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길, 아릿한 민족이라는 이름의 길
여전히 갈 수 없는 길, 아, 민족 – 벌교의 제석산, 소설 <태백산맥>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있었다.’ 소설 <태백산맥>은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벌교를 주요 무대로 한 이 소설을 나는 1989년 무렵 겨울에 읽었다. 소설이 완간된 지 2년 후쯤이었다. 그때 나는, 기억에 의하면 어떤 연유에서인지 스스로가 지금은 청춘의 끝 무렵이라 돼 내이며 순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벌교와 순천은 지척간이다. 그 무렵 겨울날 벌교의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거짓말처럼 벌교역이 보였고, 소화다리와 벌교상고의 뒷산, 제석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태백산맥을 읽은 뒤로 벌교읍내는 소설과 하나가 되어 현실에 존재하는 듯하는 착각이 들고는 했다. 일례로 염상진의 최후가 너무도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던지, 벌교역전 조그만 광장에 이르면 그곳에 토벌대인 경찰과 군이 빨치산의 최후,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이라 적고 나무판이 받침목으로 세워진 시전대 꼭대기에 머리카락을 위로 모아 묶은 그의 잘린 목이 슬프게 생각났다. 토벌대의 앞잡이며 우익청년단장으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사상적 노선이 다른 형을 증오했지만 형의 머리를 수습하던 동생 염상구와 함께. 염상진은 인민해방, 즉 계급혁명을 위해 온몸으로 살다 간 뛰어난 전사였다.
다시 소설의 첫머리로 돌아가면 어둠을 타고 제석산자락을 내려오는 술도가네의 아들 정하섭이 보이고, 그가 만나는 무당 소화가 있고, 역사로부터 끊임없는 선택과 실천을 강요당하는 민족주의자 김범우가 보인다. 하대치의 결연한 항전과, 들몰댁, 외서댁의 한 많은 여자의 일생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벌교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소설 <태백산맥>을 이루고 있는 많은 등장인물에 속한다.
참, 이 자리를 들어 생각나는 게 있다.
조정래 님의 태백산맥에서 나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내용이 어디엔가 있는데 내가 읽질 못했는지 아니면 작가의 자료수집과정에서 완전히 빠져있는지 혹은 소설의 흐름상 그 내용이 불필요하여 아예 처음부터 자료로써 배제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허지만 나는 여순사건이 있었던 1948년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의 흐름상으로 볼 때 이 자료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언급되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벌교읍내의 뒷산이 부용산(芙蓉山)이다.
1948년 무렵부터 목포지역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노래 '부용산'은 바로 이 산이다. 노랫말을 만든 시인 박기동 님은 당시 목포의 한 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나, 이 노래가 좌경계열로 분류되면서 한 곳에 자리 잡지 못하고 굴곡의 삶을 살게 된다. 즉 좌익으로 낙인찍혀 우리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철저한 반공과 반민주화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남쪽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것이다. 그는 실의에 빠지고 마침내 부용산의 노랫말이 유행했던 때로부터 30년이 더 지난 1980년대 초, 우리 남쪽 사회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어쩌면 최인훈의 소설이 낳은 주인공 이명준의 삶과 흡사하다. 그가 선택한 곳은 제3국 호주였다. 그는 그 머나먼 타국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갔다. 박기동 님의 회고에 의하면(시인은 90년대 후반인가, 자신의 시비 <부용산>의 제막식 때 호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벌교를 찾음) 시집간 누이동생이 죽자, 누이동생을 부용산에 묻고서 슬픔과 안타까움을 안고 이 시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연유로 노래로 불러지게 되고 곧바로 좌익이라는 수사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랬다. 작곡을 했던 작곡가 안성현 님(그 당시 목포에서 박기동 님처럼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음)이 월북하고 나중에 이 노래를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독재, 군부정권, 반민주화라고 지칭되던 어두운 시절에 민주화세력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공개적으로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된 것이다. 그 부용산의 노래가 이렇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렇게 불려지는 노래 <부용산>의 실제 시는 다음과 같다.
< 詩 - 부용산 > - 박기동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흘러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노래에 관련한 내용을 소설 태백산맥에서 읽은 기억이 없지만, 나는 벌교읍을 지날 때면 이 노랫말을 생각하고는 했다. 토벌군에 쫓겨 산으로, 산으로 몸을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전남도당내 조계산지구의 빨치산들은 순천을 지나 광양의 백운산등성이를 넘고 넘어 지리산으로, 지리산으로 계곡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들은 고향을 생각하고 거기에 있을 가족들을 그리면서 많은 노래들을 불렀으리라. 부용산, 이 노래도 그들이 즐겨 부른 노래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후에는 많은 지구당의 빨치산들도 그리 불렀으리라.
