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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Sep 13. 2022

기억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글을 쓴다

―김행숙『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문학과 지성사, 2020)을 읽고


이 시집을 선택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가 항상 손꼽는 현대 시인이기 때문이다. 쉽지 않다. 전에 김행숙 시집 『에코의 초상』도 몇 편만 읽었다. 이번에는 읽어 내리라 했다. 왜? 왜 그가 손꼽는 시인일까? 궁금했다. 읽으면서 뭐지 뭐지 했지만, 인내했다. 읽고, 읽고… 점점 빠져든다. 각 시에는 무릎을 치게 하는 좋은 이미지, 깊은 사유, 일상적인 것에 상상을 담아내는 자유로움이 있다. 자유롭게 감상해 본다. 그것은 시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고, 시인의 매력을 발견한 좋은 기회였다. 나도 이 시인의 시가 좋다. 읽을수록 좋다. 아주 좋다.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기억에 기대 지나간 시간을 찾아 나를 만들고, 잃어버린 시간을 만든다. 그런데 그 기억은 세월이 갈수록 희미해질 뿐 아니라 잊힌다. 지금의 나다. 어찌 보면 무섭기도 하다. 기억은 나도 모르는 나로 기억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왜곡도 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날 기억하고 싶은 것으로만 구성된 나일 수도 있겠다.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니기’에 이제는 글이 필요하다. 기억의 오류, 그래서 조금씩 글을 써본다. 그렇다면 글은 자신을 왜곡하지 않을까? 글도 포장이 있는데… 그래도 질질 끌려다니지는 않겠다. 그래서 글은 계속 써야 한다. 기억은 끊임없이 앞으로도 ‘내 팔을 질질 끌’ 것이다. 기억은 유효기간이 없기에 종결어미 부재인 '했'으로 끝났다. 죽음에 이르면 '다'가 붙겠지? 이것이 시인의 시의 자유로움이다.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유리의 존재 중에서       


내 안에는 많은 내가 있기에 나를 하나의 모양으로, 또는 몇 개의 문장으로 정의할 수가 없다. 세월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을 느낀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다르다. 그 ‘나’는 내가 알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그 둘 사이에 나도 모르는 ‘유리창’ 같은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살아가면서 그 둘은 충돌하고 때로는 연합하면서 현실을 헤쳐 나간다. 원초적 ‘나’와 보이지 않는 ‘나’는 공존하며 그것이 삶의 방식이다. 다른 사람과 나, 또는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에 유리 같은 보이지 않는 거리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인정하고 ‘창밖에’서 네가 또는 내가 공존하며 살아간다.


 「밤의 층계」를 읽고 후배가 생각났다. 그녀가 느꼈을, 같이 있지만, 따로 있는 소통 부재와 고립감이 ‘달의 인력이 계단을 끌어올려 삶의 바닥을’ 보았을 때와 같이 죽음을 생각하게 했겠지? 사람의 관계도 ‘깊은 밤, 한층 더 깊은 밤, 가장 깊은 밤’이 있다면 나의 밤은 어떤 밤일까? 자신을 들여다봐야겠다.


「밤의 층계」에서 보여줬던 ‘더 깊은 밤’의 사무실은 「일순간」으로 옮겨간다. 문물의 발명과 발달은 사람을 더 편리하게 하는 만큼 더 고립시킨다. 직장 생활은 컴퓨터 진화에 따라 ‘일순간 책상에 검은 머리 떨어뜨리고’ 일을 했고, 할수록 동료들 사이에는 말이 줄고 그저 각자의 ‘삶에 깊이’ 빠졌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은 결국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승강장 안전선 밖’처럼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당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 시인의 화두다.


 매년 「1월 1일」마다 ‘공중으로 날아가는 풍선’ 마냥 소원을 띄워 보낸 시절도 있었다. 비록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놓쳐’ 버리듯 소원으로 끝나 버리지만 ‘작년 이맘때도 구걸하는 자신을 슬프게’ 쳐다봤는데도 ‘오늘 1월 1일’도 그 짓을 다시 한다. 속으면서 매년 ‘구걸’한다. 나의 구걸은 “지금 내 어머니의 입술은 끓는 물 같습니다.”(「한밤의 기도」)와 같이 절실하지 않은가 보다. 내년 1월 1일에는 '끓는 물 같은 입술'로 구걸을 해볼까.


 카프카의 「변신」보다 김행숙의 「변신」에 더 공감이 갔다면 과장된 생각일까? 우리는 ‘변신’을 하지만 완벽한 변신은 불가능하다. 글, 말, 기억에서 그레고리 잠자 모습은 남아 있으니까. “벌레에게 웃음소리가 없다고 웃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라는 말을 항상 염두에 두고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김행숙 시인은 상상력이 무한하다. 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쓴다. 그래서인지 이해하기에 힘든 부분도 있지만 기막힌 진술이 그가 시를 잘 쓰는 시인임을 증명한다. 이 시집의 고독한 한 사람의 존재, 소외는 자주 등장하는 시어 ‘밤’과 조화를 이룬다. 시인은 고독한 사람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다가간다.


시인은 1970년 출생, 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고 미래파 시인의 중심에 있었으며, 시집  『사춘기』『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1914』후 등단 21년인 2020년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출간, 미당문학상, 노작문학상, 전봉건 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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