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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Jan 14. 2023

계절 불문 추억은 맛이 좋지만

왜 특히, 하필 여름이 제철이냐면


반팔과 민소매의 계절은 내 팔찌들에게 쉽게 소매 자리를 양보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름 옷들은 레이어드 해서 입기 어려우므로, 그 지겨움과 단조로움을 달래주는 건 역시 내 귀여운 팔찌들이다. 실이나 가죽, 원석과 비즈로 이루어진 물성 주위로 크고 작은 의미들이 다닥다닥 붙은 것들을 아주 사랑한다. 추억이라는 태그를 달고 있는. 지구의 여러 경계를 흐리며 이곳저곳에서 내 팔로 한데 모인, 가진 물건들 중 정말 아낀다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 



가진 전부를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우니 이번 여름에 특히 가장 잘 착용했던 것들만, 겨울의 복판에서 소개해보려고 한다.





귀여운 물고기, 사과, 꽃이 각인된 이 팔찌는 e가 태국에서 사 와 선물한 것이다. 그때 e와 나는 베트남과 싱가폴을 연달아 함께 여행했고, 계획했던 대로 싱가폴 공항에서 헤어져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e는 바로 태국으로 혼자 또 여행을 갔었는데 그때 e가 이것을 사들고 왔다.


e는 물건을 쉽게 잃어버리고, 아끼는 것이어도 원치 않게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다. 함께 베트남 여행에 갔다가 강둑에서 핸드폰을 물에 빠뜨려 동네의 사려 깊은 현지인분이 습기를 제거해 주겠다며 사택 쌀독에 폰을 넣어주신 적도 있고, 결국 베트남에서 핸드폰을 구입한 어마어마한 에피소드를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이 팔찌도 내게 줄 것과 똑같은 것을 사 와서, 함께 e의 기숙사 방에서 같은 침대에 누워 팔을 들어 맞대 셀피를 찍어 기념까지 했지만, 현재 이것을 갖고 있는 건 나뿐이다. 


반면 나는 물건을 웬만해선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 잔뜩 껴안고 간직하는 편이고 이것도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간직해서 쓰고 있다. e가 매번 내 그 잃어버리지 않음에 대해 그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진심으로 이야기할 때가 있는데, 이건 20살 때 만나 지금껏 아주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나와 전혀 닮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게 내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놀라운 일도 아닌 게, e는 내 졸업전시 기념으로 자신은 세모, 나는 동그라미가 새겨진 금팔찌를 내게 선물했는데, 그 단단하고 값비싼 우정을 아로새긴 팔찌를 손쉽게 잃어버렸다.. 자신을 어이없어하며 실토하는 e의 표정이 얼마나 웃겼던지. 그래도 내가 선물한 것을 잃어버린 적은 없다. 그래서 나는 e가 잃어버리지 않게 부러 큰 걸 선물해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 팔에 주렁주렁 매달만한 팔찌들이 많이 생기고 나서, 그리고 그것을 어울리게 매치할 수 있는 눈이 생기고부터 더 즐겨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비즈를 꿴 안쪽의 끈이 시간이 지난 만큼 삭았을 것이고, 언제 끊길지 몰라 애지중지하다 보니 그리 자주 쓰지는 못한다. 팔에 낄 때도 손을 최대한 오므려 팔찌에 큰 변형이 생기지 않게 아주 조심해야 한다. 조만간 튼튼한, 탄력 있는 실을 사다 바꿔야 한다. 서울에 잠시 갈 때마다 동대문에 잠시 들러 재료를 사겠다는 결연한 계획을 세우곤 하는데, 역시 여름엔 너무 더워 그 계획이 도통 실행되질 않는다.


이걸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물론 동글동글 저마다의 색을 가진 원석과 은색의 조화가 맘에 드는 탓도 있지만, 물고기 몸통 옆에 방울이 달려있어서 내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작은 소리를 만드는 데, 이게 가장 흡족한 부분이다. 나는 발소리를 크게 내며 걷지 않고, 목소리도 작은 편이고, 살면서 으레 날 수밖에 없는 소음마저 참는 때도 있는데, 그런 강박을 가뿐히 우습게 넘어가 주는 팔찌이기 때문이다. 정적을 가로질러 나와 내 지척에 있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요란함을 능청스레 자아내는 점이 좋다. 그건 조금 e와 닮았고 나는 정말로 이 팔찌를 차는 내내 e 생각을 한다. 정말 명랑하고 아주 반짝이는 e를.





