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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나로 Oct 17. 2023

욕망이라는 이름의 수레바퀴

거스를 수 없는 속도 위에서

 중년이라는 시기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향에 대한 전환 내지는 달려온 속도에 대한 고려를 고민해야 하는 때이다. 100세 시대에서 120세를 이야기하는 요즘이니 남은 시간은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길게 남아 있다.  젊은 시절 또는 그 이전 학생의 시기부터 열심히 달려 사회에 적응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고 성공 지향 또는 책임의 일방향성에서 성숙해 가는 과정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려놓을 것들은 적절하게 내려놓고 받아들일 것들은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성취의 결과보다는 과정에 대한 의미를 뒤돌아 볼 때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말만큼 쉬울까나?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기는 했는지... 그런데 과연 뜨겁게 달렸던 적이 있기는 했었는지를 생각해 보니... 자동으로 뒷덜미가 싸해진다. 그리고 열이 오른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불안해진다. 딸 둘을 키웠고, 심리상담사로 공부하고 일하고, 명상을 해오면서 난 한 번도 만족할 만큼의 성과라고 느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부족하고 더 노력해야 하고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기만 한 데다, 이것도 저것도 그냥 어느 정도로 유지하면서 대충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마당인데...


 달려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아직은 더 달려야 하고 더 뜨거워져야 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손에 잡은 것도 없이 무엇을 놓아야 하나?


 이러고 있으니 자존감은 일찍부터 안드로메다에 날아가 버렸고 우울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스멀거린다. 아직도 달리고 있고 계속 앞으로도 달려야 하는데 몸의 무거움과 마음의 무거움이 발목 잡는다. 이것이 나의 현실이다. 이럴 때는 더욱 힘을 끌어모아 이런 상황을 잊거나 극복하기 위해 다시 뛰어나가는 것이 의심할 바 없는 진리와 같은 삶의 추동력이었다. 마음먹은 만큼 여전히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더 힘을 내서 더 뛰어다니며 앞으로  향하고 있는 듯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멈추지 않고 도는 수레바퀴 위는 제자리 뛰기일 뿐인데, 열심히 뛰면서 마약처럼 무언가 하고 있는 듯한 뿌듯한 느낌을 만들어 내어 더욱 힘차게 발을 구르게 만든다. 그렇게 끊임없이 구르다 문득 멈추게 되는 지금과 그 사이는 불안의 자리이다. 


 고지를 점령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구르는 바퀴라는 것을 머리로는 확실하게 알기는 하지만 아직 마음은 완전하게 승복하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살았던 삶이 중요한 것이고 그것에 우열을 가리는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여태 구르던 습관 때문에 저절로 불안해지고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지 않을 수 없었고 불안을 피하지 않고 그 멈춤의 불안을 열심히 들여다보려 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내 안에서는 계속 들려온다. 나는 그럴듯한 성공한 삶과는 거리가 멀고 부족하다고 계속 속닥거린다. 더 열심히 나아가라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

 끝이 없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달콤함에 속아서 계속되는 달리기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더 이상은 안된다고 저절로 멈추게 하는 마음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우울이 있다.


 우울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살아왔던 삶이 과연 어떠한지, 제대로 살아왔는지를 점검하게 만들고 욕망의 수레바퀴에서 내려오게 하는 동력이 되어 준다. 그래서 예전보다는 자주 묻게 되는 것이다. 요즘 어떠냐고? 행복하냐고? 어느 지점을 향해 달려왔는데 그래서 너는 행복하냐고? 그 답을 우울은 알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하고 뛰지 못하게 머리채를 잡고 그래서 불안은 더욱 커지지만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철들고부터 불안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남들 타인의 시선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왔고 그 시간 동안 수레바퀴를 구르면서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에서 주어지는 보상 내지는 쾌락에 취해가며 내 존재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하게 지금의 나는 어중간하게 무엇하나 이룬 것이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다. 더 자리를 잡아야 하고 더 확고하게 알아야 하는데 나는 계속 부족하기만 하다. 그리 똑똑하지도 않고 그리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해본 적도 없어서 어중간한 이 초라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런 상태는 끝도 없이 지속될 것이기에 결국은 두 손 두 발 들고 삶에 몸을 맡겨야 하고 그런 때가 도래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을 해야 한다.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글쎄... 쉽지 않다.



 흐름에 맡기는 것,  불교 수행의 단계에서 '흐름에 든 자'를 수다원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길을 거대한 강으로 비유한다면 그 강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흐름에 들기 위해서는 내가 유지하고 있었던 힘을 풀고 물에 몸을 맡겨야만 강의 흐름을 타게 된다. 이 가운데 내려놓음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잡고 있었던 힘을 풀지 않고 허우적 댈수록 돌덩이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릴 테니. 수영할 때 힘을 풀고 물에 몸을 맡기면 저절로 뜨게 되는데 오히려 죽을까 봐 힘을 풀지 못하고 물을 먹으며 가라앉았던 경험과 비슷하다. 힘을 풀고 맡기기까지의 그 간극 사이에는 죽음의 공포가 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단 한 번의 통과의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에게 끊임없이 요청해 오는 것에 응답해야 한다. 지금 현재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지질하던 비루하던 이제는 그냥 되었다는 것, 이만하면 그런대로 괜찮지 않냐고 인정하는 것, 그 사이사이 불안과 죽음의 감각이 도사리고 있다.






내가 헛되이 갈망했던 것들과 내가 이미 손에 넣은 것들,

그것들을 내려놓게 하소서.

내가 일찍이 거부하고 무시했던 것들을

진실로 소유하게 하소서.


그때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꽃이 그토록 가까이 있음을,

또 그 꽃이 나의 것임을,

그 완벽한 향기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아나는 것임을

                                                            - 타고르의 기탄잘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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