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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Nov 11. 2024

소설, 도꾸가와 이에야스 줄거리

소설도꾸가와 이에야스


<...이제 일곱 권의 소설책은 나의 과제로 남겨졌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읽어 볼 요량으로 여태껏 그냥 지나쳐 왔다. 그것이 언제 읽힐지는 모른다. 다만 열세 권의 책을 모든 생각을 중단한 채 읽었던 그 겨울이 선명히 남아있는 한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다... - 1998년 초여름 날에, 1987년 그 겨울에 읽었던 소설 『대망』의 감상을 뒤늦게 적다.>     

1998년 즈음에 나는 스무날 하고도 여섯인가 하던 날, 읽다가 중단한 소설 대망이 생각났으리라. 어떤 연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완독을 못 해서 한편으로는 아쉬웠던 기억과 함께. 나는 그때 읽었던 내용들을 떠올려 보면서 어쩐지 감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하여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책을 읽었던 감상을 기록하다가 말미에 저처럼 적어 놓은 것이리라.     

 

그렇게 언젠가는 읽어 보겠다던 소설 대망. 그 기록을 남겼던 1998년으로부터 다시 꼭 10년!

처음 소설대망을 읽었던 때로부터 무려 21년 남짓! 


벚꽃이 만발하고, 그 꽃잎이 봄바람에 흰 눈처럼 떨어지던 해(2008년) 삼월 말의 한가로운 어느 날, 마침내 읽지 못했던 그 일곱 권을 마저 읽어보자는 생각이 문득 일었다. 도서실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사이에서 대망을 찾아냈다. 그리고 비로소 다시 소설 대망을 읽는 감상이 시작됐다.      



감상에 앞서, 때는 서기 1541년.

일본의 무인 정권인 막부의 창시자 미나모토 요리토모 정권 이후 다시 일본열도는 봉건영주들이 득세하고, 마침내 중앙정부 없이 전국(戰國)시대가 진행된다. 다케다 신겐 21살, 오다 노부나가 8살, 도요토미 히데요시 6살, 히로타다와 오다이 사이에서 태어날 마쓰다이라가의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      

나는 두 부분으로 나눠서 대망을 읽어 갔다. 한 부분은 21여 년 전, 읽기를 다 못했던 그 부분부터 새롭게 읽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아예 처음부터 읽기를 다시 했다. 즉 소설대망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동시에 읽기 시작한 것이다.


첫 권부터 다시 읽기에서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소설의 내용들이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진 것이다. 어찌 된 게 많은 오독이 있었고, 오독만큼 내용들도 잘 정리가 되어있지도 않았다. 하기야 20여 년이 지난 감상을 지금 이 자리에 끄집어낸다는 것도 무리겠지만, 그 당시의 감상에 대한 진실성이란 어찌 보면 오랜 세월을 거쳐 녹이 끼어버린 구리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제일 먼저 깜짝 놀랐던 오독은 저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을 향해 오줌 줄기를 내뿜는 사내아이는 기치보시(노부나가)가 아니라 다케치요(이에야스)였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전국시대의 사내대장부에 대한 상징성을 부여하려고 의미 있게 그렸던 어린 그 소년이 내 기억 속에는 이에야스가 아니라 노부나가로 녹아 있었던 셈이다.

(이 부분에서 어찌 된 게 나는 오독을 했다. 즉 잘못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재독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소설은 이렇다. - 볼모가 풀린 8살 다케치요(훗날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슨푸 성에 도착하고 또 새로운 요시모토 하의 볼모 생활이 시작되는 첫날, 요시모토는 성대한 연회를 연다. 휘하의 많은 무장들이 있는 연회석에서 때마침 마려운 오줌을 참지 못한 다케치요가 갑자기 후지산 쪽을 향하여 천진난만하게 오줌 줄기를 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보고 그 자리에 참석한 무장들이 다케치요라는 아이가 보통 아이와는 달리 크게 자랄 아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      


또 하나는 노부야스(이에야스의 아들)의 죽음에 관한 기억이었다. 그 시기는 이에야스가 다른 가문들의 틈바구니에서 굴욕을 참아내고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노부나가와의 유대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다만 정략적으로 연을 맺은 요시모토의 질녀인 정실 쓰키야마의 이에야스에 대한 도저히 부부라고 생각할 수 없는 끊이지 않는 질투와 시기와 반발과 배신이 있었고, 쓰키야마와의 사이에 태어난 성격이 거친 첫아들 노부야스가 있었다. 노부야스의 거친 성격과 행동과 친모 쓰키야마의 음모가 함께 아우러지면서 결국 자신의 운명을 장인(노부나가)의 손에 쥐어지게 했고, 따라서 자결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이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에야스는 어떻게 해서든지 힘겹고 어려운 이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자식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러한 현실을 이겨내기에 너무 힘겨워서 열병을 앓으면서도 그는 노부나가와의 동맹관계는 훗날 일본열도의 천하통일과 직결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고절한 판단이었으며, 결국은 생이 다할 때까지 잊어버릴 수 없는 인생의 목적이기도 했다. 아들 노부야스가 죽자 그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 이 언덕을 멋지게 넘어야 한다. >      


아울러 혼노사에서 맞게 되는 노부나가의 최후, 즉 ‘혼노지의 변(本能寺變)’에서도 빠뜨려진 감상이 있다. 노부나가의 정실 노히메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노히메는 살모사라고 불렸던 아버지 사이토 도산이 노부나가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오와리 쪽에, 즉 노부나가에게 시집보냈다. 한데 살아가면서 노히메는 아버지의 명령보다는 노부나가의 인간미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인연생기란 이런 것. 결국 딸은 아버지의 적이 되어버린다. 뭇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노부나가의 기질 못지않게 여장부 자체였던 노히메.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했던가. 그 노히메의 최후가 노부나가의 최후에 녹아버려져 침식되었는지, 아니면 그때의 감상에는 그저 무상함이 깊어서 이 여인의 최후가 무상함과 더불어 아지랑이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번 감상에는 끝까지 지아비의 곁에서 최후를 함께 하고자 했던 노히메의 가슴 아픈 죽음이, 불길을 놓아 스스로 죽어간 노부나가보다 더욱 애련하게 온몸을 후벼냈다. 평생을 불같이 살았던 노부야스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준, 아내 노히메, 그 노히메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먼저 불길을 놓아 의연하게 죽어간 노부야스의 눈에 불처럼 번득였을 눈물은, 반역의 기치를 올린 주도면밀한 부하 미쓰히데를 향한 분노와 이 반역을 깡그리 모르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자책과 통탄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일생을 함께하다 비참하게 같이 죽어갈 수밖에 없는 아내 노히메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 아프다.      


히데요시에게로 눈을 돌리면 그때의 감상과 크게 다른 것은 없다. 지혜가 출중하여 꾀보라고 불리기도 한 오와리 농가 출신의 평민 영웅 히데요시. 어린 날에는 쪼글쪼글하게 여윈 때 묻은 얼굴의 개구쟁이. 노부나가를 주군으로 삼으면서부터 겨울이면 노부나가가 신고 다니는 짚신을 품 안에 넣어 훈기가 베인 뒤에 주군이 신을 수 있도록 했던 사내. 주군 노부나가로부터 곧잘 원숭이라고 불린 사내. 그 시절 천하통일이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주군에게 천하통일의 운이 닿는다면 그것은 행운! 만약에 그 운이 닿지 않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이 사람만이 자신의 일생을 모두 걸고 함께 갈 수 있는 사람! 평생을 이 주군과 함께 할 것이라는 주군에 대한 넘치는 흠모를 가슴 가득히 품고 다녔던 히데요시! 그 주군을 잃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치면서 전장으로부터의 말머리를 돌렸다. 마침내 그가 주군 노부나가가 이루지 못한 일본천하통일의 과업을 생각하며 칼을 빼 든다. 반군 미쓰히데를 제거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을 결심한다. 그의 천하통일의 과업 앞에서는 한때 생사를 함께 하고자 했던 주군 노부나가의 측근과 혈육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카를 자결하도록 했다. 전쟁터에서 평생을 함께하며 죽음마저 같이 하고자 했던 나가히데 또한 자결하도록 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야망이란 어떤 것일까. 그 실체란 무엇일까. 마침내 일본천하통일을 눈앞에 놓고서 자신이 노부나가 이상 가는 인간이라는 증거를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생각해 내기에 이른다. 이처럼 히데요시의 앞만 보고 질주하는 본능, 방약무인하고 자유분방하여 마치 미치광이처럼 비약이 넘치지만 거의 빈틈이 없는 그 본능 앞에 이에야스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미카와의 고집스러운 무사인 이에야스가 마침내 히데요시와 대등하게 맞서기를 작심하고 나선 것이다. 고마키 전투에서부터 두 사람 간의 모계(謀計)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일본천하통일을 위해서 제거해야 할 적으로, 혹은 협력자로, 때로는 처남 매제 간으로도 이어져가는 두 사람의 관계는 이에야스가 자신 반생의 운명을 결정할 에도로 옮겨가고, 불세출의 영걸 히데요시는 대륙원정을 반대하는 절친한 다도(茶道)인 소에키를 할복하게 하면서, 조선을 거쳐 명나라에 진출하는 전략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강대하고 호쾌하여 모든 것을 헤아리고 모든 것을 지배할 줄 알았던 이 불세출의 영걸. 커다란 자신감을 갖고 의연하게 모진 비바람 속에서 일본천하를 지배하던 히데요시였건만 자기 사후에 대한 불안이 엄습해 온다. 빈틈이 없던 판단과 지혜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간파쿠를 물려준 외조카 히데쓰구를 자결하게 하고 히데쓰구에게 딸린 사십여 명의 처첩들과 어린 자녀들까지 죽음에 몰아넣는 무자비함이 대신한다. 그때 형이 집행된 강변에서 풀잎의 이슬로 사라진 히데쓰구의 자식들은 사내아이들이 큰아이가 이제 겨우 다섯 살을 밑으로 연년생 세 명, 그리고 딸아이 하나는 앞뒤를 가릴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첫돌이 되지 않는 아이였다.        

