워져 바닥을 보며 걸어 나왔다. 하지만 다문 입술 사이로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온다.


  '착해요'도 아니고, '멋져요' 도 아니고 '예쁘다'라고 한다. 예뻐지고 싶은 욕망에 한때 성형 수술을 진지하게 알아보거나 쫄쫄 굶으며 다이어트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성형도 아니고 다이어트 아니고 비닐봉지를 거절했을 뿐인데 어찌 예뻐질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니 놀랍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실화. 예뻐지는 비결을 나 혼자만 알고 있을까 했지만, 생각을 고쳤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대한민국 건국 이념에 따라 이렇게 글로 써서 알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누로 단순하게 씻는 즐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