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담임선생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너희들 혹 ‘대망’이라는 책을 알고 있냐.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다. 그 책을 이번에 다 읽었는데 글쎄 무어라 꼭 집어내서 말하기는 그러한데 너희들 나이 사십이 되면 한 번쯤은 읽어 볼만한 소설이다. 그때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영영 소설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오래 전부터 우리 집에 있어 왔다. 표지가 하얀 장정본으로 거기에는 큼지막한 한자로 ‘大望’이라고 쓰여 진 한 질이 20권으로 된 책이었다. 우리가 잦은 이사로 옮겨 다닐 때마다 빠지지 않고 짐 꾸러미에 쌓여서 한 쪽 벽에 위치한 책장에 어김없이 진열되곤 했던 기억이 있다. 담임선생인 그가 대망이라는 책을 말했을 때 나는 비로소 우리가 집을 옮길 때마다 짐을 따라 다니던 그 책을 떠올렸다. 책을 읽는 데는 여전히 무감각이었던 나는 담임선생이 말한 것도 인연이리라 생각하고 20권이나 되는 그 책을 그 다음날부터 소중히 다루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이 책을 처음 읽은 사람은 아무래도 아버지였다. 표지가 하얀 그 책들을 아버지는 어디선가 구해 왔다. 한 번은 퇴근해서 돌아온 아버지가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가 읽던 책 어디에 치웠냐고 했다. 원래 위치에 꽂아 두었던 그 책을 가져다 드리자 아버지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잠자코 그 책만 읽으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독서는 이 삼 년을 두고 계속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기간 동안 아버지는 이 책들을 다 읽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아마도 20권이나 된 그 책을 다 읽는 데는 나이 사십이 넘은 아버지에게는 무리였는지 모른다. 나중에 내가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지만 처음 열 권 정도는 손때가 묻어 있거나 책장이 접혀있기도 했는데 열두세 권부터는 적어도 원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책을 읽은 사람은 내 바로 위의 형이었다. 군 입대를 앞둔 형은 몇 개월을 그 소설책만 읽었다. 어디까지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다가 곧바로 군에 입대를 했다. 그 책을 세 번째로 읽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것은 고등학교 담임선생이 그 책에 대해 이야기했던 때로부터 칠팔 년이 지난 어느 겨울이었다. 사십이 되면 한 번쯤은 읽어보라는 나이보다는 한참 이른 나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꼭 칠 년 뒤인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직장으로부터 순천에 발령 받아 내려간 그 해, 고등학교 담임선생으로부터 도꾸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이후 소중하게 다루었던 대망이라는 스무 권의 책을 짐 꾸러미로 꾸려 와 비로소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 책의 어느 대목에선가부터 나는 책에 흥미를 느꼈고 그러면서 차츰 가슴 뻐근한 느낌과 아릿한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가슴을 타고 흐르는 내 스물여섯 살의 격정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책이 내게 가져다준 위안이라는 언어의 수액이었다. 소설 여기저기에 베여있는 불교적인 감정들이 그 중 하나였고 다음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성격묘사가 그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삶, 그 방법론적 의미가 그것이었다. 그 해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 겨울날 읽었던 대망의 흔적을 통해 나는 몇 해 동안 치근덕거리던 의식의 연약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으며, 그 후로도 불쑥불쑥 그 모습을 내밀던 그것으로부터 유연해지기 시작하는 내 자신을 발견해 나갔다. 그것은 일상에서 떨어져 나가 앉아있던 의욕의 형체들이 적어도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발걸음이었다. 내가 내 자신을 찾아내는 첫 작업으로 기록된 셈이다.