더럽히지 않으려고 마음먹건만 / 자칫하면 불법은 / 세상을 건너는 / 징검다리가 되니 / 어찌 슬프지 않으리.  - 지친(慈鎭)스님.     

무력 만능의 난세에서 무사들이 일벌같이 목숨을 걸고 권력을 다투다가 일단 그 권력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태평의 시간을 맞는다. 이름하여 평화. 그때 그 평화의 꿀을 빨아먹는 자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상인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화평 안에서 번창하기 시작한 무역상들은 무사들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 놓은 꿀을 가지고 자신들의 향연을 피워 올린다. 즉 무사도에 목숨을 걸었던 한쪽의 목숨이 다른 한쪽에게는 삶의 향락을 만들어 주는 그저 덧없는 희생에 불과했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와 같은 세상이 일본 역사에서 새롭게 여명처럼 돋아나고 있는 가운데 조선을 통한 명나라 진출에 마지막 온 힘을 쏟아부었던 불세출의 평민 영웅 히데요시에게 최후가 왔다. 어린 히데요리, 노부나가의 여동생과 아사이 나가마사 사이에서 태어난 큰딸, 자차히메에게서 말년에 얻은 6살 히데요리를 이에야스에게 부탁했다. 일본천하통일. 그것은 그의 마음 조금 먼 곳에 또렷이 남겨진 채 사라졌다.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다시금 휘몰아치는 난세의 바람. 그 앞에서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가신 미쓰나리가 마주쳤다.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통하여 지난날 히데요시의 영화를 복원하려고 했던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이에야스에게 패하고 결국 오쓰에서 교토로 압송되면서 생을 마감한다. 고마키 전투에서부터 세키가하라 싸움까지, 이에야스대 히데요시의 싸움은 마침내 막을 내린다. 그리하여 언제나 가슴속 깊이 품고 다녔던 일본천하통일, 천하태평을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이루어내고자 했던 이에야스의 인생 목적. 그것이 세키가하라 전투를 끝으로 비로소 그 시작을 열어 보인 것이다.       


지나온 세월, 난세 속의 찬연했던 무수한 영욕의 순간들이 이에야스 눈앞을 지나갔다. 생후 일 년 반 만에 생모 오다이와 헤어지면서 시작된 볼모 생활은 생부 히로타다를 잃게 만들고, 6살 때 볼모지에서 노부나가와의 첫 만남, 이어서 8살부터 슨푸 성의 요시모토 하의 볼모 생활, 그 무렵 어린 이에야스를 알아보고 그 자신의 정신을 계승시키기 위해 훈육에 힘써 주었던 셋사이 선사와의 만남, 훗날에 알게 되지만 <백성의 소리를 깊이 새겨들으라.>며 그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우선 자아(自我)를 버리고 무(無)가 되어야 함을 일깨워 준 셋사이 선사의 모습. 13살 때 정략적으로 맺어진 쓰키야마와의 험난한 부부생활, 미카와의 오카자키 성으로의 복귀, 서른한 살의 한창나이 때 다테다 신겐에게 미카다가하라 전투에서의 대 참패, 믿었던 가신 오가 야시로의 음모와 배반에 마침내 정실로써의 자리를 벗어던진 쓰키야마의 애정행각과 배신, 아들 노부야스의 죽음, 일본천하통일이라는 기치아래 맺어지는 노부나가와의 숙명적인 동맹관계, 히데요시와의 치열한 싸움과 일본천하통일을 위한 협력관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승리와 적장 미쓰나리의 최후, 그리하여 오늘의 이에야스가 있기까지 수많은 싸움에서 함께 했던 미카와의 무사, 그 이에야스의 가신들... 외로웠던 볼모의 어린 시절에 할아범이라 불렀던 오쿠보 신파치로부터 사카이 다다쓰구, 혼다 헤이하치로, 사카키바라 고헤이타, 오쿠보 다다요, 혼다 사쿠자에몬, 하치스카 히코에몬, 오쿠보 히코자에몬, 오쿠보 다다치카, 사카이 다다요, 나가이 나오마사, 도리이 모토타다, 무사시절 마쓰모토 기요노부로 불렸던 무역상 자야 시로지로 기요노부, 이에야스를 위하여 주변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누명을 무릅쓰고 히데요시에게 일신을 의탁한 이시카와 가즈마사, 그리고 혼다 마사노부.....그 미카와의 무사들은 항상 말했다. 우리 주군은 이 난세를 헤쳐 나가는 강직한 미카와의 무인이면서 언제나 순하고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이에야스가 일생을 담아 이루어내고자 하는 일본천하통일, 천하태평은 아들 히데타다와 뒤늦게 얻은 자식이자, 첫아들 노부야스의 기질을 그대로 닮은 다다테루에게 넌지시 건네는 당부에 담긴다. 이에 대한 솜씨를 여기 소설대망의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의 문장을 통해 보자. 

...어디서든지 바라보라. 내가 내 소원에 알맞은 자인지 어떤지를. 

...무사는 그 평생 인내의 싸움이다. 난세의 사나이들은 모두 그처럼 무거운 인내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남아 있다. 

...인생은 음미하는 것. 음미하면서 현실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측근 이타쿠라 가쓰시게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작가는 기록한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사람의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불편함을 일상사로 생각하면 그리 부족한 게 없는 법. 마음에 욕망이 솟거든 곤궁했을 때를 생각하라. 미치지 못한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낫다. 

...철저히 집착하는 사람, 즉 순수한 격렬함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그만큼 맑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인간의 기량이란 대체 무엇이 키워 주는 것일까. 그것은 평화다. 평화만이 인간의 기량을 키워 줄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목표가 정해진다. 목표 ‘전란의 추방’     