남쪽 인민들의 해방을 위한 임무를 받고 북쪽에서 조선인민해방군, 인민군 고급군관으로 내려온 김범준은 빨치산들의 영웅이었다. 냉철한 전사인 그는 항일 빨치산의 투쟁을 통해 동생 김범우와 염상진의 어린 날 속에 인생의 지표로 자리 잡는다. 그는 독립군 전사였으며, 해방 후에 다시 전장으로 뛰어든 조선인민해방군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회한에 잠기는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때는 6.25 전쟁으로부터 시작된 남과 북의 전선이 서로 밀고 밀리며 위도 삼십팔 선을 중심으로 고착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그때 북쪽과 남쪽, 그 모든 상황으로부터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북으로부터는 남로당이 숙청되면서 당과 김일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그러한 그와 전남도당 소속인 그의 부대는 남쪽으로부터 토벌대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으며 앞날을 예측하기조차 힘겨운 상황이었다. 어쩌면 쫓기고 쫓겨 마지막 전장지로 지리산을 선택해야 될지도 모르는 시간이 더욱 앞당겨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무렵 전해 듣게 된 아버지 김사용의 장례식. 아버지의 상여가 떠나는 날, 염상진과 소대병력의 호위아래 벌교의 낙안벌이 바라다 보이는 제석산 끝자락에 잠입, 노출되지 않는 산마루에 오른 그의 눈은 아버지의 상여를 쫒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사로서, 다시 조국해방을 위한 혁명전사로서의 삶을 투철하게 살아오면서, 그때마다 항상 존재함만으로도 든든했던 아버지.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은 작가에 의해 시인 정지용 님의 향수(鄕愁)가 되어 묘사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높이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어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소설 <태백산맥>은 시간적으로 여순사건이 일어나는 1948년 가을부터 6.25 전쟁이 휴전의 체결과 함께 종료되면서 남과 북의 분단이 고착화되는 1953년 늦은 가을까지의 격동기를 그리고 있다. 일제하의 식민통치가 우리 민족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아울러 좌익과 우익이라는 사상적 대립과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 주고, 이 시기에 중국과 소련이, 그리고 미국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보여 주었으며, 아울러 우리 현대사에서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동족끼리의 상잔을 남긴 비극의 격동기를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동안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었던 진실들을 들추어내는 내용이 담긴 이유로 인해서 첫 출판 후 바로 출판 금지가 단행된 소설 <태백산맥>이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들은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살아간 인물들답게 다채롭고 인상적이다. 대략 육, 칠십여 명의 등장인물 속에서 소설 전체를 관통해 내는 인물로 빠뜨릴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
첫째, 김범우다. 3부작으로 이루어진 태백산맥 중 제1부에서 김범우를 처음 만났을 때, 1부를 읽고 있는 동안 내내 김범우의 모습에서, 나는 잠깐 동안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이 오버랩되었다. 그의 소설 <회색인>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거대한 격랑을 이루며 흘러가는 역사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하여 제3의 길을 선택한 그들의 운명이 서글프게 다가오는 듯했다. 소설의 2부와 3부에서는 차츰 김범우의 정체성이 명확해져 가면서 제3의 길을 선택한다는 여지 따위는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김범우는 어릴 때부터 항일 빨치산 투쟁의 전사인 형, 김범준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자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분열된 민족주의 노선은 독립군 전사 김범준을 조선인민해방군, 혁명전사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하게 한다. 민족주의 노선의 분열과 갈등 속에서 많은 젊은이와 지식인들이 그들의 사상적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는데 김범우가 그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김범우는 백범 김구의 정치적 노선을 추종하면서 중도적 민족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남과 북, 좌익과 우익, 이렇듯 이분화된 사상이 격동하는 시대에서는 중도적이라는 자체가 우유부단과 나약함을 상징하지 않던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신문기자이자 6.25 전쟁과 더불어 인민해방전선에 선 선배 이학송은 김범우를 이렇게 생각한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역사의식과 시대양심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김범우는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버마전선에 투입되었다 탈출하여 미군 OSS특수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기도 한다. 함께 탈출해서 특수훈련까지 같이했던 박두병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만나고 손승호와 더불어 전북도당에 함께 하기로 한다. 하나 미국의 전쟁개입과 함께 이승만은 자주적 작전권마저 미군에게 넘겨버리게 되고, 미군에게 붙잡힌 김범우는 그들의 전시작전권에 의거 민간인 미군통역관으로 미군의 통제 하에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 탈출 후에는 인민해방군에 투항하여 통역관으로 활동한다. 의용군 생활도중 부상을 당하고 거제도 수용소로 수감된 김범우는 그곳에서 포로로 붙잡혀온 정하섭을 만난다.
