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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Jan 14. 2023

명랑한 은둔자 | 캐럴라인 냅

고독이 잉태한 솔직함에 대하여




캐럴라인 냅은 고독과 고립을 구별 지어 쓰지만, 완전히 배타적인 관계로 그려내진 않는다. 그 둘의 구별점은 경향성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예컨대 고독은 완연한 안정감을 주는 상태로, 고립은 고독이 침잠에 이르게 되는 파멸적인 상태로 나아간 것으로 냅은 정의한다. 그러면서도 그 둘을 뚜렷한 경계선을 사이에 두어 원할 때 가뿐히 한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간단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이를 구별 지어 현명하게 삶에 적용해나간 작가 캐럴린 하일브런도 그의 나이 60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줄타기를 하는 것이 조금은 가능해졌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내가 그 둘 중 어느 상태에 놓여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이다지도 어렵고 모호해서, 어쩌면 그 둘은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만든다. 


사람은 자기만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늘어놓는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를 파악하는 일은 일단 아주 어렵다. 그래서 사실과 유리된 것을 적고 있다는 인식조차 어려울 수 있다. 감정이나 생각을 뭉뚱그려 넘겨짚거나 크게 유념하지 않으면 타인의 생각, 통상의 감각을 따라가기 바쁜데, 그것은 종종 나와는 다르고 나에겐 틀린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에 빗대어보면 나는 가끔, 실은 자주, 가장 속이고 싶은 건 자기 자신이다. 타인을 속여봤자 그것은 나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오로지 내가 나를 어떻게 인지하고 인식하느냐가 나에게는 실존의 문제고 가장 우선의 과제가 된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다듬어진 형태로 인정받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솔직한 것, 특히나 활자화된 솔직함을 적어낸 글에 무장해제된다. 가감없고 세세한 에세이의 장점은 그것에 있다. 어떤 종류의 해방감을 가져다주는 것. 한편, 작가 자신마저도 자신이 형상화한, 이상화하고 지나치게 미화한 어떤 자아상을 장착한채 훈계하거나, 지나치게 어떤 메시지를 설파하려는 에세이가 있고 그것을 보면 절로 도망치고 싶어지고 그만큼 손도 안 가지만, 어떤 솔직함은 정말이지 예상했던 것을 넘어서기에 되려 또 도망치고 싶어지는데, 냅의 글은 후자다.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함은 핍진성을 구태여 동반하지 않아도 개연성을 충분히 가진다. 글을 작성한 한 사람이 경험한 사건의 내용과 감정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나의 일기는 아니어도 아주 위로가 된다. 그것이 냅의 단상들이 가지고 있는 힘의 요체다. 한 편의 글이 완성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하는데, 내 머리 안에 빙빙 맴도는 어떤 것들을 일차적으로 생각으로 정리하기 위한 한 번의 거름을 거치고, 그다음 그것의 얼개를 짜보는 두 번째의 거름, 그리고 그것을 활자로 표현하는 세 번째, 그리고 퇴고와 감상이라는 네 번의 단계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솔직함은 탈락되기 쉽다. 그럼에도 이런 정도의 솔직함을 탈고한 글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이 있고, 그런 만큼 그런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고 크다. 발화하는 솔직함과는 다르다. 발화의 솔직함은 아직 엉성하고, 불분명하고, 때로는 무례하고, 알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녹음을 하지 않는 이상 왜곡되고, 그만큼 곱씹기 곤란해진다. 꽤나 집중하고 기억하려 해도, 대화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향방이라는 단어가 나의 발음과 주변의 소음에 따라 한방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어도 타인과의 대화는 진행될 수 있다. 말은 아직 성글고 임의적이고, 그래서 말로 표현되는 솔직함은 어느 정도, 그것의 매개적 특성 때문에 글의 묵직함보다는 조금 덜한 구석이 있다. 대화보다 오래오래 남을 수밖에 없는 것에 솔직함을 쏟아붓는 것은 다짐 자체가 다르므로.


이 책에 드러나는 냅의 솔직함의 강도는 전에 읽었던 <젊은 ADHD의 슬픔>을 집필한 정지음 작가의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그는 독자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솔직함을 보여준다. 또한 그 방식에 약간 묻어있는 자조적 유쾌함이 느껴진다. 솔직해서 오해하기 어렵고, 오해받았기에 솔직해지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체념하고, 그만큼 드러내기에 동반하는 두려움에는 어느 정도의 방어적인 유머가 섞여 있다. 그럼에도 지속되는 자신에 대한 또렷한 인지는 타인을 변화시키는 강렬한 힘을 가진다. 그게 나에게는 자기 인지,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더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로 인도하는 중요한 것이 된다. 아래는 냅의 유머 코드를 짐작하게 만들던 부분. 