에도(江戶). 이에야스가 반생의 운명을 걸기로 결정을 내린 에도 땅. 예전에 즈이후로 불렸던 스님 기타인 덴카이는 에도 땅을 밟고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웃고, 울고, 기뻐하고, 탄식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경서 속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은 소중한 문장과 같아서 살아있는 문자를 읽고 있다고 에도 땅을 극구 예찬했다. 그 에도에서 이에야스는 세상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굳힌다. 이처럼 아무리 세상을 위해 산다고 자부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모르는 곳에서 남을 괴롭히고, 깨닫지 못하는 곳에서 죄를 지으며 살게 된다. 이에야스의 인생도 다를 바 없었다. 일본천하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다짐하며 숱한 사람을 죽였고 숱한 원한의 과녁이 되었다. 만약에 이러한 영혼과 사람들에게 그저 죄책감만 품으면서 져버리고 만다면 자신의 일생도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의 생애처럼 한갓 물거품에 지나지 않으리라. 이 죄책감을, 슬픔과 괴로움을, 겉으로 내비치지 않고 오만하리만큼 가슴 펴고 자신만만하게 헤쳐 나가지 않으면 세상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다진 것도 한갓 모래성에 불과할 것이다. 내 멋대로가 아니라 세상이 지금 원하고 있는 바대로, 세상 뜻대로 살아가는 길을 반드시 걸어가야만 한다. 이에야스는 에도에서 이렇게 마음깊이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세이이타이 쇼군(將軍). 마침내 쇼군이 된 이에야스는 에도를 중심으로 한 정치를 편다. 이름하여 에도바쿠후(江戶幕府)정치. 예전에 오가 야시로의 음모와 배반에 혹독한 시련을 겪은 바 있는 이에야스는 부려야 할 사람과, 부림을 당하는 쪽에서는 섬겨야 할 사람을 잘 선택해야 만이 양쪽 모두에게 불행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에도의 정치에서는 이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본디 광대였지만 광맥을 바로 찾아낼 줄 아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자신을 써달라고 했을 때 이를 거부하자 그 뒤부터 세상을 삐둘어지게 보아온 주베에 나가야스를 가신 오쿠보 다다치카의 천거에 따라, 가계까지도 자신을 천거해 준 다다치카의 가계를 딴 오쿠보 나가야스를 쓰기로 한다. 일본 전국의 금광을 파는 총감독 오쿠보 나가야스. 이에야스에 의해 이에야스의 자식 다다테루의 스승으로까지 낙점된 행운의 이 사나이는 일찍이 히데요시가 감추어둔 어마어마한 황금을 알아내고는 차츰 황금성을 꿈꾸기 시작한다. 황금과 때마침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 가는 정황 하에서 심심찮게 퍼져나가는 예수교를 이용하여 유럽까지 아우를 수 있는 세계 무역제국을 꿈꾸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로 했다. 그 대상자로 다다테루의 장인이 될 외눈박이 다테 마사무네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이에야스의 유교로 새 질서를 추구하는 에도막부 정치가 삼 년이 흘렀다. 이제는 쇼군자리에서 물러날 시기. 은퇴를 생각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미망인 고다인을 찾아간다. 자신의 은퇴와 더불어 우대신으로 히데요리를, 내대신으로 아들 히데타다를 결정했음을 말한다. 몇 백 년이나 황실에 종사해 온 공경을 지휘하는 우대신으로 히데요리를 천거한다는 것은 그 기량이 영주들을 지배하는 내대신, 즉 세이이타이 쇼군을 능가해야 한다는 게 히데요시의 미망인 고다인의 생각, 고다인은 히데요리의 기량이 걱정되어 거부한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다이라 집안도 역적의 누명으로 멸망했고, 미나모토 요리토모 씨, 뒤의 아시카가 미나모토 씨도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는 대신으로 천거한 혈족들이 영주들을 지배할 수 없을 정도로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나 이에야스는 자신의 은퇴결심을 실행한다. 아울러 앞으로 정치가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은퇴의 목표로서 관허무역선허가, 즉 해외진출을 제시하면서.      


은퇴와 더불어 오고쇼, 쇼군을 최대로 높인다는 뜻인 오고쇼가 된 오고쇼 이에야스. 이에야스는 구교를 신봉하는 스페인, 포르투칼과 신교를 신봉하는 영국, 네덜란드의 각축전이 일본의 해외진출과 맞물려 있음 안다. 즉 예수교는 신, 구교라는 양분된 모습으로 일본에서는 남만인(구교)과 홍모인(신교)으로 구분되어 홍모인은 이에야스 쪽으로 남만인은 오사카의 히데요리 쪽과 다다테루, 마사무네 쪽으로 연결되면서 해외진출의 기치에 앞 다투어 뛰어든다. 예수교는 신, 구교의 양태로 일본의 지배층에게까지 영향력을 주게 된 것이다. 오고쇼 이에야스와 쇼군 히데타다의 한축과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우라쿠와 자차히메, 즉 요도마님과 히데요리의 축, 광산개발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고 있는 오쿠보 나가야스와 이에야스의 여섯째 아들 다다테루와 다다테루의 장인 다테 마사무네의 축, 이 세 축의 정점에는 여전히 오고쇼 이에야스가 실질적인 지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해외진출을 통하여 획득할 이윤에 대한 각 인간들의 욕망까지를 지배하고 통제하기에는 인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한계가 있었다. 항상 부려야 할 사람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경계심을 놓지 않은 오고쇼에게 마침내 오쿠보 나가야스가 꾸미고 있는 일련의 이상징후가 정보에 담겨 들어온다.        


한편, 이에야스는 일본 연안에서 조난당한 영국인 윌리엄 아담스를 구해 그를 통하여 해외진출의 길을 열어 가는데, 윌리엄 아담스는 이에야스의 호의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일본이름, 미우라 안진으로 개명을 하고 네덜란드를 다녀와서 일본과 네덜란드와의 국교를 성사, 마침내 이에야스로 하여금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유럽의 국가들과 평등한 관계를 맺고 부국책을 펴나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역사를 기록하게 한다. 이즈음 예수교인인 남만여인 쓰바키 부인을 두어서 여자를 좋아하고, 권력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고, 게다가 하나님 같은 엄청난 존재까지도 좋아하여 정말이지 인간이란 도저히 손도 못될 생물처럼 여겨진 다테 마사무네를 꼬집어 생각해 보기도 한 오쿠보 나가야스지만 마사무네와의 관계를 결속해서 그 자신의 야심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굽히지 않는다. 이에야스가 유럽과의 평등한 관계를 통한 부국책을 꿈꾼다면, 오쿠보 나가야스는 이에야스의 무력의 힘과 자기가 파낸 금과 은에다 이에야스의 후계자를 더해 세계의 바다로 진출, 일본이 7대양의 패자가 될 것이라는 야망을 꿈꾸고 있기에, 그 과정에서는 다테 마사무네를 반드시 필요로 했다. 전투에서의 경험이 전무한 나가야스인 까닭에 악인도 아니고, 믿는 상대를 배신할 것 같은 불성실한 사내도 아니라고 하지만, 술에 취하면 생각지도 않는 일까지 마구 지껄여대 정말이지 술자리에서 사사롭게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한 생각을 늘 만들게 한 나가야스를 얼마간 경계하고 있는 마사무네도, 이에야스의 사후에 권력이동이 있게 되면 나가야스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서 나가야스에게 나름대로 깊은 속내를 던지고 있었다.      


다테 마사무네. 그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투지를 불러일으켜 준 주군이었다. 공석에서 심심찮게 애송이, 애송이라고 말하던 히데요시조차도 그의 불타는 투지를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누구나가 두려워하는 히데요시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이에야스도 마찬가지다. 그의 마음에는 단지 늙은 너구리로 생각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그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처박아 두고 지낼 뿐. 이렇듯 세 사람은 각자가 생각한 서로 다른 목표와 야심과 야망을 가지고 향후 일본이 변화될 상황을 계산하며 준비를 하는 것이다.      


술과 함께 늘 여자를 가까이하는 나가야스에게는 오코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여러 가지 번뇌를 갖도록 태어난 여자라고 자책하는 본디 니치렌 수도자와 같은 혼아미 고에쓰를 사모하는 고에쓰의 사촌여동생이다. 자신의 말처럼 번뇌가 많아서 사모하는 고에쓰와 결혼하지 못하고 오쿠보 나가야스의 소실을 선택하여 나가야스의 애첩으로 생활하다가 뜻하지 않게 술 취한 나가야스로부터 그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듣게 된다. 그 비밀을 이에야스가 대단히 신임하는 혼아미 고에쓰에게 전달하기 위해 자식 없는 여인이 자식대신 낳아서 남기고 가고 싶은 심경을 새겨 넣어 비밀기록부를 작성하여 초록색상자에 담아 전달한다. 그리고 자신은 나가야스가 꾸미고 있는 비밀스러운 계획 속에서 초연하게 죽음을 맞는다. 세계의 바다로 진출하기 위해 야심만만한 계획을 암중비약(暗中飛躍)하던 오쿠보 나가야스, 그가 만약에 무장이었더라면 그 지혜가 가히 히데요시에 비견할만하고, 모략이 미쓰나리에 견줄만하다는 말을 곧잘 들었던 이 사내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이 찾아온다. 뇌졸중으로 최후를 맞이한 그는 단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지상을 떠나지만, 그동안 그의 이상징후를 감지해 오던 이에야스 측에게 일련의 단서들이 접수되기 시작한다.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이자, 이에야스가 세상을 떠나면 영주들의 최고원로로서 무게를 실어줄 혼다 마사즈미는 오코가 죽으면서 고에쓰에게 전달한 기밀에 중요인물들이 연명 날인한 연판장이 있음을 이에야스에게 보고한다. 이 연판장의 존재는 에치고의 다다테루, 오사카의 히데요리와 무관하지 않은 데다 측근 중 이에야스 정치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가장 강력한 가문인 혼다 부자와 일찍이 광맥잡이 주베에, 즉 주베에 나가야스를 천거한 오쿠보 다다치카 가문사이에 분쟁의 씨앗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천하를 소란케 하여 한바탕 소용돌이를 몰고 와 모든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엄청난 위력을 지닌 폭발의 진원이었다.     