민족의 독립과 무산계급의 계급적 혁명이라는 이상을 위해 자신의 평탄한 삶을 거부하고 조선인민해방군의 상징적 인물이 된 김범준, 그가 독립군이 되어 만주로 갔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소년시절부터 그를 흠모하면서 마침내 계급투쟁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남쪽의 빨치산투쟁을 전개하는 염상진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지적이면서 행동적이고 치밀하면서도 과감한 염상진은 거의 완벽한 공산주의자다. 인민해방혁명의 이상을 완결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는 그는 소설이 끝난 내내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겨울날, 벌교읍 버스터미널(내가 버스를 타고 다니던 때는 터미널이 읍내 중앙, 즉 번화가에 있었다. 한 발치만 걸어가면 벌교역이었다)에서 내려 조그만 벌교역 광장에 서면 금방이라도 인민해방이라는 이상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다가 꽃처럼 사라져 간 그의 완강하고 강렬한 눈매가 겨울햇살에 부시게 부서지는 듯했으니까.
남쪽 빨치산의 혁명전사인 염상진을 형으로 둔 염상구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철저하게 반공주의자가 된다. 이 형제가 각자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아픔 그 자체이다. 각자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운명을 작가 조정래 님은 이렇듯 염상진과 염상구라는 형제를 자식으로 둔 어머니 호산댁과 이 형제의 삶을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상적 노선을 달리했기에 증오했던 형 염상진의 최후를 벌교역 앞마당에서 지켜보면서 형의 머리를 수습하는 염상구의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순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벌교의 두 선, 후임 경찰서장, 선임 경찰서장으로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면서 끊임없이 권력에 아부하고 자신이 획득한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남인태, 이와는 달리 반공의식을 잃지 않으면서 정직한 권병제 경찰서장, 벌교읍과 읍민의 치안을 위해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만 6.25 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벌교읍민중에 좌익으로 분류된 보도연맹원 약 80여 명을 학살하는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국민의 군대임을 잊지 않는 키가 훤칠한 계엄사령관 심제모, 공동농장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선구적인 서민영,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전명환 벌교 자애병원 원장, 그는 의사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 벌교주민들에게는 그 신망이 두텁기 이를 데 없다. 민중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을지주 김사용과 그 김씨 집안. 김사용은 김범준, 범우 형제의 부친이다. 심제모의 후임으로 벌교에 배치받은 또 한 사람의 계엄사령관 백남식,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한 일제 관동군인 출신의 그에게서 전형적인 친일파 일본군의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소작인 착취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최씨 집안, 국회의원으로서 그 시대의 정치를 대표할만한 혼탁한 최익승, 돈을 이용해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곳과 권력을 이용해 부를 치부하는 곳에는, 그곳이 전쟁으로 인한 피난처일지라도 어김없이 거기에는 최익승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 중에도 피난처 부산에서 치부를 한 그의 모습에서 전쟁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와 부패와 부정을 끝도 없이 가져다주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느끼게 해 준다. 염상진에게 처형당한 벌교지주들의 자식들, 윤태주, 최인석, 송성일, 양효석, 현오봉, 최서학은 좌익에 의해 자신들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중 육군사관학교를 선택한 양효석과 현오봉은 6.25 전쟁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다 현오봉은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 그의 삶을 마감한다. 양효석은 대한민국 군인이 거창 신원면민을 학살하는 현장에서 중대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벌교 우익 지주들인 최익달, 윤삼걸, 검사직에 회의를 품으며 변호사로 전직,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최익승을 누르고 당선되어 정치에 뛰어든 신선한 안창배와 지형적으로 해방구를 느끼게 하는 율어면, 율어면의 지서장인 이근술, 그는 주민, 민중들과 한 마음이 된다.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빨치산의 전사 정하섭과 무당 소화의 애틋한 사랑. 그들이 모르는 천륜. 정참봉의 손자 정하섭과 정참봉과 무당 월녀 사이에 태어난 소화, 어찌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이야기 안에서 북측과 남측 간의 전쟁과 벌교의 제석산 노을은 붉디붉어만 간다.