20세, 21세의 내 모습을 떠올릴 땐, 묘한 촌스러움에 몸서리쳐질 때가 많다. 자기 선호의 윤곽이 명확하지 않아서 어쩐지 나라는 사람의 가장자리가 희뿌옇게 느껴지는 때였지만, 지금도 여태 남아있느냐 하면 잘 모르겠는 꽤 괜찮은 면들도 많았던 건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 팔찌는 피렌체 가죽거리에 갔을 때 구입한 건데, 당시 만나던 사람에게도 주기 위해 같은 디자인으로 하나 더 구입했었던 것이다. 같은 색으로 하지 않고 굳이 다른 색으로. 그리고 그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어두운 고동색이었는데, 실은 그것이 내 취향에 더 가까웠던 걸 당시에도 알았다. 그래도 그 사람에게 더 어울릴 것 같으니까, 그리고 더 좋아할 것 같으니까 더 예쁜 것을 양보하는 사소한 사랑스러움을 그때의 나는 갖고 있었다. 퍽 촌스럽게 애정을 분출하는 법을 알았다. 회수하지 않아도 아쉽지 않은 작고 조금은 하찮은 관심을.


버렸을까?


이 팔찌는 찰 때마다 구멍에 얇은 가죽을 꿰어 직접 매듭을 한 번 더 묶어야 해서 조금 번거롭다. 10초 남짓한 그 찰나에 잠깐 생각하곤 한다. 그 사람에 대해 지금 유일하게 궁금한 건 그 정도다. 이내 금방 잊고, 풀고 묶을 때 잠깐, 아주 가볍게만.





평소 빨간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특히나 착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더더욱. 가지고 있는 옷들을 옷장을 열어 확인해 보면, 빨간 티셔츠는 세 개, 니트 두 장. 하의는 없고, 그나마 있던 플랫슈즈는 잘 신지 않아 버리고 없다. (이 정도면 좋아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지만 다른 색 옷들에 비하면 적은 편이긴 하다)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고 느낀다. 단번에 시선을 강탈해 버리는, 조금 무자비한 색. 있는 듯 없는 듯한 무채색의 계열도, 수험생의 정신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는 녹색도 아니고 빨간색, 무언가 경고하거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합의된 강렬한 것.


그런 나에게도 일종의 숙원사업 같은 것이 있었으니 당시 좋아하던 가수가 빨간 실팔찌를 자주 착용하고 나왔었는데, 살을 가로지르는 빨간색의 선이 그렇게 매력적여 보일 수 없었으므로, 기필코 나도 자주 착용할 빨간 팔찌를 사리라, 혼자 결연히 생각했던 다짐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빨간 팔찌를 이 잡듯이 찾아다녔지만 영 내키지 않던 차에 언니와 유럽에 갔다가 발견하고 샀던 것이다. 그 가수의 것과 디자인은 전혀 달랐는데 어찌 되었건 내 뇌에 입력된 수행 과제는 오로지 그것이었다. 일단 빨간빛을 띠고 마음에 든다면 그 팔찌를 살 것.


이건 구입한 가게의 인상이 너무 희미했기 때문에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마 관광객 타겟으로 즐비하게 이어진 가판대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것을 구입했던 것이리라. 작년에 서랍장 잡동사니를 정리하던 중, 액세서리 함에 분류해서 넣어두지 않고 책갈피나 뮤지엄 팜플렛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끼워져 있던 이것을 발견했다. 마치 선물 받은 기분이었는데,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색이 바래있었고 그것이 꼭 맘에 들었다. 


그 가수는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다. 한때 아주 좋아했었지만.





내가 여느 때와 같이 팔찌를 주렁주렁 매달고 그간 자주 보지 못했던 n을 만나러 대구에 갔을 때, n은 내 팔찌들을 칭찬했다. "좋네, 개성 있고. 잘 어울려."


n과 함께 대구 시내를 돌아다니다 한 액세서리 가게에 들어가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을 골라주며 이 소원팔찌를 샀는데, 둘 다 낯선 상대에게 수줍음이 많은 탓에 묶어주겠다는 사장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팔을 내맡겼다가 '이거 정말 이러다 평생 못 푸는 거 아냐.' 하는 두려움을 함께 갖고 나와 카페에서 서로의 팔찌를 풀어줬던 게 아주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지.


장난기 많고 단호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해줄 때 문장이 짧지 않고 단락도 긴 n의 이야기를 듣는 건 재밌다. 20살 때 만났고 타지에서 온, 같은 학교 다른 과인 이 소중한 친구는 당시부터 나와 다른 점이 되게 많았고, 나는 그런 n을 퍽 부러워했다. 그는 보통의 스무 살이 그러하듯 으레 교과서나 수능특강 문학 파트에 등장하는 작가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들 말고도 내가 잘 몰랐던 작가들의 책을 참 좋아했고 그의 기숙사 책장에는 책이 항상 많이 늘어져있었는데, 그게 좋았다. 그리고 매번 흥미롭기도 하다. 뭐든 학교에서 일어나는 각종 크고 작은 행사를 전부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고, 어떤 것을 물어봤을 때 항상 예상 밖의 대답을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리고 나는 n이 선물해 준 섬의 애슐리를 계기로 정세랑 작가님에게 푹 빠지게 되었다.