 

야규 무네노리. 아버지 세키슈사이가 이에야스의 무술사범이었던 것처럼 ‘쇼군의 수련담당관’인 그는 대우주와 함께하여 결코 그때그때의 권력자에게 아부하거나 섬기지 않는다는 비원의 ‘무도(無刀)의 검(劍)’ 즉, ‘불살(不殺)의 대승검(大勝劍)’에 근원을 둔 긍지와 자계(自戒)를 지닌 무사다. 오고쇼 이에야스는 아들인 쇼군 히데타다의 수련사범으로, 물욕을 엄격히 누르고 정신면을 개발하는 이 무네노리에게 연판장에 대한 수사를 지시한다. 그러나 수사에 들어가기 전에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오쿠보 다다치카, 도요토미 히데요리, 오다 우라쿠, 가타기리 가쓰모토 등의 이름이 서명된 연판장은 원본과 사본이 이미 슨푸와 쇼군 히데타다가 있는 에도에 도착한다. 어찌 보면 나가야스의 ‘교우록’에 불과할 이 연판장은 나가야스를 의지하여 예수교의 구파를 믿는 신자들이 연관이 되어있고, 더군다나 신교의 미우라 안진과 이에야스가 존재하는 슨푸와 에도 쪽에 반하는 오사카가 스페인인 소텔로 신부를 중심으로 한 구교를 지향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그저 쾌활하게 멋을 부리고자 연판장을 만들었던 나가야스의 의도가 음로로 보이게 되는 화약고가 된 것이다. 결국 나쁜 것은 한꺼번에 찾아오기 마련인 거. ‘오쿠보 나가야스에게 반역심이 있었다.’ ‘다다테루, 히데요리가 막부신하의 대원로인 오쿠보 다다치가와 단합하여 쇼군 타도를 위한 비밀도당을 조직했다.’ 라는 소문이 무성해진다. 뇌졸중으로 죽어버린 나가야스가 마지막까지 서명을 받지 못한 인물은 다테 마사무네. 연판장에 서명을 하지 않는 마사무네는 나가야스가 일본의 교역을 확대하여 세계를 지배할 꿈을 꾸고서, 자신이 그저 멋을 부리고자 비밀스럽게 작성한 연판장이 이처럼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줄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위 다다테루에게 이에야스 사후의 권력이동과 구교에 가까이 있던 자신이 오히려 신교, 즉 영국과 네덜란드 세력을 이용하여 이후 유럽과의 교역을 더욱 확대하고자 한다는 의지가 담긴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내용이 무네마사의 정보망에 잡힌다. 아울러 에치고의 다다테루와 오사카의 히데요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마침내 연판장은 그 꼬리를 엉뚱하게 내보이면서 이제는 에도막부정치이래 이어진 태평시대에 누가 더욱 인심을 장악했는가 하는 ‘정권쟁탈’ 이상의 ‘탐욕이 숨어 있는 사고방식’의 싸움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에야스 발밑에 드디어 불이 붙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가신들과의 심야회의를 마친 후 바로 움직였다. 오쿠보 다다치가에게 오사카의 예수교 포교금지와 선교자 추방을 실행하게 한 후 그의 영지몰수와 유배, 여섯째 아들 다다테루의 후쿠시마 성을 영지 내의 다카다 축성지로, 축성의 책임자는 다테 마사무네로,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가 없으며 쇼군에게 더욱 충성하겠다는 서약서를 노신과 행정관들로 하여금 제출하게 한다. 그리고 오사카 성의 일은 도요토미가의 가신 가타기리 가쓰모토에게 히데요리를 설득하여 오사카 성을 비울 것을 추진하도록 한다. 하나 가쓰모토는 오고쇼 이에야스가 선택하는 오사카 성과 슨푸 성과의 화평을 잘 읽어내지 못하고, 그 시기를 놓치고 만다. 마침내 이에야스와 쇼군 히데타다가 오사카 성으로 진격을 명령한다. 이즈음 히데요리의 번민은 지는 전쟁인 줄 알면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승패가 이미 결정된 전쟁이지만 도요토미가문의 명분을 위해서 항전해야 한다는 도요토미가의 옛 신하들의 분기탱천이 있기 때문이었다. 허지만 오사카 성을 향한 이에야스 측의 진지가 완성되고 포문이 성을 향해지던 날,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을 비우기로 조약을 맺으며 화평을 원하는 투항을 결정한다. 이러한 화평조약을 못내 불쾌하게 바라보는 다테 마사무네. 친히 가신들에게까지 예수교 포교를 강요하고 자신도 신자처럼 보이기 위해 펠리페 3세와 로마 교황까지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사자로 보내, 이번 이에야스의 오사카 성 포진에 혼란이 생긴다면 언제라도 예수교 신도들을 이용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펠리페 3세 쪽의 지원을 요구, 단번에 사위 다다테루를 쇼군으로 추대할 야심을 품은 것이다. 슨푸 성과 오사카 성과의 화의는 다테 마사무네의 야심을 돕는 듯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고리야마로의 영지이동이 거론될 즈음,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오사카 성을 탈출하면서 오사카성 내에서는 다시 주전론자들의 득세가 우세해진다. 요도마님이 젊어서 히데요시를 잃은 까닭에 도요토미 가문으로부터 사실적으로 요도마님의 정부로 인정해 주는 오노 하루나가는 무장 사나다 유키무라와 도요토미 가문의 옛 신하들, 7인조인 마노 요리카에, 이토 나가쓰구, 아오키 노부나리, 고리 요시쓰라, 기무라 시게나리등과 함께 오사카성을 지키기로 한다. 이들은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쓰네마사가 그리고 노부나가의 동생이자 요도마님, 즉 자차히메의 외숙부 오다 우라쿠가 동반탈출하자 더욱더 항전의 고삐를 조인다. 뒷날을 생각하지 않는 오사카성의 이 주전론자들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전쟁이라는 싸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오사카성의 많은 여자와 아이들과 히데요리와 조카 센히메와 요도마님을 꼭 구하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노년의 이에야스에게 커다란 슬픔을 가져다준다. 고희가 넘는 수명의 혜택을 입고 이제 감사하면서 아미타불에게 가려고 할 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다시 싸움터로 나서야 한다는 절망감이 늙은 이에야스를 강타한 것이다.     


재출전. 쇼군 히데타다는 히데요리의 정실이자 딸인 센히메에게 자결까지 요구하면서 이번에는 반드시 오사카성을 칠 것임을 이에야스에게 알린다. 이미 오사카성의 움직임에서는 재출전을 막을 수 없게 하는 징후들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무사들은 다시 모이고, 도요토미 가문의 옛 신하들이 이들과 결탁하여 오사카 성의 주변에 해자를 다시 판다.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의 가신 아오키 가즈시게에게 재출전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절규하듯 말한다. 반드시 오사카성을 비워주면 수리하여 다시 우대신과 요도마님을 영접하는 사자를 보낼 것이라고. 그러면서 이것이 무위로 끝날 경우에 남은 구조의 길을 되짚어 본다. 야규 무네노리에게 명하여 이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검술인 오쿠하라 도요마사를 들여보낸 일에 정말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인가를. 정말이지 평생을 여인들이나 아이들이 싸움터에서 남편이나 아버지를, 그리고 젊은 아이들을, 잃지 않는 태평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사나이 이에야스는 이 오사카성이 싸움이라는 어리석음과 절연하도록 자기 자신이 또 한 번 진지한 노력을 해나가지 않으면 사람의 인생이란 ‘영원한 지옥의 별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혼아미 고에쓰가 이에야스의 명을 받고 오사카성의 오노 하루나가를 만난다. 여기서 뜻밖의 말을 듣는다. 하루나가 자신은 결코 주전론자가 아니라는 말과 함께 오고쇼에 대한 의리를 다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태평한 세상에 방해꾼들, 즉 갈 곳 없는 낭인들이 태평세월에서 느끼는 무료함 때문에 마침내 싸움만을 기다리는 전사들이 되고,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한 예수교 구교신자들이 신교신자들에 대한 질투, 아우 하루후사를 중심으로 한 주전론자들의 뭉침, 이들을 모두 거느리고 저승으로 가기는 것이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최후의 의무라고 절규하듯 말하는 것을 전해 듣는다. 오사카성은 하루나가의 태도변화에 불쾌감을 느낀 동생 오노 하루후사가 형의 암살을 지시하고, 이 저격이 실패하지만 하루후사의 주전론은 더욱 힘을 얻어 강경해지고, 더군다나 맹장 사나다 유키무라는 이에야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세상에서 전쟁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어서, 히데요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낭인들이 지지하는 싸움 속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결정된 셈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일본열도를 뒤엎을 전운은 이렇게 이에야스의 마음과는 달리 점점 깊어만 간다.     