빨치산부대의 또 한 사람의 전사 하대치, 갓 열일곱 살에 빨치산이 되어 입산, 인민해방전사의 길을 걸으며 누구보다도 대장 염상진을 이상적 인물로 존경하는 앳된 전사 천점바구, 실제는 나이가 더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당찬 모습에 반한 빨치산 대원들이 열여덟 살이라고 속여서 당원으로 추천해 당원이 된 명석한 조원제, 조원제가 그 활달함에 반해 존경하는 이태식, 오빠의 항일투쟁을 보고 빨치산이 될 것을 다짐한 순박한 여자 강경애, 빨치산으로 하대치와 쌍벽을 이루는 외서댁의 남편 강동식, 그리고 지주의 횡포를 더 이상 묵인할 수 없기에 지주를 살해하고 그 길로 염상진부대를 찾아가 빨치산이 된 그의 동생 강동기, 벌교 꼬막과 들몰댁과 외서댁과 염상진의 아내 죽산댁, 그 죽산댁에게는 산속생활에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하며 아버지 염상진을 언제나 걱정하는 속 깊은 딸아이 덕순이와 아버지를 닮아 웬만한 일에는 주눅 들지 않는 개구쟁이 아들 광조가 있다. 빨치산 가족이라는 이유로 수없는 수난을 겪어야만 하는 죽산댁인 어머니와 더불어 아이들이 그 시대를 살아내는 모습은 저 깊은 곳에서 아프고 슬픈 마음으로 아려온다. 차갑고 추운 겨울날, 대열에서 이탈한 어린 기러기 두 마리가 텅 빈 중도들판을 끼룩거리며 날아가는 냥 서글프게 다가오기도 한다. 옹골찬 빨치산 전사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과 어린 두 아들의 일상도 죽산댁네와 다름없다. 형 길남이는 언제나 배고파하는 동생 종남이가 불쌍하고 가엾게만 보인다. 자기는 형이기 때문에 아버지 하대치에 대한 그리움을 삮이며 빨치산의 자식이라는 온갖 멸시와 조롱과 비아냥을 견디어내지만, 어린 동생은 친구들의 그런 구박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나이이기에 그런 동생을 생각할수록 가슴에 구멍이 나는 것이다. 들몰댁은 좌익이, 빨치산이, 친일파와 지주들을 처단하고 인민해방을 꿈꾸는 그들의 투쟁에, 그 집단에, 몸을 엮은 남편이, 그저 남정네가 무슨 깊은 뜻이 있어 그 길을 갔으리라 생각하며 남편으로 인해 덧씌워진 좌익이라는 굴레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아이들을 키워나간다. 이지숙(소설의 무대 벌교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쪽에서 삼팔선을 넘어오는 북의 침략을 방송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릴 라디오로 처음 접한다. 한때 선생이었으며 안창민의 부상을 보살피다 전원장과 함께 체포되기도 하나 마침내 염상진부대를 따라 입산한다. 소화, 들몰댁, 외서댁 등도 이때 함께 입산한다), 이지숙의 연인 빨치산 안창민, 강압적인 보도연맹 가입을 피해 서울로 피신했다 6.25를 만나 인민해방전선의 서울시당으로 사상적 확고함을 보여주는 김범우의 친구인 손승호. 이승만 정권과 북의 정권, 이들이 보여주는 정치에 대해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문기자 민기홍. 인민해방전선의 여기자 김미선, 그녀는 이학송과 함께 미군에 쫓기며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통화까지 후퇴한다.
