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캠프 말입니다
같은 상황, 다른 반응
"난 가기 싫어. 언니만 데리고 다녀와. 난 할머니랑 있을게."
영어 영상과 책을 꾸준히 봐왔으니, 집중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영어캠프에서 단어 암기도 하고, 문법과 라이팅을 공부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나의 제안에 1호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2호는 반대했다. 하루종일 영어를 배우는 것도 싫고, 학교를 오랫동안 빠지는 것도 꺼려진다고 했다. 평소에는 아이가 원하지 않는 것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교육관을 고수해 왔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6학년 겨울방학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 수학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았고, 심적으로도 바쁠 것 같았다. 영어캠프를 시도해 보기에는 5학년 겨울방학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아이들도 3학년, 5학년이라 어느 정도 학습 습관이 잡혀 있고, 이제는 도전해 볼 만한 시기였다. 이번엔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해외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는 것도 처음이었고, 3개월 가까이 체류하는 일정도 처음이었다. '하루 종일 영어를 공부한다고 질리면 어쩌지? 가서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커졌다. 억지로 가게 된 2호가 마음에 걸렸다. 낯선 해외에서 '영어에 몰입하는 시간, 효율성과 가성비를 따지며 이 선택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 건 과연 나의 입장이 아니었을까?' 캠프 시작이 다가올수록, 내가 했던 선택이 정말 옳았는지 확신이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요일 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해 그랩을 타고 콘도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콘도 로비에는 아무도 없어 당황스러웠지만, 잠시 후 직원을 만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다음날 늦은 오후, 영어캠프를 진행하는 학원에 레벨 테스트를 보러 갔다. 오래된 학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낡은 시설이 살짝 실망스러웠다. 아이들이 테스를 보는 동안, 원장선생님의 설명을 듣기 위해 교실에 들어갔는데, 공간이 협소해서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첫 방문에서 아이들의 표정은 덤덤했다.
아이들의 등원 첫날 아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배웅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2호의 반응이 얼마나 부정적 일지, 그때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하원 시간이 되어 긴장된 마음으로 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밝았다. 1호는 너무 재미있었고, 2호도 나름 재미있었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은 교재를 꺼내 들고 오늘 배운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기 바빴다.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공부를 영어로 해낸 것이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심했고, 남편과 나는 조금은 과한 리액션으로 아이들을 격려했다.
낯선 도시에서, 일상 만들기
아이들에게는 하루도 빠짐없이 숙제가 있었다. 매일 단어 10개씩 암기하는 것과 예문 만들기였다. 영어 라이팅을 처음 해보는 아이들이 과연 예문을 만들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처음에 2호는 파파고로 단어를 검색해 예문 숙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자, 짜증을 부리며 엄마가 직접 해보라며 투덜거렸다. 못하겠다고 선생님께 직접 말하라고 하자, 시간이 꽤 걸리고 씩씩거렸지만, 결국은 스스로 했다. 반면, 1호는 혼자 골똘히 생각하며 노트에 적어나갔다. 처음에는 10 문장을 쓰는 데 거의 2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걸려 당황스러웠는데, 언젠가부터 30분도 안 돼서 10개의 예문 만들기와 단어 암기를 모두 끝냈다. 역시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단어 시험을 준비하는 방식도 두 아이가 달랐다. 1호는 작은 소리로 중얼중얼 외우고 나서 나에게 책을 건네며 단어를 불러달라고 했다. 반면, 2호는 단어를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더니, 다 외웠다며 책을 덮었다. 아이들은 마치 개미와 베짱이를 닮았다. 1호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아이였고, 2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2호가 학원 숙제를 잘해갈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숙제를 안 해도 학원에 잘 가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호는 하루도 빠짐없이 해갔고, 더 놀라운 점은 단어를 순식간에 암기했다. 그동안 집에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 몰랐었나 보다. 의외로 2호는 암기력이 뛰어났고, 성실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학원을 다니면서,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아이들이 학원 차량에 오를 때 배웅한 후, 나는 혼자 아침 산책을 즐겼다. 남편과 함께 업무를 보고 점심을 먹은 후, 하원 시간이 되면 마중을 나갔다.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은 뒤, 아이들과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 시간이 되면 학원과 국제학교가 끝나는 시간이어서 수영장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와서 같은 학원을 다니게 된 7살, 초5 남자아이들과 친해지며 매일 함께 놀았다. 비가 오지 않는 한, 아이들은 매일 3~4시간씩 수영을 즐겼고, 저녁을 먹은 후 숙제를 마치고 자유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은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 후 수영을 하는 건강한 생활을 유지했다.
아이들의 반전
2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기 매일매일이 정말 재미있고, 학교보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좋아. 영어캠프 다음에 또 있어? 여름방학에도 올 수 있어?" / 1호의 말
"영어학원 진~짜 좋아. 우리 여기 더 오래 있다가 가면 안돼? 영어학원 생각하면 행복해져. 밥도 맛있고, 너무 재밌어." / 2호의 말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이야. 그 순간은 정말 감격스러웠다. 남편과 조용히 눈을 맞추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아이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영어캠프를 찾아낸 게 바로 나라며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이들이 학원에 적응한 후, 배드민턴, 테니스, 수영 등 한국보다 저렴하게 개인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배드민턴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2호가 "배드민턴 배우는 시간만큼 영어학원 시간을 늘려줘."라는 생각지도 못한 답을 했다. 어느새 2호는 영어학원에서의 생활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었다. 할머니랑 한국에 있을 테니 다녀오라고 했던 아이였는데... 이렇게 행복한 반전이 있을 줄이야.
학원 선생님들은 대부분 말레이시아인이었는데, 몇몇 선생님들은 한국어도 할 수 있었다. 한국 드라마에 빠져 한국어를 공부했다는 선생님들을 보며 한류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4개 언어(말레이어, 영어, 한국어, 중국어)를 구사하는 선생님들을 보며 아이들은 다개국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로 인해 아이들은 다양한 언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내가 이전에 학교 공부보다 여러 언어를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나는 듯했다.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
영어캠프의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아이들은 점점 더 아쉬워했다. 2호는 심지어 치앙마이 여행을 계획한 10일을 취소하고, 학원을 더 다니게 해 달라고까지 했다.
"학교 그만두고, 여기 계속 다니고 싶다. 그치, 언니?"
"어어, 완전! 여기가 훨씬 더 재밌지?"
방에서 아이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선택은 대성공이었다.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 캠프에 가기 전, 2호는 영어를 하루 종일 배우고, 낯선 환경에서 영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영어로 말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점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선생님들도 학교 선생님보다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영어로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도 쉽게 해 나가는 자신을 보며 재미와 성취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어에 대한 흥미와 즐거움을 찾게 된 것이다.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