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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Aug 28. 2023

영화 <더 웨일> 심리학적 분석

솔직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는 영화 더 웨일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더 웨일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와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간명했다. "정직해지는 것만이 자신을 구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이다"라는 것.

주인공 찰리는 생명이 다하기 직전 이 진리를 깨닫고 '솔직하자'라고 울부짖으며 간청한다.

이 글은 찰리의 절규에 메아리가 되는 글이 될 것이다.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죽음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상처를 받은 자녀가 있다. 자녀들은 커서 부모가 왜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지에 대해 분노한다. 부모가 나에게 '미안하다'라고 만 한다면 그동안의 설움과 화는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은데, 부모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항변한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을 들어 보면 자녀들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그러나 그 미안함을 당사자인 자녀에게 전하지 못하고, 제삼자인 다른 사람에게 죄책감을 토로한다. 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할까? 이는 사과하는 순간 부모로서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당하고, 부모의 권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부모가 자녀에게 사과할 수 있다는 건, 즉 솔직해질 수 있다는 건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모로서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자아의 한 측면을 죽여야 가능한 일이다.


찰리의 경우는 '이기적인 것'과 맞물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택한 대가로 가족에게 상처를 준 찰리가 딸 앨리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 번은 사랑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두 번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고, 스스로도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8년을 앨리를 돌보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가던 찰리에게 어느 날 실제 죽음이 찾아온다. 일주일 후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찰리가 이번에는 앨리에게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한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찰리에게도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죽음이 필요했다.



솔직해진다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직해진다는 것이다.


더 웨일의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솔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찰리의 친구 리즈와 선교사 토마스는 보는 내내 불편할 정도로 가식적이었다. 찰리는 그들보다는 좀 나았지만,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솔직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앨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앨리는 매 순간 솔직했다. 비록 그 솔직히 듣는 이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속마음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런 앨리의 솔직함은 8년 동안 갇혀있던 찰리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켰고, 찰리 자신의 욕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앨리를 다시 만나고 나흘째 되던 날, 마침내 찰리는 앨리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오로지 앨리를 위해서 만은 아니고, '태어나 자신이 잘 한일이 단 한 가지라도 있다는 걸 알아야겠다'는 것이 진짜 원하는 것이라고! 울부짖으며 고백한다. 자신의 욕망을 인정한 것이다. 비로소 정직해졌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이 말을 들은 전 아내 메리는 죽어가는 찰리의 절박한 심정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찰리 자신만큼은 자신의 욕망에 정직해짐으로 내면에 변형이 일어난다. 죽어있던 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한 것이다. 성난 태풍이 잠잠해 보였던 바다를 집어삼키고 내뱉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어낸 것처럼, 찰리는 눈앞의 위선들을 먹어 치우고 토해냄으로 죽어 있던 세포들을 일깨운다. 감추기에 급급했던 자신의 몸과 연인과의 사랑을 당당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그 순간을 기점으로 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 더 이상은 자신과 타인의 위선을 견디지 않고, 불필요하게 무언가를 감추는 데에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비로소 찰리 안에 앨리를 위한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우리가 정직해질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타인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타인을 아끼는 마음은 배려를 낳는다.


영화 속 리즈와 토마스는 자신이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도움을 주는 것에 혈안이 돼있다. 우리의 수많은 부모들이 그렇듯 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움을 주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도움을 주는 행위를 통해 얻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감출 때 상대는 모호한 부채감과 죄책감에 휩싸이게 되고,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극 중 리즈는 찰리를 돌봄으로 그가 계속해서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살도록 부추긴다. 만약 리즈가 자신 안의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인정했다면 어땠을까? 찰리가 스스로의 욕망에 정직해지면서 딸 앨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어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리즈 또한 찰리의 진짜 마음을 조금 더 일찍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욕망의 자리가 느슨해질 때 타인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리즈와 달리 앨리는 배려를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감추려는 에너지를 쓰지 않는 대신, 원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밝히고 타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찰리와 다시 만난 첫날, 앨리를 돕겠다고 나선 찰리에게 보조기구 없이 걸어보라고 요구한 모습에서 아빠 찰리에 대한 관심이 엿보였다. 자신을 버린 아빠가 8년 만에 나타나 진정한 사과 한마디 없이 아빠노릇만 하려고 했을 때 죽이고 싶은 미운 감정도 올라왔지만, 아빠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되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물어봐 준 사람은 딸 앨리뿐이었다. 찰리는 이런 앨리의 서툴게라도 타인을 아끼는 마음을 알아봤다. 타인을 아끼는 마음은 배려를 낳는다.



정직해지는 것만이 자신과 타인을 구원한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상대에게 밝히는 것에 초점을 둔다. 혹자는 찰리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욕망만을 실현시키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앨리를 변화시킨 건 찰리의 욕망이었다. 반대로 찰리를 변화시킨 것 또한 앨리의 욕망이었다.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욕망을 실현시키는 방식이 사랑의 핵심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고 싶어 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든다면 어떻게 될까? 엄청난 혼란감에 빠질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하는 실수가 이것이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일념으로 정성을 쏟지만, 자식은 그 사랑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지고, 부모의 사랑 전부를 의심하게 된다. 바로 이때 부모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자신의 욕망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이 마음을 온전히 자식에게 털어놓고 부모가 아닌 자식에게 선택권을 줄 수만 있다면, 자식은 부모의 욕망을 존중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 전부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조금씩 구성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 부모와 자녀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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