자애병원이 있고, 남도여관이 있고, 갯벌을 따라 중도방죽이 있다. 빨치산과 토벌군이 치열하게 싸운 진트재의 전투가 여전히 귓전에서 쿵쾅거린다(진트재는 순천에서 벌교를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고 작가 조정래 님은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천에서 벌교로 들어서는 초입의 높은 산이 제석산이고 그 옆의 고갯길을 말하는 것 같다). 6.25 전쟁은 미군의 개입으로 그 전선이 압록강으로 이동되면서 미군이 바라는 대로 신속하게 마무리될 듯했지만, 중공군의 전쟁개입과 남하로 다시 남쪽으로 이동되기 시작한다. 더욱 미총사령관이자 유엔사령관 멕아더와 미대통령 트루먼의 권력다툼 하에서 차츰 위도 38선을 중심으로 고착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입산했던 소화와 들몰댁이 잡히고(이때 소화는 연인 정하섭의 아이를 두 번째 임신 중이었고 수감 후 아이를 낳는다. 정하섭의 첫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염상구의 모진 고문으로 임신한 아이를 잃게 된다), 양효석이 보성지역 계엄사령관으로 보직을 받아 벌교에 내려오고, 손승호는 빨치산이 되어 전쟁의 승리를 위한 그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빨치산 전북도당 손승호와 구빨치산 솥뚜껑, 이들 인민해방 유격대원 간의 질끈한 정은 그 다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학송은 서울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내와 아이들이 행방불명임을 확인하고 재차 북으로 후퇴하는 전선을 따라나서고, 김미선은 한때 만주 통하까지 밀렸던 피난에서 돌아온 서울에서 두 아이들과 만나면서 서울에 남을 것을 결심한다. 염상구와의 몸싸움에서 총상으로 사망한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은 입산 후에 후방에서 활동하는 보급투쟁이 아닌 전투에 나서는 기동대 여전사의 길을 간다. 하대치의 중대에 배속된 그녀는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머리에는 옷고름 너비의 새빨간 천이 동여매져 있었다.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장면을 기록한다. 6.25 전쟁은 마침내 벌교에서 김범준과 염상진을 만나게 한다. 소년시절 자신이 흠모해 온 김범준이 인민해방을 위해 인민군관, 지구사령관으로, 염상진은 군당위원장으로 마침내 만난 것이다. 민가에 숨어 지낸 율어면 지서장인 이인술을 체포하여 그를 심문하러 가는 길에서 김범준은 만주벌판의 독립군에서 공산당으로 그리고 지금의 인민해방 지구사령관이 되어 남으로 오기까지의 그의 삶의 근저를 이룩한 자신의 사상을 염상진에게 이야기한다. 이 말을 들은 염상진은 안창민과 더불어 그의 위험천만한 비판에 대해 저으기 놀란다. 아마도 소설 내내 김범준을 신비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작가 조정래 님은 김범준의 이 말을 통해 대신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정래 님은 소설에 이렇게 적고 있다.
- "계급혁명을 전제로 한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민족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또 얼마만 한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아주 심각하고 그리고...중대한 문제가 아닌가 싶소. 그러니까, 중국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인데...거기에 민족문제는 얼마나,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오.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되 민족 자주적 혁명, 민족주체적 혁명을 분명히 했던 것이오. 그러니까 중국인의 힘으로 중국민족을 위한 공산주의 계급혁명을 추진한다는 노선이오. 그 노선에 따라 모든 전략.전술은 수립되고 추진되었소. 코민테른의 지시 거부도, 그리고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것은 중국과 중국민족을 쏘련에 넘겨주거나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을 모택동 주석이 공개적으로 했던 것도, 다 그 노선에 근거한 것이었소. 계급은 사회의 수평적 인식이고 민족은 수직적 인식인데, 그건 베짜기의 날줄과 씨줄 같은 것이오. 그런데 조선공산당은...어찌 되었소. 민족반역세력에게 '민족'을 도용당하다니...그자들이 어찌 감히 '민족진영'이란 말을 쓸 수 있느냔 말이오. 그건...그자들이 뻔뻔스럽고 교활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는 먼저 조선공산당이 민족을 등한히 한 데 문제가 있을 것이오. 공산당 쪽에서 계급과 함께 민족을 내세웠다면 그자들이 어찌 민족을 도용할 수 있었겠소. 고유한 문화전통과 생활풍습을 가진 사회집단일수록...계급보다는 민족에 더 호응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요. 