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가난하지 않았다
그 시절엔 세끼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먹을 게 없어서 굶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 동네에도 미군 부대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인 꿀꿀이죽을 끓여 먹는 집도 있었고, 보리만 삶아 먹는 집도 있었지만 그것을 가난과 연관 지어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는 밥을 먹기 싫어하는 어린이였다. 먹는 것 때문에 엄마와 노상 실랑이를 벌이던 일들이 생각난다. 엄마는 내게 밥을 먹이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나는 그런 엄마에게 화를 내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엄마는 몸이 약한 내게 온갖 것을 먹여 보려고 애를 썼다. 염소를 기르는 집에다 부탁을 해서 우유를 배달시켰는데 그것마저 먹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녔다. 아침마다 날계란에 들기름을 타서 억지로 먹이려고 나를 달래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 눈에 선하다. 내가 안 먹겠다고 떼를 써서 들기름을 참기름으로 바꾸었지만 여전히 냄새가 역해서 나는 그걸 삼키지 못했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그 일에 대해 사과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도 우리 집은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집이 무척 가난하다고 생각했고 어리석게도 그 생각을 오래 이어갔다. 내가 설정한 부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류 중고등학교로 꼽혔던 우리 학교에는 시장 딸을 비롯해 경찰서장, 전화국장, 소방서장, 판사, 의사 딸들이 동급생으로 재학했고, 사장님을 아버지로 둔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짝을 했던 친구는 같은 대학 음대를 다녔다. 강의가 끝나고 가끔 함께 귀가를 할 때면 그 친구는 집이 가난해서 유명 콩쿠르에 나가지 못한다고 신세 한탄을 했다. 그 친구가 입시를 위해서 교수에게 개인 지도를 받으러 갈 때마다 얼마나 큰돈을 레슨비로 냈는지 알고 있던 나는 그 친구의 가난타령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자기네 집을 가난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지난 시간의 눈으로 지금의 세상을 볼 때가 있다. 내 어린 시절의 아이들이 지금의 마트에서 먹거리를 보게 된다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환호할 것이다. 공주님이나 왕자님이 살고 있는 궁전에 온 게 아닌가, 두 눈을 비빌 것이다. 손이 곱고, 발이 시리고, 추워서 울어대던 그때의 아이들이 지금의 방한복을 입게 된다면 동화 나라를 떠올릴 것이다. 그때는 귀하거나 없었던 텔레비전과 냉장고와 에어컨과 핸드폰과 승용차를 내 어린 시절의 어른들이 갖게 된다면 황제가 된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더 먼 과거로 돌려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눈으로 지금 세상을 본다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이다. 쌀밥 한 번 먹는 게 소원이었을 그 시대의 누군가의 눈에 비치는 우리는 모두 굉장한 부자다. 시간이 아니라 공간을 바꾸어서, 지금 후진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부자일 수밖에 없다.
대형마트에 가면 과자와 사탕과 빵 진열대 앞에서 오래 구경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제 과자와 사탕, 빵을 절제할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면서부터 그것들의 유혹이 한층 강렬해진 것이다. 진짜로 먹게 되면 소화하기 힘드니까 과자와 사탕과 빵을 눈으로만 먹는 것이다. 동네 마트에 가서 몇 번 그런 모습을 보였더니 직원들이 돈이 없어서 못 사 먹는 줄 알고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과자 봉지를 만지작거리기까지 했으니까 오해를 받을 만했다. 아무튼 나이가 들면서 달콤한 디저트에 대한 욕심 말고는 특별히 바라는 게 없어져서 좋은 점이 많다. 젊은 날 한때 그토록 갖고 싶어서 나를 구속했던 옷이나 신발, 가방 같은 것들에 관심이 없어지니까 마음이 편하다. 어쩌다 백화점에 가도 사고 싶은 것이 없다. 얼마 전 유명 백화점에서 명품 가방 세일 행사를 할 때 우연히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길게 줄을 선 이들을 보면서 미소가 지어졌다. 한때 나도 무척 갖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가져가라고 해도 사양할 것이다. 값비싼 상품들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니까 참으로 자유롭다. 내가 부유한 지 가난한지의 판단은 대부분 남들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이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도 상대적인 것, 남들과의 비교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