마침내 전쟁. 오노 하루후사가 고리야마성을 불태움으로써 전쟁은 시작된다. 고토 마다베에, 기무라 시게나리, 사나다 유키무라가 이끄는 오사카성 전국인(戰國人)은 이미 모두가 죽음을 각오한 부대. 특히 고토 마다베에의 활약과 그 용맹은 일본전사에 기록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죽음을 잊어버린 이 맹장은 이시강의 강변전투에서 총탄에 허리뼈가 박살 난다. 중상을 입은 그는 죽음이란 정말 멋있는 뜻을 가진 것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부하 가네가다 헤이자이몬에게 자신의 목을 치라고 부탁한다. 기무라 시게나리 또한 오사카성의 맹장. 그의 용맹은 와카에 전투에서 이에야스군의 칠십 세의 노장 이오리바라 아사마사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 세상에 전쟁이 없어질 리 없다고 그렇게 믿고 발을 내디딘 오사카 입성이, 그대로 생사에 대한 추호의 망설임을 용납하지 않게 한 결단이 되어버린 사나다 유키무라. 생사를 초월한 사나이의 고집을 관철하고자 한 유키무라. 그가 다테군의 유명한 가다쿠라 고주로에게 쫓겼을 때 다테 마사무네는 이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미루어버린다. 사위 다다테루로 하여금 유키무라의 뒤를 쫓아 오사카성을 함락하게 하였을 경우, 예전에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오사카성을 달라고 해서 다카다 에치고에서 축성지로 배치되었던 사실이 형 쇼군 히데타다에게는 오히려 ‘오사카성을 동생이 함락시켰구나 이것은 무슨 뜻이 있을게다’라는 의심을 받게 되는 이유가 될 것이라는 염려가 앞서서 미루어버린다. 결국 곧바로 오사카성을 함락할 시기를 놓쳐 버린다. 이렇게 함락의 시기가 늦추어져 버린 싸움은 백전의 전략가 이에야스의 고뇌를 깊어지게 한다. 마침내 이에야스는 진두에 서서 일생의 배수진을 치고, 싸움의 전권을 위임한 쇼군으로 하여금 자우스 산 전투를 시작하도록 한다. 이에야스로부터 독려를 받은 손자 다다나오는 선두에 나서 사나다 유키무라와의 치열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 죽음 앞에서도 사나이의 고집을 놓지 않은 유키무라는 마침내 자우스 산 전투에서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로써 오사카의 패배는 결정된다. 히데요리와 요도마님의 운명도 이에야스와 쇼군의 간토군이 오사카성 입성과 함께 막을 내린다. 싸움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에야스가 그들은 반드시 구해내겠다며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마지막으로 검술인 오쿠하라 도요마사로 하여금 그들의 신변보호를 지시했지만, 운명의 저울추는 비켜나간다. 오사카성 함락과 함께 자결은 한 오기노 도키의 손에 쥐어진 쪽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 히데요리님, 23살, 모리 가쓰나가님이 목을 잘라드렸다. 요도 마님, 49살, 오기노 도키가 찔렀다...’     


오사카성 싸움이 끝이 났다. 싸움의 끝에서 평화가 오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를 것일지. 이미 많은 희생이 생겼다. 이렇게 희생당하면 언제나 원한이 남는 법.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싸움의 역사에서는 늘 그렇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렇듯 예견된 원한의 빌미를 줄이기 위해서, 오사카성과의 일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서 어떻게 하면 그 희생을 줄일까 하고 이에야스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허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반드시 히데요리와 요도마님을 구해 다시는 원한으로 인한 악연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던 이에야스의 꿈은 무너졌다. 신불이 자신을 버린 듯 생각되었다. 아니, 노년의 이에야스에게 다시금 시련을 줄 뿐, 신불은 역시 자신을 외면한 듯 생각되었다. 일본천하의 평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말이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막막하고, 이에야스 앞에는 이제 늙고 힘없어 보이는 그저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 늙은이만이 덩그러니 내던져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치열했던 오사카성 싸움에서도 자신에게 올 기회만을 엿보며 싸움에 소극적이었던 다테 마사무네. 그는 이에야스가 열망하는 일본천하의 평화와는 애초에 거리가 멀었다. 스스로도 이를 인정하고 간토군과 오사카군 사이의 싸움에서 저울추가 어디로 기울 것인가를 생각하며 싸움 이후의 변화에 골몰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이에야스의 아들이자, 사위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에게 그대로 심어진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도 두려워하지 않던 다테 마사무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의 그런 용기와 지혜가 한때는 이에야스에게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아들을 맡겼다.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의 기량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 그의 기량이 이에야스가 쇼군에서 은퇴를 하자마자 마침내 시력을 볼 수 없는 한쪽 눈의 깊이만큼 음험한 기회주의적인 빛깔을 내뿜기 시작한 것을 감지한다. 행운을 받아 반짝거리던 그의 기량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생각하는 야심과 음모와 모략으로 뒤범벅이 된 것이다. 세키가하라 싸움 이후에도 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두 사람을 이에야스는 잘 기억한다. 오사카군의 맹장 사나다 유키무라와 이 다테 마사무네다. 한데 아들 다다테루도 이제는 이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다테루를 불렀다. 정말이지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는데, 또다시 오사카 싸움보다 더 무의미하고 힘겨운 시간이 올 수밖에 없을 이 상황을 다다테루는 어떻게 안아낼지, 아들의 기량이 점점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처럼 느껴져 온다. 석존은 일찍이 깨닫지 않았던가! 그 당시 전쟁으로 아침이 밝고 전쟁으로 저무는 날들과 성밖의 생활은 빈곤과 병고, 이런 불행 속에서 사람들에게 비록 행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순간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석존은 실망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청해 행복을 쌓으려는 진지한 노력! 온갖 원한의 뿌리도 없고 갈등의 원인인 역겨운 인간들의 욕심도 없는, 인간의 그 지혜와 노력을 틀림없이 해낸다면 지상에 극락이 있다라고. 자신의 야심, 욕망을 초월한 일편단심의 노력을 쌓아나가면 반드시 극락은 지상에 있다. 그리하여 내 극락건설의 첫걸음은 우선 이 세상에서 전쟁을 없애는 것이다! 허지만 이에야스는 기량을 가늠하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아들이 되어버린 다다테루에게 이 뜻을 넣어주기 위해서 말하기보다는, 늙고 쇠락한 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은 자신, 그 자신의 온 인생을 향해 스스로에게 거침없이 말하고자 하는 심경에서 마지막까지 애쓰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고절한 외침이었다. 이에야스는 이타쿠라 가쓰시게를 불러 말한다. ‘가쓰시게, 나는.....나는...아들을 또 하나 잃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며 늙은 이에야스는 울었다.      


다다테루의 처벌. 쇼군 히데타다에게 친동생 다다테루를 처벌하라는 이에야스의 말에는, 이번 싸움이 세상에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시키고 도꾸가와 가문은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였다는 민심에 대한 경계이고, 평화를 열망하지 않는 자는 도꾸가와 가문일지라도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결단이자, 오만불손한 배짱으로 오고쇼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고 자신의 음모대로 야심을 꿈꾸며 일을 꾸미고자 하는 다테 마사무네를 정벌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쇼군은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기량이 아버지의 그것에 미치지 못함을 아버지가 인정해 달라는 뜻에서 자신의 기량 안에서 왕도의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말한다. 다다테루의 처벌이 실천되면 더불어 도요토미 가문의 막도 내리겠다는 뜻이었다. 쇼군은 평민 다나카 로쿠자에몬에게 비밀리에 양육하도록 한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와 시동인 소고의 아들, 이 세 사람을 일찍이 히데요시가 그 조카 간파쿠 히데쓰구의 처첩과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그 축생총에서 참수를 한다. 그때 구니마쓰 나이 이제 8살. 참수장에서 이를 지켜본 한때 도요토미 가신이었던 가타기리 가쓰모토도 이제는 도요토미 가문의 배신자라는 굴레를 벗을 때가 왔음을 알고 생전에 히데요리가 좋아하던 나팔꽃밭아래에서 곡기를 끊고 죽음을 택한다. 평소 폐병을 앓던 그의 나이 60살이었다. 도예가인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아미 고에쓰는 성인의 학문을 일으켜 반드시 평화를 이루겠다던 이에야스의 포부가 도요토미 가문의 마지막 핏줄까지 제거했다고 탄식하며, 마침내 이에야스의 그것은 성인의 도가 아니라 지리멸렬한 무도(無道) 일뿐이었다며 세상을 등지고 그저 찻잔과 칠기만을 만들며 살겠노라고 말하고는 이에야스를 떠난다. 이 싸움의 결과가 이렇게 이에야스의 본마음마저 왜곡되게 비춘다.       


