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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Apr 09. 2023

눈치와 수치

존재자체에 대한 무가치함


"언제부턴가 사람을 만나면 편하지가 않고, 집에 돌아와 한참을 웅크리고 앉아 있게 되는 일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그저 혼자 있는게 편해요...."

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사람들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다는 걸 알아차리거나 인정한다는 건, 흔히 말하는 '자존감이 낮다'는  즉,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므로 수치심도 함께 올라온다.  수치심이야말로 우리가 겪고 싶지 않은 최악의 감정이므로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이 쓰인다는 말 대신, '나..지금 우울하네, 항상 피곤해..'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수치심이 깊고 만연했던 사람이었다.   대학원시절 지도교수가 나의 어떤 '부분'을 지적했는데 주위 사람은 몰랐지만, 온 몸과 마음이 얼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내가 왜 그리 얼얼했는지 나중에 떠오른 이미지가 그 이유를 말해 주었는데,  전쟁터에 발가벗겨진 채로 총알받이가 된 어린아이가 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채로 그 자리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모습이 나였다.  내가 수치스러워 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만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수치심은 자신에게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가 없다는 것이 바깥에 드러날 것 같은 감정을 말한다.  단순히 실수할까봐, 비난이나 지적을 받을까봐, 인정 받고 싶어서의 차원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가 없다는 전제가 있는 상태에서 그것이 드러날까봐 공포스러워 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거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산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길은 만무하다.  



존재 자체에 대한 무가치함


수치심은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생겨날 수 있다.  아이는 태어나면 곧바로 말을 할수 없기 때문에 감정의 교류를 통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데 감정이나 행동을 반영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길이 없어진다.  아이가 먼저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소중한 사람이 보는 눈을 통해서 아이를 안아줘야 한다. 이 때 아이앞의 어떤 대상이 이미 수치심이 내재화 되어 있다면 아이의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감정에 반응해 주기 어렵다.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는 아이로서의 미숙한 행동을 견디지 못하고 비난하거나 화를 낼 것이다.  또 다시 부모의 해결되지 않은 수치심이 아이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존재로 부모의 돌봄은 이들에게는 생명과도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자기 주위 상황을 살피고 마치 식물이 살기 위해 태양에 향하듯이 그들 역시 살기 위해 부모의 요구를 따라간다" -수치심의 치유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사람인지를 알 게 되었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품고도 남을 일이다.  이렇게 사는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면서 겪을 수많은 좌절과 상처를 견뎌낼 수 있을까?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며 사는데도, 무언가를 이루고 있음에도 내면은 공허하고 기쁘지 않다.  이 마음마저 알아차리거나 털어 놓을 수 없다. 그저 우울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성취에 집착하다가 번아웃을 반복할 뿐이다.



이제 더 이상 눈치보고 살고 싶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어린시절부터 켜켜이 쌓아온 수치심은 공교롭게도 '발각'되면서 전환될 기회를 맞는다. 최선을 다해 끊임없이 애쓰고 사는데도 왜 어떤 자리에 나서려고 하면 떨리는지,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고 쉬고만 싶은지, 도대체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삶으로 이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다른 사람 눈치보고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울이나 번아웃이나 분노와 불안이라는 증상이라면 이제 더 이상은 눈치보고 살고 싶지 않다는 내면의 외침이 증상이자 기회다.



부모가 나에게 심어준 '나'라는 사람의 정체가 나의 전부를 대변할 수 없다.   그것은 어디 까지나 그들의 생각이고 한계이지, 나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이미 열심히 살아온 구력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원하는 대로의 생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존중과 사랑의 눈빛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다.  무시가 아닌 관심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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