그 연장선상에서 찬탁이 나왔고, 찬탁 때문에 '조국을 쏘련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결정적 모함을 당했고, 그러고도 그 모함을 깨끗이 척결할 만한 시원한 대안을 인민 앞에 제시하지 못했소.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공산주의 이념 아래 세계인민의 해방을 주창해 온 쏘련이 조선문제를 놓고 제국주의자 미국과 한 탁상에 앉아 신탁통치안을 만들었다는 사실이오. 그건 쏘련이 저지른...분명한 오류며 모순이고, 조선공산당은 조선민족의 이름으로써 그 모순을 지적하고...그 오류를 시정하게 했어야 하는 거요. 그런데...찬탁을 했소.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차이가 여기에 있소. 인간이 지역적으로 집단을 이루며 종족이 다르게, 말도 다르게 살아온 역사가 수만 년을 헤아리는 이상 계급혁명의 통일로만 살아질 수 없다는 그 근원적인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오. 그 파악 위에서 중국공산당은 붉은 깃발을 내리고 국민당과 연합해서 일본도 물리치고 혁명도 성취시켰는데..." 김범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염상진은 충격에 부딪쳤다. 충격을 받기는 안창민도 마찬가지였다.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을 위시한 남쪽 여섯 개 도당 위원장과 지리산 지구 사령관 이현상과의 덕유산 비밀회의에서 결정된 군사조직이 당의 상위에 올라가는 조직개편은 이현상이 차지하고 있는 인민해방군의 군사력이 장악하는 모양새였다. 이에 전남도당은 자체 회의를 열어 아직은 당이 군사조직 상위임을 내세워 이현상과 거리를 두고 자체적인 투쟁방식을 선택한다. 전북도당은 이현상과의 타협을 선택하는 투쟁노선을 선택, 지리산 지구에 빨치산 병력일부를 투입시킨다. 이현상이 결정 내린 남반부유격대로 조직개편은 남쪽에서의 인민해방투쟁이 그만큼 험난한 기로에 놓여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가공할만한 화력으로 몰아붙이는 남측의 토벌대에 밀려 전남도당의 해방구는 하나둘씩 토벌대가 장악해 간다. 화순과 광주와 승주의 가운데 위치한 백아산지구, 그 백아산이 토벌대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남도당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전남도당은 산악이동투쟁 이외의 다른 해방투쟁방법이 없는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된다.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이 있는 지리산으로 전북, 전남, 경남의 도당들이 하나둘씩 집결하기 시작한다.
벌교 벌의 제석산에서 율어 해방구, 그곳에서 다시 천자암 쌍향수가 있는 곳을 지나 선암사를 넘어가는 조계산을 통해 구례 쪽으로, 그리고 지리산 계곡 속으로, 염상진이 이끄는 빨치산부대는 투쟁을 전개한다. 또 하나의 부대는 벌교 벌에서 순천을 지나 광양 백운산 골짜기를 타고, 백운산을 빗겨 흐르는 섬진강을 건너 하동을 거쳐 피아골로 투쟁을 전개한다.
지리산내 빨치산을 향한 남쪽 토벌군의 대공세가 마침내 시작된다. 남쪽의 백선엽이 이끄는 토벌대의 대공세, 이름하여 동계대공세. 영하의 날씨 속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지리산 골속골속과 빨치산의 거점지는 토벌군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초토화되어 간다. 토벌군에 쫓기며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며 투쟁을 전개하는 빨치산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만 간다. 토벌군의 각종화력에 죽어가고 동사로 쓰러지고 기아로 죽어가기만 한다. 토벌군의 가공할만한 화력 앞에 계급혁명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청춘과 인생, 온몸을 불사르던 빨치산들은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동계대공세가 끝나자 빨치산의 사망자의 수는 약 1만 8000여 명에 이르게 된다. 동계대공세 기간 동안 이 숫자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여순사건 이후 입산하여 빨치산투쟁을 시작한 시기부터 동계대공세기까지는 약 6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된 것이다. 부모가 없이 입산하여 염상진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투쟁을 하던 강대진 소년, 전북도당의 손승호와 함께 꼭 해방의 날이 빨리 와서 영원히 손을 잡고 살 수 있기를 바라던 박란희, 우상 염상진을 가슴에 담고 투쟁하는 천점바구와 천점바구를 흠모하는 김혜자도 사망자 속에 포함되었다. 토벌대의 동계대공세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 빨치산은 조직위원 이현상, 박영발, 김선우 등으로 이루어진 회의에서 제5지구당을 결성하고 당의 기본정책 변화에 따른 당사업 주력화에 의거한 세포망 강화로 일부 빨치산들은 위장 귀순을 결행한다. 