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이 時代의 사랑』(문학과지성, 1981)은 그가 30세에 썼고, 난 30세를 통과할 때쯤 그 시집에 중독됐다. 절망과 분노, 슬픔으로 가득 찬 시는 마음 바닥까지 긁어냈고 후련했다. 시적 화자(시인)와 삶의 방향은 달랐지만, 그때 화자에 빙의했다, 왜 그랬을까. 감정의 사치나 치기였을까. 그건 분명 아니었다. 그 후 『즐거운 日記』, 『기억의 집』으로 이어지다가 최승자 읽기는 『내 무덤, 푸르고』에서 슬그머니 멈췄다. 시집 속에 연이어 살아있는 불안, 고독, 죽음, 상처뿐인 사랑 등에 지쳤던 것은 아닌지. 육십이 지나 시인은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냈고, 그 나이쯤에 이 시집을 마주한다. 세월의 간격만큼이나 설렌다.
그에게 죽음, 슬픔은 유효기간이 없다. 80년대 보여준 독기와 치열함만 걷어졌을 뿐, 시집에 축축이 남아 있다. 정제된 쓸쓸함과 친숙한 죽음이 시집 전반에 흐른다. 30대와 60대 시의 변화는 마치 부모가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니라, 내가 부모 보호자가 되었을 때 느낌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삼 십 세」(『이 時代의 사랑』)부분
제 나이도 모르던 아이가
환갑을 맞아 그걸
잊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더 아이 같다.
(어느 날 죽음이 내 방문을 노크한다 해도읽던 책장을 황급히 덮지는 말자)
―「환갑」부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넘어가는 고비마다 스며드는 느낌은 다르다. 특히 이십 대를 보내는 삼십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나이로 어느 날 ‘놀라 부릅뜬 눈’으로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은 흐르고 환갑을 맞는다. 환갑까지 살았다는 안도감일까, 죽음이 방문 앞까지 와도 호들갑 떨 필요 없다고 말한다. 죽음과 친숙해진 시선에 안도한다. 30년이란 세월의 힘일 터다.
죽음은 며칠 후에 도착할 친구다. 며칠 후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죽음을 상상하면서 그는 준비한다. ‘마지막 저녁’( 「어느 날 나는」 )을 먹겠다고, 이제는 죽음의 불안도 없다. “가봐야 천국”( 「가봐야 천국이다」 )인 죽음을 기다리는 그를 바라보는 마음도 편안해진다.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다고, 특히 정신병동에서 보내는 세월을 텅 빈 무대 보듯 바라본다. 세월은 “세발자전거 타고” 지나가고, “고장난 하루”( 「한 마리의 떠도는 부운몽」 )가 저물고, ‘물처럼 밍밍하게 멍한 세월이’( 「타임캡슐 속의」 ) 흐를 뿐이다. 치열하고 불행하게 살았던 시간은 텅 빈 시간 됐다. 의미 없는 세월을 쓸쓸히 바라본다.
80년대 그를 후려잡았던 그 아픈 사랑은 어디 갔는가. 세월 속에 묻혔는지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게 박혀 떼어 놓을 수 없는 “그림자”( 「그림자 같은 남자」 )며, “영원”( 「세상 위 백지에다」 )으로 남아 있다. 사랑이 아프다고 철철 피 흘리며 소리치던 그는 사랑을 가끔 꺼내 볼 뿐이다. 더 아픈 사랑이지만, 아름답다.
“보고 싶다”( 「얼마나 오랫동안」 )라고 말하듯, 이제 그가 세상에 기대어 “살고 싶다”라고 거침없이 말하길 바란다. 육십 년 넘게 살아왔는데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명제 앞에는 항상 죽음이 있다. 그는 결국 “빈 배처럼 텅 비어/나 돌아갑니다”( 「빈 배처럼 텅 비어」 )라고 일갈한다. 치열하게 70여 년을 죽음과 함께 또는 맞서 살아온 시인의 통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