오사카 싸움은 희생시켜서는 안 될 많은 희생자를 냈고, 안타깝게도 친자식도 버릴 각오를 하게 만들었다. 늙은 이에야스가 진두에서 지휘한 싸움이 그가 원하는 바대로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쇼군에게 전후처리를 지시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무사계급의 망동을 금지하는 질서유지를 위한 법령을 제정하고, 아울러 선정을 펴기 위한 통치자의 덕목에 더욱 주력한다. 그리고 형제이기 때문에 쇼군이 미루고 있는 아들 다다테루에 대한 처벌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정말이지 일본을 치기 위해 펠리스 3세가 군함을 파견하고, 마침내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다테 마사무네가 일어나고, 아울러 다다테루가 일어나면서 아직도 신앙을 버리지 못한 영주들이 호응한다면, 또다시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다다테루가 이에야스를 대면하는 것을 금하는, ‘영원한 대면금지’를 지시받은 가스시게는 소임자로 마쓰다이라 시게카쓰의 아들 가쓰타카를 지명하고, 오고쇼의 사자로 소임을 받은 마쓰다이라 가쓰타카는 마침내 다다테루가 미처 살펴낼 수 없었던 사실들을 깨닫게 하는 임무를 무사히 수행한다. 다다테루는 비로소 영원한 대면금지령을 몸소 내릴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오직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는 하나님 같은 엄청난 존재조차 좋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음모가 새어나갈 경우에는 예수교 신자와 신부들도 가차 없이 베어버리고, 해외의 종교 세력을 일본에 끌어 들여와 싸움을 조장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마침내 오고쇼와 쇼군뿐만 아니라, 사위인 자기도 무시하고 비웃으며, 때에 따라 적절하게 이용하여 기회가 온 시기에는 단번에 권력을 움켜쥐려고 하는 장인 다테 마사무네의 심장을 들여다보게 된다. 마침내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을 깨달은 다다테루는 할복을 결심한다. 그러나 다다테루의 할복을 반드시 포기하도록 하겠다는 가쓰타카는 두 번째로 오고쇼의 사자로서 다다테루를 만난다. 오고쇼님은 할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며 다만 언젠가 만나게 되는 한 곳에서 아버지와 자식 어느 쪽이 더 진지하게 살았는지 그것을 아들, 다다테루와 겨룰 생각이라는 뜻을 전한다. 이 말을 들은 다다테루는 아버지 이에야스가 진정으로 자식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철없는 아이처럼 울기 시작한다. 마쓰다이라 가쓰타카가 두 번째 소임을 무사히 수행하는 순간이었다.   


이에야스는 쇼군 히데타다의 뒤를 이을 3대 세이타이쇼군은 히데타다의 아들 다케치요(후일 이에미쓰) 임을 가신들에게 알린다. 아울러 쇼군의 수련담당관 즉, 스승으로 쇼군 히데타다의 현 스승인 야규 무네노리로 임명한다. 이렇게 쇼군을 결정하면서 자신에게 깊이 찾아온 노년을 준비한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정치에 대해 야규 무네노리에게 말한다. 자신의 정치의 요체는 ‘불법에 의한 정치’, 즉 ‘자비의 정치’라고. 그리고 아직 일본천하가 이룩하고자 하는 평화에 대해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는 다테 마사무네에 대해 이미 자신은 깊은 결정을 내렸음을 알린다. 본디 히데요시에게 미움을 받아 영지이동을 당하려던 다테 마사무네를 위기에서 구해내어 오늘날의 터전을 닦게 해 준 이에야스였다. 그 이에야스가 다시 마사무네를 쇼군과 자신의 가신들의 증오에서 벗어나게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미 다테 마사무네는 가장 힘이 됐던 측근 가타쿠라 가게쓰나가 죽은 상태며, 그의 사위는 지금 고립되어 있는 중이라, 이 상황에서 그가 비록 야심을 품고 반란을 획책한다고 할지라도, 이에야스의 인생은 신불을 믿으며 걸어온 인생, 마침내 다테 마사무네에게 구원선을 보낸다. 이에야스는 노년의 마지막을 불법의 정치로 완결 지으며 쓰러진다. 

쇼군 히데타다는 에도 성을 떠나 440리 여정을 눈 한번 붙이지 않고 달려온다. 나고야에서 히데타다의 어린 동생인 고로타마루가 달려오고, 조후쿠마루, 쓰루치요가 이에야스의 병상을 찾는다. 병상을 찾은 쇼군과 자식들 그리고 가신들에게 생전에 누누이 이야기해 두었던 자기 이후의 일들을 다시 다짐시킨다. 그렇지만 병상에서의 이에야스는 일진일퇴. 이처럼 위급함이 짙어가는 병상으로 센다이에서 달려온 다테 마사무네가 도착한다. 그 시각 마침 이에야스는 마사무네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병상에서 앉아 있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무릎을 꿇어앉은 채 오열을 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분을 다시 만났노라는 말을 한다. 다시 그의 말이 이어진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고쇼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어두운 세계를 방황하는 불쌍한 한 마리 맹수, 인간의 도리를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마사무네는 이 눈으로 빛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조용히 말한다. 내 생애에 두렵고도 고마운 사람이 넷 있었다고. 한 사람은 신겐 공. 자신에게 싸움을 가르쳐 준사람. 다음 노부나가 공. 얼마나 두려운 이름이었던가. 그러나 그분에게도 배워 고마운 일. 다음으로 내게 스승이 된 것은 다이코, 히데요시 공. 다이코는 시류의 변화, 그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자신의 죽음을 통해 가르쳐 주었어. 다음이 바로 그대. 이 세분의 기량에 뒤지지 않을 기량을 지닌 그대. 이제 바로 그 기량이 빛나야 할 때. 부탁하네. 내가 죽은 뒤에 쇼군을...마사무네. 다테 마사무네는 무릎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잘 알겠습니다. 더불어 병상을 찾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금 조용히 말한다. 생명이란 대지에서 싹트는 거. 그리고 하늘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나는 큰 나무. 대지와 태양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거대한 생명의 나무. 우리는 모두 그 거목에서 뻗어 난 가지일 뿐. 가지가 시든다고 해서 거목이 시들었다고는 할 수 없는 거. 거목 자체는 해마다 자라고 꽃을 피우는 거. 비록 우리의 현신이 모습을 감추지만 이 생명의 거목 속에 살고 있는 거. 참다운 인간에게는 죽음은 없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이렇게 이에야스가 말을 마쳤을 때, 가신들 중에 앉아있던 야규 무네노리는 인간이 자기 생명의 고향을 찾아냈을 때의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약동하는 환희가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것을 안다.       

병상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이에야스는 무장으로서 생전에 다조 대신으로 임명된다. 이즈음부터 쇼군을 비롯한 중신들에게 유언을 남기기 시작한다. 다시 병상을 찾은 다테 마사무네, 덴카이 선사, 마사즈미...마사즈미에게는 스스로 적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한다. 이것은 이에야스의 평생 비원이었다고. 그리고 자아부인의 고민과 슬픔의 근원인 자식, 추방당한 다다테루에게 노부나가로부터 선사받은 명적(名笛) ‘노카제(野風) 피리’를 유품으로 전해줄 것을 자아부인에게 남긴다. 아울러 노부나가 공이 들바람 속에서 불었던 이 피리가 아버지로 하여금 인간을 믿게 만든 더없는 보물이었다는 말을 덧붙여 달라는 말과 함께. 쇼군에게는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긴다. 인간에게 자기 것은 하나도 없다고. 몸도 생명도 물과 빛과 공기처럼, 금은재보도, 내 자식, 손자까지 무엇 하나 내 소유인 것은 없다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누구의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을 위해 있음을 잊지 말라고. 그래서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소중히 써야 할 것이라고. 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신불의 자식, 태양의 귀한 자식. 서로 정답게 돕고 격려하면서 번영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마침내 작별의 시간이 왔다. 75살. 세상에는 꽃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어느 봄날, 오전 10시 무렵, 사시(巳時)였다. 그날 해 질 녘에는 보슬비가 내렸다.      