'... 그래서 수줍음은 세 번째로 흔한 정신 장애로 꼽힌다. 나는 평생 내 머리카락을 당연시하고 산 것과 비슷하게 거의 평생 수줍음과 함께 살아왔다. 내 머리카락은 예나 지금이나 곧고 가늘다. 내가 설령 굵고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을 갖기를 바라더라도, 머리카락의 신들은 내게 그 대신 지금의 이 머리카락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설령 자신감 있고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더라도, 성격의 신들은(유전학자, 뇌 화학자, 환경론자로 구성된 팀인 듯하다) 나를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29쪽)






또한 냅의 글에 짙게 배어있는 주요한 키워드는 중독과 회복이다. 그의 글에는 다종다양한 중독을 경험한 자의 끈덕진 자기 성찰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의 중독들이 비롯된 배경은 완전히 사적이라고 하긴 다소 어렵고 복잡하다.


'우리 문화는 육체적인 측면이 아닌 측면에서도 자신에게 만족하는 여자아이, 자신을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귀한 존재라고 느끼는 여자아이를 길러내는 데 능하지 못하다.' (250쪽)



'이처럼 타인의 우주에서 내가 중심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는 나르시시즘적인 측면이 있다. 허영의 기미마저 있다. 아직도 나는 현실보다 할리우드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사랑의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 (78쪽)



그는, 자기파괴적이어서 강력하고 해롭지만 느리고 불분명한 과정을 통하기에 눈치채기도, 눈치채더라도 중단이 어려운 중독들을 겪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글이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그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이를 직시하고, 수고로움을 견디며 그 중독에서 서서히 발을 빼는 용감한 투사다.



'당신은 경직성을 포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통제력을 잃는 건 아님을 배운다. 자신의 힘을 느끼는 방법에는 좀 더 지속가능한 다른 방법들도 있다는 걸 배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 부담스럽고 위험하게 느껴지더라도 혼자인 것보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나은 일이란 걸 배운다.' (174쪽)



'많은 면에서 실제로 이것이 회복이다. 점진적인 약간의 변화. 이 보 전진했다가 일 보 후퇴하는 것. ...(중략)... 한계를 정해두는 법, 책임을 위임하는 법, 자기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럽게 대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들도 했다. 나는 이것이 회복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영역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뒤로 미끄러지는 것, 이 문제에서는 개선되고 저 문제에서는 제자리걸음인 것.' (179쪽)



'시행착오와 데이터 수집. 이것은 수고가 들고 힘든 일이다. ...(중략)... 그래, 나는 이게 좋아, 개와 함께 숲에 오는 일이 좋아. ...(중략)... 너무 사소한 발견들이 아닌가 싶겠지만(실제로도 사소하다), 그래도 이런 교훈들은 주야장천 술만 마실 때는 배울 수 없고 우리가 견고한 자아 감각을 구축하려면 꼭 필요한 작은 벽돌들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 욕구는 이것이야, 내 특별한 강점과 약점은 이것이야, 하는.' (198쪽)






<젊은 ADHD의 슬픔>과 <명랑한 은둔자>는 조금 닮았다. 고독하고 찬란한 일기라는 점에서. 냅의 모습에서, 자신과의 싸움과 감싸 안기의 틈새에서 울다 금세 물장구를 치며 웃는 정지음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든 자신의 사투와 감정들을 귀 기울여 듣고 적어낸 글은 아주 벅차서 살짝 울게 만든다. 글에 잔잔하게 깔려있는 초탈함과 자신에 대한 이해와 그 수없이 뒤엉키며 울고 웃고 그치기를 반복했을 시간들로 초대된 기분이었다. 이 두 책을 읽을 때 모두.



정지음 작가의 문장들은 단어의 연쇄가 끝이 없고, 에세이인데 문장을 구성한 단어들을 조립한 방식을 보면 수개월 공들여 수정하고 퇴고한 노래의 노랫말 같다. 그런 문장들이 한두 줄이 아니라 대개 그렇게 전개된다. 형태와 발음적 유사성을 매개로 한 한국어의 끝없는 확장성을 본 듯한 느낌도 들었다. 국어사전에서는 ‘유의어'로 뜻이 비슷한 언어를 분류해두지만 그런 차원에 더하여, 의미는 대조될지라도 형태적으로는 유사한 단어들을 다채롭고 다양하게 묘사하는데, 정말 언어 활용의 귀재라고 생각했다. 번역본이 나와 이곳저곳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지만, 한국어의 말맛이 찰지게 표현된 글의 매력이 감쇄될까 염려될 정도다. 작가님이 책이나 문장 하나를 읽어도 다른 생각으로 주의가 튀어 나간다는 자신의 증세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의 일종으로 이런 독특한 문장의 조합과 문체가 탄생한 것 같다. 내용적으로는 집중이 끊기고 산발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그런 글을 전개하는 방식이 형식적으로도 독특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집중을 요한다. 집중을 잃은 사람이 집중을 기해 작성했을 그 모든 궤적이 보인다. 감탄하며 잘 감상했던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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