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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May 22. 2024

삶의 양면성에 관하여

김초엽 「므레모사」



더 끔찍한 쪽으로도 상상해본다. 그냥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다리를 뽑아버리면 어떨까?


*


므레모사는 유안의 상상에서 시작된다. 유안의 상상, 즉 유안이 자신의 가짜—사이보그 다리—를 뽑아버리는 거대한 상상이다. 여타 다른 기계처럼 정비가 필요한 다리를 가진 유안은 놀랍게도 무용수다. 그렇기에 유안은 무대 위에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다리를 뽑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유안은 언제나 그러지 못했다. 유안의 속에는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과 "넌 나를 지울 수 없"다는 말이 공존한다. 하나는 유안의 도약을 사랑했던 한나고, 다른 하나는 유안을 내내 따라다니는 그림자 다리란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안의 어느 면을 지지해줘야 마땅한 것일까.

"나를 결코 의심하지 않던 한나."라는 유안의 독백에서, 우리는 얼핏 유안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인물임을 알아챈다. 그러나 유안의 의심은 무척이나 가늘고 얇아서 제3자인 우리마저도 잘못 봤다고 생각할 겨를이 있다. 작중 내내 유안은 무미건조한 태도를 유지한다. 유안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러니까 큰 반응을 내세우는 건 유안의 다리 뿐이다. 자칫하면 유안이 유안의 삶에조차도 무심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유안은 도대체 왜 므레모사 투어에 참여한 것일까?

"끔찍하게도 많이 굽어지는 길"을 따라 유안과 그 일행은, 다름 아닌 므레모사 투어를 온 사람들이다. "수십 년간 꽁꽁 감춰뒀던 장소"의 첫 손님들. 유안은 모든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있을 때, 유안만이 유일하게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보인다. 므레모사는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죽음의 땅, 인간이 밟을 수 없는 지역"으로서 므레모사는 아무런 기능도 못했다. 유안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목적은 하나같이 뚜렷하다. 다크 투어리스트라서, 컨텐츠를 만들려고…… 유안과 동시에 목적이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는 인물은 바로 레오라는 남자다. 레오는 무언가를 숨겼다. 그것도 유안의 다리를 이용해서. 레오는 "우린 내일 함정에 빠질 거"라고 확언한다. 그것도 하필이면 므레모사에서. 레오의 목적도 이쯤에서 얼핏 드러난다. 레오는 다름 아닌 므레모사의 중대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저는 당신에게서 언제나 배우고 싶은 강인함을 봐요.


한나가 유안에게 했던 말들은 대체로 위와 같다. 인간의 강인함,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신념, 예전의 다리 없이도 굳건히 일어설 수 있는 인간. 그게 당신, 유안이라고. 그러나 한편으로 유안은 계속해서 통증을 느낀다. 유안은 그 통증을 한나로부터, 자신의 연인으로부터도 허락 받지 못한 것이다. 실존하는 통증을 누군가로부터 허락 받아야 하는 삶. 유안은 다리를 사고로 잃었을 때부터 없는 다리가 생생히 느껴졌다. 그러나 한나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작중에서 그것은 그림자 다리, 즉 "환상의 다리"로 통칭된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로 유안에게서 "신경의 재배열이 다"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그러면 유안이 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애당초 인간은 반드시 강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므레모사라는 장소는 그 자체로 마치 인간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겉보기에는 그렇다. 므레모사는 끔찍한 현장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의 공간이며, 이것은 주인공인 유안의 상황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유안은 사고에서 살아남았다. 비록 다리 하나를 잃었지만. 유안은 그걸로 정말로 충분했을까?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유안은 괜찮았을까?

만약 정말로 유안이 '괜찮았더라면' 무대에서 다리를 뽑고 싶은 충동이 없었을 것이다. 유안의 충동은 그림자 다리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유안이 생존자라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어떠한 사건에서의 생존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존재감의 표명. 우리는 때로 여러 가지 사건 중에서 생존자라는 정체성을 제대로 말하기 어려워한다. 생존자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제각각 생각하는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생존자는 남들에게 '인정 받아야만' 살아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정 받는 과정이란 참으로 끔찍하다. 어째서 생존자들은 자신이 생존자이며, 자신이 느끼는 바를 '증명'해야 하는가?

