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하고 싶은 현실을 마주하기
To Leslie, 원제도 그대로 레슬리에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레슬리만 보여주고 따라다닌다. 레슬리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왜 레슬리에게로 다시 향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데 꼭 레슬리가 레슬리에게 같은 느낌이다.
레슬리는 심한 알코올 중독이고 월세를 못내 집에서 쫓겨나서 거리를 배회하다 어린 아들 집으로 향한다. 술을 끊지 못하는 레슬리는 결국 다시 아들에 의해 절대로 가고 싶지 않던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실려간다.
그녀는 알코올을 끊을 의지도 없어 보이고 아들 친구의 돈을 몰래 훔쳐서 술을 마시고 나는 아니라고 발뺌하는 모습이 뻔뻔하면서 철이 없는, 무게가 전혀 없이 떠다니는 무중력 상태의 삶을 이어간다. 친구에게서 동네 사람에게서 비난받는 것이 일상이고, 그럴 만큼 술을 퍼마시고 다니면서 인사불성 상태를 유지한다.
6년 전 그녀는 복권에 당첨되어 엄청난 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때 아들이 13살, 현재 19살... 그 동안 술을 마시며 돈을 탕진한 것이다.
아들은 아직 미성년인데 건물공사장에서 몸으로 하는 거친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살아간다. 부모와 자식 간은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연상될 만큼, 레슬리는 부모와 맞지 않아서 결별하고 또한 그들을 닮아 매사 반듯한 아들과도 불통이다.
소통의 깊이가 사랑의 깊이는 아니다. 그녀는 아들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사무쳐한다. 전화를 들었다 내려놓고 음성녹음을 남기며 사랑한다는 말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그녀는 참 가녀리고 약하다. 그러면서 술을 마시고 거리를 떠돌게 되고 따뜻한 누군가가 그리워 술에 취해 남자들을 유혹하기도 하지만 매번 실패한다.
가족 그리고 같이 성장한 친구와도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술 취한 채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형편으로 그녀는 상당히 뻔뻔해 보이지만 취약한 자신을 맨 정신으로 보기 힘들어서 술을 마실 것이다.
엄청난 돈을 술로 탕진하고 나서 수습이 되지 않으니 아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홀로 떠난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바로 볼 용기가 없어 어쩌면 무책임하게 아들을 친구집에 맡기고 그 상황을 피해 달아났다가 갱생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와서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그녀의 분노와 외로움이 깡마른 몸에서 뭉게뭉게 피어 나온다.
수치심에 대하여
레슬리에게, 제목이 주는 것은 우리 안의 레슬리에게 보내는 편지는 아닐지 짐작해 본다. 그녀가 가진 수치심으로부터 내 안의 수치심이 건드려지고 영화를 보는 내내 사실 유쾌하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자극되는 내 안의 모습을 보기 싫은 까닭이다.
수치심은 부끄러움, 당당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 타인에게 들키게 될 때 느끼는 정서다. 온전히 나로서 드러내지 못하는 불편한 불협화음의 원초적 감정이고 누구나 밑바닥에 일정 부분 고여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기준에 못 미친다고 느껴질 때, 그 비밀이 드러날 때 우리는 그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스멀스멀 그것이 다가오고, 레슬리라고 이름 붙여진 우리의 수치심에게 보내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치심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에 대한 구체화와 함께 인정하면 된다. 함께 하기 싫지만 피하지 말고 사랑해줘야 한다.
레슬리의 방식은 술 취함으로의 도피다. 현실을 맞닥뜨리지 않고 바라보지 않으면서 숨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안전장치 하나 없이 피폐하게 내몰린다.
그러다 레슬리는 늦은 밤 바에서 들려오는 노래에 문득 공명한다. 그리고 술을 끊는다. 각성의 계기는 우연처럼 아주 가볍게 오고 그 밤 이후부터 술 마시는 것을 중단한다. 어느 날 노래가 날아들었지만 내적 동인은 아들에게로 가는 길이다. 술을 끊어야 아들을 만날 수 있으니...
그리고 '스위니'라는 남자가 그녀 곁에 있다. 그저 홀림이든, 내쳐버릴 수 없는 동정이든 스위니는 자신의 오지랖에 한탄하면서 레슬리에게 손을 내민다. 불가능해 보이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손을 내밀어 주는 그에 의해서, 오랫동안 버려진 가게에 작은 식당을 열게 된다.
영화에서는 나름대로 개연성을 갖추고 있지만 따져보자면 스위니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모텔 운영을 도와달라는 로열의 요청에 따라 적은 보수로 기꺼이 함께 해오고 있고, 떠돌이 개와 같은 레슬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불행한 레슬리, 아무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는 레슬리는 여러 번의 행운을 거친다. 복권, 스위니, 아들...
그래서 영화가 비현실적이고 영화적인 뻔한 결말을 보여준다고 하기에 레슬리의 외로움과 불편함은 흡사 다큐처럼 리얼했는데 그에 비해 결말은 가볍고...
어쩌면 레슬리가 우연처럼 노래가사가 들려와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듯, 우리에게도 이런 작은 인연들이 선물처럼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저 스쳐 지나가며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 우리 주변의 기적들은 많지 않았을까? 이것이 원래 현실일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을 잡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합리적인 태도로 영화를 바라본다면 뭔가 이질적인데 그것을 다시 들여다보면 잘 보려고 선을 그어서 이렇게 저렇게 나누고 분류하는 무의식적인 내가 있는 것이다. 그 닫힌 시선을 열어보고 원래는 항상 열려있었을 세계에 대한 재인식을 해보면 어떨까?
내가 넘치도록 가지고 있으면서 무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남들은 나에게 부럽다고 말하는데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내 주변에서 편안하게 나를 돕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부족하다고 생각되고 있는 내가 이미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으로 인식되지 않지만 몸으로 감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집착처럼 잡고 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실패는 무엇인가?
내가 변한다는 것은 나에게 없는 것을 배양시키고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가깝고도 먼 거리의 여행, 그것들은 대개 소박하고 늘 있어왔던 것이기에 의식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