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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Nov 13. 2023

유독, 11월은

용인 문수봉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황지우 <11월의 나무> 중에서     


11자의 나목 이미지, 한 해가 소멸하고 있지만 아직 한 달이 남았다는 안도감, 안으로 쏟아지는 마음, 코끝에 와닿은 싸한 공기, 자꾸 고개 숙이게 하는 뒹구는 낙엽, 안 간 힘을 쓰며 나무 끝에 매달린 나뭇잎, 싸늘한 날씨를 통과하는 선명하고 따뜻한 햇살, 김광석 노래 ‘거리에서’가 자꾸 떠오르는 분위기, 대충 11월을 좋아하는 이유다. 뉘엿뉘엿 넘어가며 들녘, 특히 벼 벤 그루터기 사이를 가득 채우는  하루의 마지막 햇빛과 해거름 녘을 마중하는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이 좋다. 모든 감각이 열렸거나 혹은 닫혔거나. 많은 작가의 11월에 관한 시 중 황지우 위 시는 매년 이때 한 번쯤 읽게 된다.     


11월 호사 중 하나는 산행이다. 단풍의 화려함 대신 푹신한 낙엽 위를 걸을 때 나는 소리의 화려함, 모든 것을 떨어내고 가뿐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 걸으면 살짝 배는 땀도 좋다. 이제 나이에 당황하지 않지만, 나이가 주는 몸의 변화는 난감하다. 아주 젊었을 때는 산악회 따라다니며 걸었는데 이제 그러기에는 멀리 왔다. 산행의 즐거움보다 무릎보호가 우선이니… 그래서 높지 않고 험하지 않은 산, 용인 문수산 문수봉(403미터)에 다녀왔다.    

  

여름에는 숲이 울창할 것 같다. 등산길은 두툼한 솜이불 같은 낙엽으로 푹신푹신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친구 말소리가 안 들려 자꾸 되물어야 했다. 처음은 완만한 산책길이지만, 계단도 있고 낮은 산이라도 산은 산인지라 가파른 오르막도 있다. 그래도 대체로 평이하다. 문수봉은 은이성지 순례길과 연결된다. 김대건 신부가 은이 성지에서 미리내 성지를 오가며 미사를 거행했단다. 이 길은 경기 옛길의 일부로 경기 옛길은 경기도를 가로지르며 서울로 가는 오래된 길로 여러 코스의 옛길이 있다고 한다.


오르막을 지나 샛길로 빠지면 예상 못 한 바위에 마애불상이 있다. 이 지역에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다는데 절은 없고 대신 바위에 새겨진 두 구의 마애보살상이 있다. 고려 초기의 마애불은 어제 조각한 것과 같이 뚜렷한 모습이다. 얼굴과 몸의 비례는 맞지 않지만, 얼굴상이 어찌나 이쁘게 조각됐는지 계속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이쁜 마애불을 바위에 조각한 이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반달눈과 올라간 입꼬리의 미소는 나도 미소 짓게 했다.

한 번 더 오르막을 지나면 정상. 정상에서는 나무에 가려져 조망할 수가 없다. 나무로 둘러싸인 평상 같은 정상에서 집에서 내려온 커피 한 잔은 11월을 몽땅 마시는 듯했다.      


늦은 점심은 백암 전통시장에서 순댓국. 백암은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시장이 발달했고 특히 우시장이 유명했단다. 지금은 우시장 터를 알리는 표지만 있고 그 자리에 용달차들이 소 대신 서 있다. 그래서 이곳은 오래된 많은 순댓집이 있다. 수요 미식회에 나왔던 제일 식당, 백종원 3대 천왕에 나왔던 중앙식당 등 전문 식당이 많다. 분식집 당면순대는 인공 껍질 벗겨가며 잘 먹는데 진짜 순대는 썩 좋아하지 않지만, 이곳까지 왔는데 먹지 않을 수 없다. 병천 순대. 아바이 순대는 먹어 봤 백암 순댓국은 처음이다. 뜨끈한 국물, 냄새 없고, 뻑뻑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맛있다. 후식으로 옥수수 호떡 먹으며 한산한 시장 구경 끝에 단감 한 봉지 샀다.     


돌아오는 길에 본 나지막한 산과 적당한 논이 어우러진 이 지역이 아름답다는 생각과 함께 개발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나만의 욕심이 잠시 스쳐 갔다. 11월을 듬뿍 껴안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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