따라서 므레모사—유안의 여정이 담긴 이 소설은 증명의 일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안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고정된 것은 나를 편안하게 한"다고 하는 유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섬찟한 느낌까지 불러 일으킨다.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또 끊임없이 움직이는, 한 마디로 한나의 말처럼 "강인하"다. 그러나 유안은 한나의 말을 처음부터 부정했다. 부정했으므로, 유안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였던 한나로부터도 이해 받지 못했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이해 받아야만 비로소 사람이라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이제 유안은 누구로부터 이해 받을 수 있는가? 도대체 세상 그 누가 유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래전 이곳으로 돌아온, 바깥세상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변이된, 그리하여 그들의 원래 고향을 차지하고 그 자리에 고정되어 움직임 없는 삶을 이어가는, 므레모사의 진짜 귀환자들.


여기, 귀환자들이 있다. "고정되어 움직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귀환자들은 고목의 형태로 이곳에 있다. 유안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까지 왔다. 유안은 어쩌면 진작 자신을 이해할 사람은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유안은 "고정된" 이들이 필요했다. 자신이 느끼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을 행하는 이들이. 그리하여 누군가의 시야, 레오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비극으로 보이는 행태가 유안에게는 사막 사이의 오아시스, 구원인 것이다. 이처럼 므레모사는 모든 것에 양면적인 것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길을 떠나온 유안은 마침내 므레모사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연약한 자신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치유의 과정을 겪는다. 연약한 몸, "원래의 감각으로 되돌아가지 못"해 돌이킬 수 없어진 유안의 다리. 유안은 정적 속에서 비로소 "안전하고 안락했다." 유안은 단 한 번도 상실을 내딛고 일어서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 유안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짜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다. "고통을 딛고 또 한 번 정상으로 오르"는 것이 아닌, 그저 고통 속에 빠진 채 고요히 가라앉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유안은 므레모사의 귀환자들을 마주하고 나서야만 이해 받는다. 어쩌면 실체가 없는 귀환자들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유안 자기 자신으로부터 인정 받는다.

"나는 모멸감을 잊기 위해 더 많이 도약해야 했다."고 생각하는 유안의 심정은 단순한 수치심을 뜻하는 게 아닌,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수치심이다. 보통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는 바로 그 수치심. 사람들은 한 번쯤 누군가의 기대에 채 미치지 못한 경험이 있다. 김초엽은 바로 그 경험을 날카로운 감각으로 잡아채어, 므레모사와 유안의 경계에 풀어놓는다. 그렇게 유안은 마침내 고정된다. 보통의 사람들이 게으르고 한심하다는 바로 그 모습으로. 그러니 어쩌면 결말은 소설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유안은 고요와 적막만이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서 이 투어에 참석했으니까.

현대 사회는 모든 이들에게 바쁘게 움직이고 또 끊임없이 발전해나갈 것을 종용한다. 우리는 때로 그러한 사실에 피로감을 느끼고 쉽게 지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한다.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패배자이며,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발맞추지 못한 존재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너무도 빠른 시대 속에서 과연 모두가 정말로 발전하고 싶어하는가? 므레모사는 이 질문을 무엇보다도 뼈아픈 방식으로 제시한다. 삶의 방식에는 발전하는 것만이 아닌, 그저 쥐죽은 듯이 멈춰 있는 삶 또한 있다는 사실을 조곤조곤히 알려준다.


내가 바라는 건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원했다.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했다.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할 뿐이었다.


우리는 가끔 너무도 쉽게 남을 재단하고, 제멋대로 평가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것에서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므레모사는 죽음이라던가 비극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므레모사는 유안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그 무엇보다도 생생히 살아 숨쉬는 삶에 대해 말한다. 유안은 단순히 자유로워지고자 레오를 죽이고, 벤에서 빠져나온 게 아니다. 단순한 충동심으로 "당신들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 게 아니다. 유안은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유안의 살고 싶어하는 몸부림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삶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본다.

그렇게 김초엽의 소설, 므레모사는 움직임의 정의를 다시 한 번 통쾌히 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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