여기에 안창민과 이지숙이 결혼을 하고 위장 귀순을 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결혼식은 진달래꽃이 한창인 봄날, 빨치산의 축하 속에서 이루어졌다.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가조인되고, 산속의 열 명 당원보다는 인민 속의 한 명의 당원이 낫다는 당의 결정을 알고 빨치산은 충격에 휩싸인다. 그것은 빨치산 투쟁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빨치산에 번지는 허탈과 절망감 속에서 염상진은 대원들을 독려한다. 인민해방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눈앞에서 성취하려는 현실투쟁에서 목숨을 바쳐 뒷날 역사 속에서 성취시키는 역사투쟁을 물러서지 말고 이룰 것을. 안창민과 이지숙이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고, 조원제도 화순에서 체포된다. 유치장에서 만난 아버지, 자신에게 사회주의 영향을 준 아버지는 역사투쟁이 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조력자이자 버팀목으로 조원제에게 든든한 뒷산이 되어준다. 보성군당 오판돌이 토벌대의 포위망에 갇혀 스스로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염상진은 하대치에게 어차피 투쟁은 동지들을 헤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며 스산하게 말한다. 정의로운 역사를 위하여 새로 시작하는 싸움을 나서는 손승호는 박두병으로부터 귀순증을 건네받고 벌교로 향한다. 벌교에서 인민 속의 한 명의 당원으로 역사투쟁을 계속하기 위하여. 손승호의 꿈은 산에서 내려온 순간 자신을 겨냥한 토벌대가 쏜 총알과 함께 스러진다. 벌교에 잠입하여 초소를 공격하던 강동기도, 지서를 습격하던 강경애도 경찰이 난사한 총탄을 받고 쓰러진다. 백아산 호랑이이자 자신의 강철부대를 이끌던 이태식도 전설적 죽음을 만들어놓고 떠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던 김범우는 반공포로가 되어 마산수용소에서 풀려나왔다. 정하섭은 북쪽으로 자신은 남쪽으로 휴전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비극적 싸움에서 그 언제 만날지 모를 그날까지, 다시 만날 그날까지 꿋꿋하자는 속마음을 다짐하며 벌교로 향한다.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 휴전을 계기로 토벌대들의 공세는 다시 한번 맹렬해진다. 지리산 남부군, 아니 제5지구당의 전설적 전사 이현상이 토벌대의 총탄에 숨을 거두었다. 토벌대에 쫓겨 피아골을 찾은 김범준, 김범준을 마지막까지 호위하며 인민해방투쟁을 해온 이해룡, 김범준과 이해룡은 피아골에서 토벌대가 난사된 기관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토벌대에게 자신들의 비트를 기습당한 염상진은 처절하게 저항하면서 네 명의 부하와 함께 투쟁을 끝내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직감한다. 아들 광조의 '아부지, 나도 싸게싸게 커서 아부지맹키로 훌륭헌 사람이 될라요' 라는 말이 쟁쟁하게 울려오면서 어머니, 아내, 딸의 얼굴, 그리고 왼쪽 윗주머니에 넣어 둔 어머니가 주셨던 돈을 매만져본다. 염상진과 네 명의 빨치산은 수류탄의 폭음 속에서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자폭을 했다. 염상진의 목은 토벌대에 의해 수습되어 벌교역 광장의 시전대 꼭대기에 걸린다. 벌교 제석산의 어둠속 그믐달을 보여주며 시작된 소설 태백산맥 속 조그만 남쪽 고을, 벌교 빨치산의 마지막 최후이자 토벌대의 승리가 벌교읍 하늘아래서 목도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둠이 깊게 내린 목이 없는 염상진이 묻힌 무덤에 그림자 여섯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하대치를 비롯한 염상진 휘하의 빨치산 대원들이었다. 하대치는 할아버지한테 받은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손자에게 전하고 죽을 것을 맹세하며 염상진의 무덤을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소설 <태백산맥>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나는 2015년 늦은 여름 무렵에 다시 한번 이 대하소설을 읽어 내렸다. 가을이 오고 있는 오늘, 9월 26일, 추석명절을 하루 남겨놓은 시각이다. 이 새벽에야 완독을 마쳤다. 이 글은 2013년 12월 무렵에 쓰인 이곳에 수정하여 첨부하고 있다. 달리 다른 지면을 빌어 쓸 이유가 없기에.
민족이라는 이름의 그 길! 여전히 아련하여 갈 수 없는 길, 그리고 아아, 민족통일! 평화적 통일!
이것은 이번에 다시 한번 소설 <태백산맥>을 완독을 하고 나자 남겨진 것이다. 이전 1990년 무렵에 읽고 난 후에는 어떤 것이 남겨졌던가! 너무 까마득한 세월 속에 그것을 한 문장으로 빚을 만한 흔적이 없다. 소설의 전체를 관통해 내는 시대상황이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이어지고 있었을 뿐. 그것을 어이 한 문장으로 토해낼 만했겠는가!
민족이라는 이름의 길, 여전히 멀고 멀어 갈 수 없는 길일까? 아, 민족!
