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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재 May 02. 2022

어금니 사이로 왈칵 터지던 채즙의 기억이 스러지기 전에

  넉넉한 양의 물을 끓이고 소금은 바다 맛이 날 정도로 꽤 듬뿍. 물이 끓으면 스파게티 면을 펼쳐 넣고 8분이 지나면 면 한가운데 가느다란 심지가 남은 알 덴테 상태, 10분 삶으면 한국인이 좋아하는 부드러운 식감…….     


  혹자는 스파게티 만드는 것이 라면을 끓이는 것만큼 쉽다던데, 내가 거기에 결코 동의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 절대적인 시간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이 끓고 난 뒤 3분 정도면 매끈 쫄깃하게 익는 라면에 비해, 최소 8분 이상이 걸리는 스파게티 삶기는 내 간장 종지만 한 인내심을 감안하면 참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6분이 지나서부터 아랫배부터 올라오는 간질간질한 지루함에 허리를 배배 꼬다가 7분이 지나면 괜히 면을 이리저리 휘저어보다가 8분이 되자마자 득달같이 한 가닥을 건져 후후 불며 한 입 씹어 보면 어김없이 그것이 있다. 바늘로 한가운데를 콕 찍어 놓은 것 같은 꼬독한 심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세련된 알 덴테 취향은 아니라서 귀를 축 늘어뜨리고 낙담한 채 얌전히 10분을 기다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파게티니를 알게 됐다. 스파게티니는 카펠리니(한국의 소면과 비슷)와 스파게티의 중간 굵기를 가진 파스타 종류다. 스파게티니를 삶는 시간은 당연하게도 스파게티보다 적게 필요하다. 스파게티니 상자 뒷면에서 ‘5 minutes’라는 영어를 발견한 순간 나는 환호했다. ‘유레카!’ 그 후로부터는 파스타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랄지, 정신적 허들이랄지 아무튼 그런 게 확 낮아져서 좀 배가 고프다 싶으면 ‘스파게티니나 삶아 볼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게 됐다.      


  상쾌한 5월의 오전이었다. 아침에는 하늘이 좀 흐리더니 어느덧 맑게 개어 제법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 위로도 보드라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스파게티니나 삶아야겠다.     


  냄비에 넉넉하게 물을 담고 소금을 넣고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를 열고 살폈다. 방울토마토 몇 개, 양송이 몇 개, 그리고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는 양파가 하나 덩그러니 있다. 저번에 시금치 무침을 하고 남겼던 시금치도 조금 남아 있는데 파스타에 넣어 볼까? 확실히 새로운 시도다. 어차피 망해도 내가 먹을 거. 혼자만의 주방에서는 나, 꽤 대담한 스타일이다.     


  물이 끓자 스파게티니를 동전만큼 신중하게 집어서 차르르 펼쳐 넣었다. 부엌용 타이머를 5분으로 맞추었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숫자가 하나씩 떨어진다. 마음이 괜히 들뜨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숫자를 의식하며 행동이 민첩, 신속해진다.     


  검고 묵직한 무쇠 주물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켰다. 동시에 올리브 오일을 넉넉히 두르고 편으로 썬 마늘을 넣는다. 시간이 지나고 기름 온도가 오르자 마늘의 가장자리부터 치르르, 하고 소리가 난다. 번개 뒤로 천둥이 따르듯, 치르르 소리의 뒤를 이어 근사한 향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피어오른다. 불 옆에 엉거주춤 선 채로 과도를 들어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가르고 양송이도 반으로 잘라 팬 속에 던져 넣었다. 양파는 한 귀퉁이만 잘라낸 후 세로로 결을 살려 얄팍하게 썰었다. 이제 완전히 달구어진 팬 속에서 마늘, 토마토, 양송이버섯, 양파를 휘리릭 볶는다. 허브 솔트를 뿌려서 재료에 간이 배게 했다. 타지 않도록 불 조절을 하면서 쓱쓱 볶자 어느새 양파는 숨이 죽어 윤기가 돌고 토마토는 흐물흐물해지며 껍질과 과육이 분리되었으며 양송이는 부피가 확 줄고 표면이 근사한 황갈색으로 그을렸다. 딱 그때쯤이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리     


  치고 들어와야 할 타이밍을 아는 솜씨 좋은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타이머가 울려 퍼졌다. 스파게티니가 다 익었다. 집게로 면을 집어 팬 속에 넣고 면수도 반 국자 정도 넣은 후 이제 다시 불을 중간 불로 올린다. 가스레인지의 푸른 불꽃이 커지면서 일렁이고 다시금 팬 속이 열렬해진다.      


  이때 비로소 시금치가 등장한다. 가장 맛있는 분홍 뿌리 부분을 댕강 잘라내 버린다면 그것은 하수. 손으로 섬세하게 만지며 흙을 다 털고 말갛게 씻어 낸 시금치는 깊고 두터운 초록색이었다. 그것을 한꺼번에 몽땅 프라이팬 속으로 투하했다. 집게로 뜨거운 면과 생생한 시금치를 뒤섞고 있자니, 이거 꽤 저항이 심하다. 그 펄펄한 초록빛 생명력과 힘겨루기를 한 지 일 분쯤 지났을까? 비로소 그들은 파르르 떨며 숨이 죽었다. 이때 가스 불을 끄고 팬에 남은 열기로만 몇 번 더 뒤적거리며 면과 시금치가 조화롭게 섞인 것을 확인한 뒤 마지막 터치는 역시 올리브 오일. 넓은 호 모양을 그리며 둘렀다.      


  포크와 스푼을 이용해서 요령 있게 스파게티니를 돌돌 말았다. 입 안에 쏙 넣어 우물거리자 행복한 기분이 되어 버린다. 면의 익은 정도와 간이 적절하게 딱 좋은 상태이며 무엇보다도 토마토 향이 은은하게 배어있다. 나, 좀 하는데? 우쭐해진다. 그 행복한 기분을 유지하며 포크로 양송이를 폭 찍었다. 개인적 취향인데, 양송이는 얄팍하게 써는 편보다 이렇게 대담하게 반으로 자른 편이 좋다. 그 도톰하고 말캉한 양송이를 입에 넣고 어금니로 콱, 하고 깨물자 그 속에 머금고 있던 채즙이 팡, 하고 터진다. 그래, 채즙이다. 비건이 되기 전에는 세상에 혀를 즐겁게 하는 즙이란 육즙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젠 안다. 잘 익힌 채소 속 채즙이 어떤 감칠맛을 품고 있으며 얼마만큼 유혹적으로 미뢰를 감싸도는지.     


  다시 포크와 스푼을 이용해서 스파게티니를 돌돌 만다. 이번에는 그사이에 시금치가 함께 걸리도록 신경 썼다. 입 안에 쏙 넣고 우물거리자 이번에는 시금치의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아삭함을 완전히 잃진 않은 시금치를 씹자 어금니 사이로 미지근한 채즙이 왈칵 터졌다. 연한 풀 내음 사이로 감칠맛과 고소함이 수준급이다. 특히 뿌리 부분은 단맛도 꽤 강하고 살짝 단단한 게 식감도 좋다. 입 안에서 시금치 한 뿌리를 꽤 오랫동안 씹으며 채즙을 한껏 즐겼다. 팽팽하던 시간이 잠시 느긋하게 늘어지고 1초와 1초 사이가 좀 길어지는 느낌이 드는, 그런 맛이었다.      


그 맛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금니 사이로 왈칵 터지던 그 채즙의 기억이 스러지기 전에 초조한 마음으로 서둘러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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