     

올 삼월 말부터 유월 이십 일인 지금까지 약 두 달 이십 여 일 동안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읽은 셈이다. 부지런히 읽으면서 때때로 기록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기억이 기록을 따라가지 못하는 요즈음 나는 어쩔 수 없이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이 주는 긴장감이 달아나고, 본의 아니게 지난날처럼 오독을 하는 오류를 되풀이할 것 같아서였다. 정말 마음으로 열을 들이며 읽었다. 이 소설을 다 읽는데 나는 정확히 21년이 걸린 셈이다. 기억하건대 고교 3학년 수업시간, 담임선생이 우리들이 나이 40세가 되면 한 번쯤 읽어보라며 이 소설을 잠깐 소개해주었는데, 고교를 졸업하고, 나는 어떤 연유에서 스물여섯에 첫 권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가 1987년 어느 겨울. 그때는 열 세권 째,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는 부분까지였다. 아마도 그때는 그 부분까지가 내가 읽고자 하는 대목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1998년에 어떤 인연에서였는지, 완독을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뒤늦게 감상문을 남겼다. 언젠가는 꼭 완독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말미에 적어 넣은 채.      

(『 그 소설그리고 1987년 겨울 』      

   소설의 힘과연 소설에는 힘이 있는 걸까.

   단언하는데 나는 소설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소설에는 힘이 있다)     

   살다가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때때로 지난날 읽었던 소설을 생각할 때가 있다. 특히 읽은 그 소설에서 힘을 얻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나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있다. 나는 스무날 하고도  여섯, 일곱 때 어떤 소설을 읽었다. 한번 읽자 모든 생각을 중단하고 오직 그 소설을 읽는데 전력을 쏟았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시절 나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은 그 소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상황은 폐쇄적이었고, 미래는 불투명했다. 내가 직장으로부터 첫 발령받아 간 순천은 나를 기꺼이 맞아 주었지만 거기에 부응할 힘이 나에게는 부족했다.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은 용기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지만 연약한 사람에게는 불안함이었다. 

   혼자서 맞는 그 해 순천에서의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퇴근하여 돌아온 하숙방에는 남동쪽을 향해 조그맣게 뚫린 창문을 통하여 얼어붙은 별빛 몇 개가 들어오는 겨울밤의 정경이 전부였다. 그 방에 들어서기가 싫었던 나는 하숙집 아들 녀석이 딴따라를 하고 있는 술집으로 발길이 돌아서곤 했다. 유일한 나의 술친구였다. 그는 대부분의 악기를 다루면서도 정말로 필요한 악기 하나는 완벽하게 소화해 내지 못하는 아마추어 연주자였다. 그는 낙천적이었고, 내가 찾아가면 서슴지 않고 나와 곧잘 소주를 마셔주었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연주하는 가게에서 예나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소주를 마시다가 새벽이 되어 하숙방에 돌아온 나는 무심코 소설 하나를 읽었다. 소설 제목은 「대망」이었다. 소설은 두툼한 스무 권으로 되어 있었다. 너무 길어서 내가 어디까지 읽고 그만둘 것인지 몰랐지만 나는 무심코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차츰 소설을 읽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겨울 나는 하숙방에 머무는 시간이 그만큼 비례해서 늘어가기 시작했다. 소주를 마시는 시간도 줄었고, 하숙집 아들 녀석은 덕분에 오르간 연주 봉사료를 더 많이 챙겨서 들어올 수 있었다.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는 그 소설을 18년에 걸쳐 신문에 기고를 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얼마 후에 어느 일간지 신문에 글을 싣기 시작하여 긴긴 시간을 오직 그 소설에 매달렸다. 그가 자신의 소설에 매달리게 된 이유는 전후 일본사회를 뒤덮고 있는 피폐와 공허함 때문이었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정신적 공허감에 사회 전체가 가라앉았다.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회의가 사회 내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고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희망과 꿈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소설을 쓰기로 했다. 전쟁으로 인하여 참혹한 현실을 맞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설 제목이 결정되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였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박재희 씨에 의해 「대망」으로 번역되었다. 나는 이 소설에 그때까지의 모든 생각을 중단하고 전념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도꾸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그 시절 <인생의 고개>를 멋지게 넘었는지는 잘 모른다. 허지만 나는 그로 인해 내 스무날 후반의 고개를 어찌어찌 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 해 겨울, 그 소설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소주를 계속 마셨을 테고 순천에서의 겨울을 이겨내지 못한 연약한 사내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새로운 출발은 나에게 불안한 것이었으니까.     

   소설의 첫 권은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의 어린 시절의 모습 중에는 저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을 바라보며 오줌줄기를 내뿜는 장면이 있다. 어린 사내아이가 일본을 상징하는 후지산을 향하여 오줌을 누는 모습을 통해 오다 노부나가가 보통아이들과 달리 통이 크고 대범하다는 표현이었다. 작가는 이 부분을 그리면서 아마도 사내대장부에 대한 상징성을 부여했던 것 같다. 사내대장부에 대한 상징성의 부여는 그 소설에서 중요한 것이고, 아울러 소설을 지탱하는 힘, 그것을 말했다. 나는 그의 아름답고도 비장한 최후를 기억하고 있다. ‘혼노지의 변’으로 불리는 그 사건은 한 대장부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었다. 무인시대의 천하통일이라는 일대 야망을 품고 젊음을 산 사나이였다. 그런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꿈은 그의 손끝 아주 조금 먼데 있었고,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용기는 그에게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부하가 반란을 일으켰다. 산사에서 젊은 야망을 담금질하고 있는 그에게 번쩍이는 칼날이 향해진 것이다. 모든 것은 계획되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몰랐을 뿐이었다. 한 대장부의 최후치고는 너무 어이없게 왔다. 서글픈 일격이었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인정했다. 칼을 빼어 들고 의연하게 일어섰다. 그는 주위를 둘러싼 반란의 부하들을 향하지 않고 돌연히 화염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고 있는 산사의 본체를 향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불길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그는 일본 역사에 남겨졌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주군을 잃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누구였던가. 그를 오늘에 있게 한 주군이 아니었던가. 그 자신 미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토록 해준 주군이 아니었던가. 전장에서의 말머리를 돌려 반군 미쓰히데를 제거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가 생전에 못다 이룬 천하통일의 대사업을 이어받았다. 그는 앞만 보고 달리는 말이었다. 그에게는 과거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출신성분을 지독히도 혐오했다. 그것은 그의 취약점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밟고 일어섰다. 그는 전략가였고, 지혜가 출중했다. 일본 천하는 머지않아 통일될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경쟁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였다. 그의 뒷날을 도모해 줄 사람 또한 도꾸가와 이에야스였다. 운과 명은 재천(在天)이었다. 여덟 살 난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일본 천하통일은 그를 일본 제일의 대장부로 깨어있게 만들었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의 마음 아주 조금 먼 곳에 또렷하게 남겨졌다. 

   울지 않는 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그리고 이에야스에 대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울지 않는 새가 있다. 이 새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오다 노부나가는 말했다. 버려라. 그 다운 짤막한 한마디다. 새는 울어야만 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울지 않는 새라니. 버려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말했다. 울도록 해보다가 안되면 버려라. 미련을 갖지 않는 그다. 어제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오늘과 내일이 있을 뿐이다. 미련은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우는 새를 다시 만나면 되는 것이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말했다.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자. 모든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승리는 아직 요원하지만 패배 또한 내게는 요원한 것이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울지 않는 새이지만 언젠가는 울 것이다. 나를 위해서 말이다.     

   이제 그를 기억해야겠다. 그는 언제나 고개를 넘는 사나이의 모습과 함께 기억된다. <자, 이 고개를 멋지게 넘어야지.> 기다렸다. 모든 것들을. 기다림의 승부사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는 무인시대를 살아오면서 칼보다는 기다림으로 점철해 왔다. 그럴 때마다 힘겹고 어려운 고비가 있었다. 그러한 고개를 그는 넘고 넘었다. 그 자신의 가문이 다른 무인 가문에 의해 지배받게 될 때 비통함과 굴욕을 참고 기다렸다. 그러면서 무인시대에 가문이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고, 가문이 살아남아야 하는 목적을 선연하게 새겼다. 자, 이 고개를 멋지게 넘자. 그리고 기다리는 거다. 그러면서 그의 자식이 무인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굴욕을 참고 있던 그 시기에 짧은 생을 마칠 때에도 그는 견뎠다. 그리고 말했다. 자, 이 고개를 멋지게 넘자. 그는 기다림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며, 그 기다림의 끝을 기다렸다. 그의 시대가 거기에 있음을 무인의 본능으로 직감했다.     