김범준이가 가고자 했던 민족통일의 길과 백범 김구선생이 가고자 했던 자주적 독립과 민족통일은 문득 김범준이 염상진과 안창민에게 한 이야기를 오버렙되게 한다. 작가 조정래 님은 독자에게 이 오버랩을 준다. 때로는 김범우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좁은 문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념으로 갈린 어느 한쪽의 적확한 묘사들이 여느 진실을 왜곡하여 우선하도록 만든다고 다른 한쪽의 거센 반격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이 출판당시 출판금지를 강요하는 시대의 정부를 있게 했다. 나는 그 길에서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현재를 생각한다. 주의를 기울여 지금 우리가 찾아가야 할 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는 그 길을 찾아가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 길을 찾아 나서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듯 우리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너무 오래도록 익숙하게 지내왔기 때문이다. 민족보다는, 민족통일을 떠올리기보다는, 오랜 분단의 상황이 우리 모두를 이 상황에 익숙하도록 만들고 있다. 남쪽은 남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있다. 북쪽은 북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삶이 있다. 이 현실이 분단의 벽을 더욱 완곡하게, 완벽하게, 철벽을 치고 있다. 민족이라는 단어. 그 이름의 길. 현 상황에 익숙해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지만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고민하도록 만드는 길이다. 나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우리 민족의 길. 민족을 등한히 한 남과 북의 그 여느 집단도, 세력도, 민족이라는 민족의 통일이라는 당면적 상황 앞에서는 적어도 그 무릎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되면서 말이다.
1953년 10월, 지리산 피아골을 비롯한 모든 산들의 골속골속에 늦은 가을을 알리는 단풍들이 피었으리라. 선열이 낭자한 핏빛의 단풍들이었으리라. 간간히 격동의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후대인들은 이렇게들 말하기도 한다. 지리산을 비롯한 골속골속의 산에 물든 단풍이 어찌나 붉던지. 그러면서 피아골을 되짚어갈 때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피아골 단풍은 핏빛이다.’
그곳에 뒤섞여있을 빨치산과 토벌대 상호 간에 흘린 피는 그렇다, 핏빛이다. 비록 소설 속에서 드러낸 것처럼 빨치산의 핏빛으로 기억되었을지언정 남쪽과 북쪽, 전쟁에 휩쓸린 모두의 피였다.
인간 세상 곳곳에야 그 어느 시대든 있어왔고 앞으로도 인간들의 전쟁은 있을 것이다. 인류 자체가 그랬고, 그래서 국가끼리 그랬고, 민족끼리 그랬고, 앞으로도 언제든 어느 때든 인류는 또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우리 또한 예외일 수 없는 그 질곡의 길을 걸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현장적인 한반도, 우리만의 긴장된 상황은 분단의 철벽을 사이에 두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첨예하게 마주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북을, 북이 우리를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팽팽하게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래도록 이렇게 지냈다. 이것이 익숙해지고 앞으로도 이렇게, 이보다도 더 오랜 시간 동안 지낼지도 모른다. 미래는 알 수 없는 무엇일 뿐, 긴장은 여전히 우리 모두를 붙잡아두고 있다. 허지만 핏빛으로 기억되는 역사의 되풀이를 우리 모두는, 남쪽의 국민과 북쪽의 인민들은, 그 누구든 모두 거부한다. 그런 집단의 그 세력의 기획과 음모, 그 무모함을 완강히 거부한다.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않지만 어리석어서도 안될 일이기에. 더욱더 우리 모두가 핏빛으로 거듭되는 격동의 시대를 또다시 건너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각인하고 있기에 그렇다.
우리 모두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야 할 길이 있을 것이다. 평화로서만이 가야할 길이 있을 것이다. 평화적 민족통일, 민주적 평화통일. 당신이 바로 나이기에. 나 또한 당신이기에. 우리는 대한반도의 사람들이기에. 우리모두는 현명한 길을 찾아 반드시 대안을 만들 것이다. 그 길을 누군가는 걸어갈 것이다. 남과 북이 반드시 피를 흘리지 않고 그 길을 찾아낼 것이다. 우리모두는 그럴 것이다. 당신 또한 그러할 것이다. <끝>
덧붙임 :
다시 읽게 된 소설 <태백산맥>의 10권 마지막 장 여백에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
- 2015년 9월 26일 새벽 2시 50분
26년 여 만에 다시 한번 읽다. 여전히 갈 수 없는 길. 그 민족통일의 길.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이, 남과 북에서, 격정의 세월 속에 사라져 갔는데 민족통일은 요원하다. 남과 북은 각자의 체제를 구축한 채 굳어져 가고, 그때의 전쟁이 쉬고 있는 오늘에도 꿈꾸고 희망을 가져본다. 남과 북이 함께 희생의 울안에 가둔 많은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평화적 통일의 날이 오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