지금 나는 고등학교 담임선생이 대망을 읽어볼 만한 나이라 말하던 사십이 이제 막 지났다. 그의 말처럼 이즈음에 읽지는 않았으나 좀 더 이를 때 읽었던 관계로, 어쨌든 결국은 그가 그 때 수업 중에 말했던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수업 외 이야기를 완벽하게 수행한 모범적인 한 학생이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고등학교 담임선생을 생각하게 된 것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그 때 그의 수업 중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 책을 읽었다는 인연에서 연유한다. 지금부터 2년 전인가, 반창회 모임을 갖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그가 보고 싶어졌다. 가까이에 있는 고등학교 반 친구들을 통해 연락이 시작됐다. 서울과 목포에서 분주하게 연락이 오고갔다. 학교를 졸업한지 이십 년이 다 된 친구들인지라 그 당시 담임선생과 더불어 모두 함께 만난다는 사실은 가벼운 흥분을 몰고 왔다. 그는 광주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그곳 어느 고등학교에서 전공인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에게 우리의 연락이 갔고, 우리는 모임의 장소와 시간을 계획했다. 장소는 목포, 봄날의 어느 주말 오후로 결정됐다. 목포의 한(韓)이 그와 동행하여 약속장소로 온다는 말만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모임이 계획된 그 날까지 그의 신변에 일어난 사실을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담임선생은 목포로 곧장 오는 게 아니란다. 한이 광주로 올라가서 담임선생을 만나 같이 내려올 게다. 우리 중 누군가 어디서 만나 내려올 건지를 물어보기 위해 그의 집에 전화를 연결했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의 딸아이였다.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며칠 지났어요. 제자들 모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헌데 알고 있는 연락처로 소식을 보냈는데 잘 닿지 않았어요. 아빠는 완도 고향에 가 묻히셨어요. 아직도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아요. 서울과 목포로 다시금 분주하게 연락이 오갔다. 우리들은 예정대로 모이기로 했다. 그가 빈 자리였지만 조문을 가지 못한 우리 모두에게 그 모임은 그를 기리는 자리가 된 것이다.
담임선생에 대한 부고는 나를 몹시 낙담케 했다. 소식을 들은 그날 밤 나는 직장관계상 광주에 와 있었다. 직원들과 술을 마시던 어떤 술좌석에서 갑자기 그에 대한 이미지가 정밀하게 나를 붙잡았다. 술을 마시는데 취하지가 않았다. 나는 메모지를 꺼내 그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ー 추 억1 -
목포고등학교 저 먼 교정 길에서
항상 내 영혼 위에 낯익은 사내
그가 우리들 곁을 떠났다
무심하게
안고 있었을 인생의 무게만큼 무표정하게 가라앉아 있는
저 침묵
끝
사내는 우리들에게 조각으로 떨어져 내리는 한 줄기 햇살로 남겨졌다
손톱으로 건드리면
부서져 흘러내릴 것만 같은 아픔을, 그는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가져가지 못했다
그 무엇이 아픔을
거부하는 고통을 소진시킬 수 있을까
공허 옆에 서 있는 영혼, 혹은
만질 수 없는 저 끝없는 아픔 하나
나는 산수유가 거침없이 무너져 내리는 길에 섰다
영혼이라 불리는 말간 눈물이
가슴의 계곡을 타고 흘러내렸다
웅얼웅얼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프랭크ㆍ슈나트라의 마이 웨이던가
사내가 불렀던 이십 년 전의 노래인지 모르겠다
굵고 우직한, 그래서 부드러웠던
톤.
그때 서쪽을 향해 열려졌던 교실 뒤쪽
유리 창문들
태양이
저녁놀이었던가
3학년 11반 교실
나는, 우리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문득 잃어버린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다
눈물이 번지는 눈동자들
<아...이제 커튼을 내려야 할 시간이 되었네. 그 모든 것들은 나의 길이었다네>
목포고등학교 저 먼
히말라야 삼나무 교정
나는 다시금 조금 슬퍼졌다.
기억하는데 그는 프랭크ㆍ슈나트라의 노래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중 한 곡을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노래 제목이 <마이 웨이>였다. 그가 부른 노래는 완벽했고 우리는 감동했으며 나는 오래도록 그가 부른 노래를 기억했다. 목포에서의 주말 오후는 밤이 내리면서 바닷가 갯내음이 짙게 베여왔다. 유달산의 등산로를 밝히는 가로등이 일렬로 사열을 받는 산등성이 너머로부터 뱃고동소리는 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곳 어딘가에서 우리는 닻을 내리고 쉬고 싶었다. 그것은 술 때문만은 아니리라. 한 인간의 부재가 가져다준 모임은 그렇게 목포의 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3학년 11반, 반가(班歌)인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불렀다. '홍도야 울지 마라'가 어떻게 우리의 반가가 된 것인지는, 우리는 기억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그가 불렀던 마이 웨이를 불렀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가 그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이 이르자 우리 중 몇몇은 톤이 높아지고, 군데군데 고개를 숙이거나 노래가 반향 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눈물을 흘리고 들 있는 게지. 노래는 끝나고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와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문득 삶이란 하루하루의 배경에 내 던져진 생경한 풍경인지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그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모두가 생경한 풍경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잠간동안 모든 생각을 접어 보았다. 생경한 풍경이 다시금 가슴을 밀고 들어왔다. 그러자 거기에는 어쩌면 오늘 하루 내가 존재하는 통로가 보여 질지도 모른다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생경한 풍경을 가슴으로부터 확인하자 나는 거기에 익숙해지려는 흔적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좀처럼 나는 그 무엇도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익숙해지기 위해서, 그렇게 내가 의지하기 위해서 나는 언어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유일한 것이 될 수 있을 듯 했다. 물론 사소하여 지나치기 쉽겠지만 한 번쯤은 그래도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리라는 것을 더는 의심하고 싶지가 않았다. 언어라는 도구로 형식에 묶이지 않는 하루의 풍경, 그 한 면을 선연하게 만들 수 있다면, 아마도 이때만은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이롭게도 몇 줄의 문장으로 조합을 이룬 언어는 이-메일을 통하여 가까운 친구에게 전송되었다. 전송된 후 그것은 한 장의 출력물로 나왔다. 내 가슴이 복사되어 있는 한 장의 종이였다. 내 가슴으로부터 나온 공명(共鳴)은 가까운 친구에게 가서 그렇게 언어로 쌓였다.