   상황이 폐쇄적이고 불투명했던 스무날 하고 여섯, 일곱의 그 겨울, 그렇게 소설을 읽으면서 그를 생각했다. 모든 것을 기다리며 고개를 넘는 그를 어떤 날은 습관처럼 그려보았다. 그러다가 차츰 가슴 뻐근함과 아릿한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주인공인 그가 내게 가져다준 위안이라는 언어의 수액이었다. 그것은 가슴을 타고 흐르는 내 스물여섯, 일곱 살의 격정으로 빚어져 갔다. 나도 그처럼 고개를 넘고 싶어 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겨울, 나는 정말이지 그처럼 고개를 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후 내 삶을 통한 어떤 것이 힘에 버거울 때면 나는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기다릴 줄 아는 그와 더불어 그의 말이 생각나고는 했다. <자, 이 고개를 멋지게 넘어야지.>      

   나는 그 겨울 열세 권을 읽었다. 그리고 일곱 권을 남겼다. 나머지 일곱 권은 그의 일본 통일과 정치력에 관해 써져 있음 직한 부분이라 여겼다. 그 순천에서의 겨울 동안은 나에게 열세 권의 책이 필요했다. 그런 동안 하숙집 아들 녀석은 오르간 연주 봉사료를 더 많이 모았고, 그 겨울이 지나자 전세를 내어 꾸리던 하숙집 전체를 자신의 돈으로 살 수가 있었다. 순천의 명당자리 박 장군의 묘, 옆 양지바른 터에 자리한 제법 커다란 집이 녀석의 소유가 된 것이다.     

   이제 일곱 권의 소설책은 나의 과제로 남겨졌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읽어 볼 요량으로 여태껏 그냥 지나쳐 왔다. 그것이 언제 읽힐지는 모른다. 다만 열세 권의 책을 모든 생각을 중단한 채 읽었던 그 겨울이 선명히 남아있는 한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고개와는 모양새가 다르지만 그래도 어느 때고 나의 고개를 넘을 때면 나는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해 겨울 새로운 출발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남동쪽을 향해 조그맣게 뚫린 하숙집의 창문과 우연히 읽게 된 그 소설책, 그리하여 내 스무날 후반에 명료하게 전해져 온 소설의 힘과 거기에 있는 다음 글귀를 말이다.<자, 이 고개를 멋지게 넘어야지.> 1998. <끝>)     


그리고 올해 2008년, 마침내 ‘대망’, 이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마지막장을 읽어낸 것이다. 한 편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 21년이란 기간이 내 인생 안에서 소리 없이 씨줄날줄로 엮어진 것이다. 자그마치 21년. 그때 태어난 아이가 며칠 전 성인식을 치른 세월이 된 셈이다. 이 소설을 읽기까지 나도 성실한 독자로서의 성인식을 치러 낸 것일까...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는 일간지에 이 소설을 18년에 걸쳐 기고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얼마 후의 일이었다. 긴 시간을 오직 이 소설에 매달렸다. 전후 일본사회는 피폐해졌고 절망과 공허 속에 뒤덮여 있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정신적 공허감에 사회 전체가 가라앉아 있었다.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회의가 사회 내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고 무기력했다. 그는 전후 일본인들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희망과 꿈이 무엇보다도 절실함을 느꼈다. 그는 소설을 쓰기로 했다. 참혹한 현실을 맞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와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설 제목을 결정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였다. 소설의 주시기가 되는 일본 전국의 전란(戰國시대) 속에서, 그는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통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과 살아가는 목적의식을 보여준다. 아울러 삶의 목적이 한 개인의 안녕에 머무르지 않고 내 이웃의 삶과 연관되고 그것은 통일된 하나로써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이 가치관을 현실에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이것이 이 소설을 이루고 있는 뼈대이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그 실천적 방법으로 ‘자비의 정치’ 즉, 신불(信佛)을 의심하지 않는 ‘불법정치’를 선택한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작가의 개인적인 인생관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어찌 됐든 작가는 불법을 통한 그 실천만이 전국(戰國)의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역설하면서 로망을 마무리한다.      


되돌아보면 21년 전의 그 시절은 완벽하게 잘 지워져 있어서 도대체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를 전혀 가늠할 수 없지만, 가늠할 수 없는 지금, 나는 내가 있는 여기에서 새로운 발걸음을 놓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이 소설이 완독 되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적요 안에서 한 마리 개똥벌레가 깊은, 그 침묵의 공간을 선회하다가 마침내 여린 불을 밝힌 채, 다시 저 우주 어느 곳으로 비행하고자 하는 열망 같은 것이리라. 그 불빛은 내 손끝 조금 가까운 곳에 명증 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2008.6.20.>                                                                                                    

일본 오사카시에서


덧붙임 :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다. 패전으로 인해 일본전역을 뒤덮고 있는 정신적 피폐와 공허함을 극복하고자 야마호카 소하치는 소설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완성했다. 그는 도꾸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을 통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패배로 인해 희망을 잃고 있는 일본의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적중했고 이러한 그의 뜻은 18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전후 복구를 위해 힘을 모으고자 하는 일본열도의 염원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 즉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삶의 실천적인 방법과 그러한 삶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을 떨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을 뿜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 소설이 주는 이 같은 강한 공감 속에서 늦게나마 또 하나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즉 이 소설이 극복해내고자 했던 태평양 전쟁의 패배에 따른 일본사회의 피폐와 정신적인 공황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의 일제통치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삼십 육 년 동안 우리나라를 통치했다. 일본의 지배 하에서 국가로서의 기능이 마비된 우리는 그들의 탄압과 통제로 우리의 주권 모든 것을 상실했다. 일제 삼십오 년 동안 무려 약 사백 여만 명의 우리 민족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백육십여만 명이 강제징용 당했고 삼십여만 명의 여인들이 위안부나 정신대로 끌려갔으며, 학도병을 포함하여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이들이 사십여만 명이 되었다. 이렇게 수많은 인명적 피해와 더불어 일제치하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우리의 모국어를 사용금지 당하고, 우리의 성씨를 개명당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으깨졌다. 자주독립을 꿈꾸었던 독립의 항쟁은 더 이상 우리의 삼천리 산하에서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우리의 강토에서 우리 민족의 존재에 대한 희망과 꿈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자주독립을 향한 민족의 꿈은 만주와 연해주와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은 뜨거웠지만, 우리 조국의 자주독립은 요원했다. 우리 민족은 삼십오 년 동안 일본에 의해 철저하게 말살되었던 것이다. 이 일본이 스스로 자행한 침략전쟁으로부터 패망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독립을 회복했다.    

  

패망한 일본이 전후 복구를 위해 일어날 즈음 이 소설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작으나마 힘차게 솟구쳐 올라 일본인들을 결속시켰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도 이 소설을 읽었다. 심지어는 한 번쯤 꼭 읽어보아도 될 소설이라는 뒷말이 꼬리를 달았다. 그래서 많은 우리들이 읽었고, 나도 거기에 들어섰다. 삼십육 년 동안 우리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린 일본이 패망하고서 재기를 꿈꿀 때 이 소설이 일본사회에 적잖은 힘이 되었다는 논리는 호소력을 갖는다. 그런 이 소설이 결코 어렵지 않게 우리들에게, 나에게 읽혀 적잖은 흥미와 감흥을 불러일으킨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쓸쓸하다. 먹먹하고 아프다. 딴은 이렇다.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가 소설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지향하는 바인 그것, 삶의 목적이 한 개인의 안녕에 머무르지 않고 내 이웃의 삶과 연관되고 그것은 통일된 하나로써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음을 역설해서 공감을 주는 그 넓이보다는, 우리의 기억에서, 내 기억에서 서글프게도 흐르는 시간만큼 희석되어 가는, 허지만 역사에 선연하게 찍혀있는, 그 지독한 일제치하에서 온몸으로 절규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잊을 수 없는 넓이가 더 크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여 바람이 있다면,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가 탄생시킨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일생을 통해 꿈꾸었던 이상향이, 끊임없이 일본과 일본인과 일본사회에 어필되어, 일본사회가 개인의 안녕이란 내 이웃의 그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정녕코 분명히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리라. 아울러 이 소설을 읽었던 우리들과 나도 안녕(安寧)이란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함을 언제나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리라. <끝>    (2008)


<일본에서, 어느 거리에 평화롭게 비는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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