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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Jun 29. 2023

글자를 옮기는 사람 | 다와다 요코





짧은 미국 생활 동안 읽을 종이책을 캐리어에 잔뜩 골라 담았더니, 엄마는 언니 책도 있고 e북도 있으니 딱 세 권만 들고 가라 말했다. 그중 한 권인 이 책은 아무래도 완전히 낯설진 않더라도 생활 언어로서는 익숙지 않은 땅으로 가는 만큼, 번역하는 사람이 일을 하는 내내, 어쩌면 일을 하지 않을 때에도 느낄 어떤 종류의 답답함, 무력함, 희열과 기쁨에 대한 감상과 단상이 궁금해질 것 같아 골랐다. 120페이지 분량의 작고 얇고 가벼운, 시집 같은 책이기 때문에 시집과 이 책을 합쳐 한 권으로 퉁쳐 네 권을 가져가겠다고 하니 엄마가 웃었다.



아무래도 종이책이 가진 냄새, 사각거리는 소리, 판형에 대한 시각적 정보, 무게나 손에 감기는 감각적 여러 요소가 주는 만족감을 가져다주기엔 e북은 영 아쉬운 구석이 많지 않은가 생각한다. 간편식이 더욱 발달해서 우주식량 같은 형태로도 모든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하고 미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세상이 오더라도, 갓 지어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견딜 수 없는 향을 풍기는 정갈한 밥상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꼭 남아있지 않을까? 종이책도 e북에 어떤 자리 한켠을 내어주고는 있다지만 완전히 쓸모를 잃어 소멸해버리는 일은 오지 않을 것 같다. e북의 편리함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막상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오로지 나의 풍요를 위해 읽는 책은 아무래도 종이로 된 편이 더 만족스럽다. 재학시절 과제를 위한 책을 읽을 때는 e북의 검색기능에 잔뜩 기댔고, 심지어 너무 바빠서 읽을 시간이 나지 않을 땐 밥을 먹거나 이동하는 시간에 들을 수 있게 낭독해주는 기능도 꽤 자주 활용했었는데. 직접 사람이 녹취한 음성이 아니라, 활자를 인식하고 그를 마치 번역기와 같은 딱딱한 음성이 읽어주는데, 진지한 내용의 책일수록 우스꽝스러워지기 일쑤였다. 쓰면서도 이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도 잠깐 상상해보긴 했지만.. 그럴듯한 퀄리티를 기대하고 눌러봤다가 실망하고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소설은 서술 주체인 '나'의 생각의 초점이 시시각각 변하고, 소설의 말미에는 그의 긴장감 가득한 꿈을 엿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야말로 산만하고 혼란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간단치 않은 내용에 겁을 먹어 책을 덮어버리게 만드는 종류의 소설은 아니다. 비록 '나'는 특수한 배경에 놓여있지만, 어떤 종류의 난관에 부닥쳐 초조함을 느끼거나 시간에 쫓기거나 자신의 단점을 스스로 부각하며 괴로워하는 등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내면과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던져졌을 때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못하고 언어 사이에서 부유하는 듯한 기분을 한 번이라도 느껴봤다면 짐작할 수 있는 감정을 다룬다.



출발어를 완벽하게 1:1로 옮길 수 있는 번역은 불가능에 가깝고 대화도 마찬가지이다. 발화자의 의도를 완전하게 해석할 수 있는 수신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때로는 발화자 자신도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런 관점은 언어를 매개로 한 어떠한 소통에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전제가 된다. 그런 맥락에서 번역은 변신이 된다. 이미 한 쪽의 입과 손을 떠난 언어는 도착할 때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번역이란 것이 '건너편 강변에 건네는 것'이라면 '전체'쯤은 잊어버리고 이렇게 작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번역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변신 같은.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선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분명히 서투른 번역가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몹시 무서울 때가 있다. (23쪽)






가능한 읽는 내내 완벽하게 줄거리를 파악하고 싶었고 주인공 '나'의 생각의 흐름을 주도권을 가진 채로 이해하고 싶었으나 소설 허용적 사건의 나열이 반복되고, '나'가 번역하는 소설의 파훼된 문장과 단어들이 전체 전개의 흐름을 자꾸만 방해하며, 주인공의 자기 고백과 감정이 위태롭기까지 해서, 이 소설을 온전히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멈추고 시를 읽듯 읽었다. 예를 들면 초조와 막막감을 참 가지각색으로 서술하는데, 신체의 이상으로 징후가 나타나기도 하며 고정된 공간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것으로 묘사되거나, 책임감에 짓눌렸을 때 느끼는 불안과 위협을 인물로 형상화하기 때문에,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나'가 실제로 마주한 사람인지, '나'의 환시인지, '나'가 번역하는 소설 속 인물인지, 그저 '나'의 비유가 뛰어난 편인 건지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며 수월한 독서를 계속해서 방해한다. 내 생각이 개입할 겨를도 없이 주인공의 말들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옮기는 과정만 거쳐도 바쁘다. 독서할 때 느껴지는 막막함이 있는데, 소설에서 그런 기운을 느낀 건 퍽 오랜만이었다. 조금 간격을 두었다가, 세상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 좀 더 축적된 후에 재독하게 되면 감상이 꽤 달라질 것도 같다. 독서 편식이 심한 편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그 사람의 다른 책을 가지 치듯 파고드는 편이어서 그런지 새롭고 낯설고 시도적인 글에 면역력이 좋지 않은 듯하다, 짧은 소설인데도 완독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읽다 너무 어려워서 도중에 완독을 망설였던 여러 책들이 생각났다. 내용에 대한 것뿐 아니라 소설적 시도, 작가의 생, 나의 독서 생활 전반에 대한 점검을 해보게 만들었던 좋은 책. 







단어들이 이어지지 않은 채 원고지에 흩어졌다. 모두 이어서 문장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생각만 들고 거기에 필요한 체력은 최소한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체력보단 폐활량이 모자랐다. 하나의 문장을 천천히 숨을 쉬며 읽고 거기서 꾹 하고 한 번 숨을 멈춘 다음 머릿속에서 뜻을 풀이하고 어순을 정리할 것, 그리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면서 풀이한 문장을 쓰는 것이 요령이라고 번역가 에이 씨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어 하나를 읽는 데도 숨이 차서, 힘들어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다음 단어에는 거의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적어도 나는 단어 하나하나의 낯선 감촉에 충실한 편이고 지금은 그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너편 강변에 던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체를 다 생각할 여유는 없다. 전체는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23쪽)




나이가 들어서 이제 못 걷는다고 말하면 뭐라고 대답할지도 생각했다. 길이 좁아지더니 걱정했던 대로 결국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왔다. 작가는 호흡이 빨라졌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나는 그것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의 서두처럼 들려서 흠칫 놀랐다. (...) 아무래도 목이 좀 마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물통을 잊은 일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았을 터였다. (35쪽)




"저는 어떤 역할도 맡고 싶지 않아요. 저는 번역자니까요." 하고 발뺌해도 그때만 괜찮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정말이지 번역은 내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나는 번역을 완성하고 싶지 않다. 완성하고 싶지도 않고 당연히 도중에 그만두고 싶지도 않다. 질질 끌면서 하는 것 외에는 묘안이 없다. (45쪽)




"경험은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수기 위해서 있잖아요."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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