- 이상하게 천장에 자리해야할 형광등이 출입문 쪽 벽에서 세로로 걸린 체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실내는 어두웠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늦추위가 있어서인지 아늑하고 따듯했다. 연립주택 앞에는 다른 한 동의 연립주택이 가로막고 있던 터라 마당이라야 사람 몇이 웅성거릴 수 있는 그 공간이 더 좁게 보였다. 이곳을 지나 페인트가 벗겨져 갈색 녹이 다 드러난 볼품없는 철문, 그 출입문을 아침 여덟시에서 저녁 열한시, 꼭 두 번을 매일 지나 다녔던 것이다. 밤늦게까지 보충수업이 없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싶다. 직장으로서 학교는 그에게 앞이 막혀 좁혀진 마당을 지날 때마다 소리 없이 지는 가을날의 오동잎처럼 선명하게 보여 졌다. 모든 일이라는 게 기막히게 재미있으면 보이지 않는 법인데 자신의 일이 타인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보일 때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는 일상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제는 늦은 밤까지 보충수업이 없는 학교에서 근무해야겠어. 실내에 우리 중 누군가가 피운 향불이 엷게 번졌다. 작은 액자에 담겨져 있는 그는 타인에게 주는 미소를 담고 있어서 호감을 느끼게 하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 자리해야할 형광등이 출입문 쪽 벽에 걸려있는 안방에서 모양이 같은 낮은 책장이 세 개, 한쪽 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문학전집이 맨 위 칸에서 누르고 있어 왠지 불안정하게 보였다. 그의 전공을 잘 말해주는 영어의 토플 책들과 바둑에 관련된 낡은 정석 책 몇 권, 그리고 바둑잡지가 두서너 권 주인을 대신해 안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서른다섯 살이었고, 그 때 우리는 생의 진면목을 모르는 갓 열여덟, 아홉이었다. 교실 뒤편 유리창문이 모두 열려 있었다. 오후 다섯 시 무렵의 영어시간은 우리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교정에는 이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어느 공간에 가서 들쥐처럼 숨어 버렸는지 히말라야 삼나무만 짙푸른 어깨를 흐느적거리는 것이었다. 프랭크ㆍ슈나트라, 누구 아는 사람. 그는 팝 가수다. 내가 그의 노래를 불러 보겠다. 영어공부에 맛을 잃고 있던 나는 그를 바라다보았다. 굵고 우직한 톤이 흡사 프랭크ㆍ슈나트라 그것처럼 멋지게 교실 천장을 반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톤은 부드럽고 단단하여 주위가 산만해져 있을 우리들의 가슴을 응집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열려져 있는 교실 뒤편 유리창문에는 저 붉은 태양이, 아, 저녁놀이었던가. 사랑을 이야기 할 때면 낄낄거리며 유치하게 웃을 줄만 알았던 우리들은 그 날 처음으로 가슴이 터질 듯한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우리들 시절의 저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몇 권의 낡은 바둑 책이 질서 있게 꽂혀 있는 안방에서 우리들은 나왔다. 삼 월 중순인데도 무등산허리부터 허옇게 눈이 쌓여 있었다. 한순간 차가움이 몰려들었다. 추위와 함께 어둠이 땅 아래로 내려서고 우리들이 몰고 온 자가용차들이 번들거리는 라이트를 좌우로 둘러댔다. 나는 비로소 설국(雪國)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