만날 때면 항상 가고 싶은 식당 한 군데를 확실히 말해주고 메뉴까지도 착착 정해 오는 친구인데, 만나기 전날부터 무엇을 먹을지 고심해서 고른다고 했다. 나는 대강 평이 좋은 식당을 열심히 고른 후에 메뉴 선택은 당일의 나에게 미뤄두고 맡겨두는 편이라 이 점을 서로 신기해했고, 나는 n의 방식이 역시 말끔하고 더 좋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n이 골라온, 같이 먹은 김치 튀김이 정말로... 눈물 나게 맛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너 같은 사람이랑 친구여서 이 김치 튀김을 먹을 수 있었다고 말하니 아주 호쾌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말을 걸고 아는 체해야 하며 빨리 친밀감을 생성해야 하는 분들에게는 이 팔찌들이 붙들만한 대화 소재의 동아줄쯤 되는 걸까. 특히 러쉬나 미용실에서 많이 들었다. 놀랍게도 "직접 만드신 거예요?"라는 공통 질문을 다른 장소, 다른 사람에게 들었는데, 매번 꺼벙하게 "앗 직접 만든 건 아니구요 누가 만든 걸 산 거예요"라고 친절하긴 한데 하나 마나 한 대답을 하게 되는 나도 놀랍도록 똑같다. 여튼 이번에 미용실 가서는, 머리 감겨주시는 분이 직접 비즈 팔찌를 만들었다가 부산 휴가 가서 그것을 술 마시다 잃어버렸다는 안타까운 에피소드를 듣기도 했다. 나는 때때로 듣는 사람을 말하게 하는.. 의도하지 않은 능력을 발휘할 때가 있는데, 어느 정도냐면, 러쉬 직원에게 "저희 잘 맞는 것 같아요. 너무 잘 들어주셔서 제 자존감이 올라가는 기분이에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을 정도다... 발화자와 반응자의 위치가 종종 바뀌는 상황을 사실 나는 좋아한다.


이건 자취방 맞은편 건물에 있는 자그만 액세서리 가게에 처음 들어가 샀던 것이다. 아주 조그맣고, 겉보기에는 딱히 취향인 것들이 팔 것 같지는 않아서 그때까진 한 번도 들러보려는 마음도 들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날엔 학교 갈 채비가 유독 일찍 돼서 시간 여유가 있어 들어가 보았고, 그곳에서 본인을 이모라고 지칭하며 살갑게 이것저것 추천해 주시는 친절이 왜인지 귀찮지 않았다. 원래는 옷 가게 주인이나 직원분들의 과잉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고 부담스러워하는 편인데, 이 분은 정말로 액세서리가 예뻐서 이것저것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신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굉장히 흥미롭고 재밌었다. 내 고르는 안목이 좋다고 칭찬도 해주시고, 내가 그때 하고 있었던, 초등학생 때 성당 캠프에서 받았던 비둘기 목걸이를 예쁘다 칭찬해 주시고, 산 팔찌의 끈이 풀어지면 갖고 오라며, 고쳐주겠다고, 그리고 원래 갖고 있는 것들도 고쳐주겠다고 하시는 말씀 등등이 모두 살가웠다. 아, 그중에서, 본인이 전에 만들어놓은 빨간 끈에 코끼리 모양의 은 장식이 달린 팔찌를 보며 스스로 감탄하시는 모습이 정말로 귀여우셨다. 어머머, 이걸 내가 만들었어? 어머, 하시는데 정말로 정말로 팔찌 만드는 일을 좋아하시는 게 느껴졌다. 


그 핸드메이드 액세서리 가게의 사장님과 친해졌었다. 그때 샀던 다른 팔찌들과 목걸이는 지금도 아껴가며 쓰는 것들인데, 그리고 정말로 내 취향에 쏙 들어서 디자인에 아쉬운 점이 단 한구석도 없는데 그 가게가 가지 않던 사이 사라졌다. 검색해도 통 나오지 않아서 이젠 정말로 그 사장님이라면 어떻게 원석과 나무를 조합해서 팔찌에 꿰어 넣으실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면서 내가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소식도 너무 궁금하다. 건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그래서였을까,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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