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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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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 Jul 21. 2023

화곡동 감정 서퍼의 포부

일상조각_02


이른 아침, 집을 막 나서는데 손등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오전에만 반짝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를 봐두었기 때문에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출발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 한 시간쯤 되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웬걸, 도저히 그냥 맞을 수 없을 만큼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역을 나서기 전에 편의점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난처한 일 까지는 아니었다. 편의점에 도착하니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모여들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열된 우산을 우르르 집어 들었다. 나는 투명한 비닐에 남색 테두리가 둘러진 우산을 집어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가장 먼저 눈에 띄어서였다. 계산대를 향해 줄을 서고는 그제야 가격표를 찾아보았는데 - 세상에, 가격이 쓰여 있지 않았다. 내 앞사람의 우산을 살펴보았다. 내가 고른 크기와 비슷하고 군더더기 없는 검은색 비닐 재질. 스캔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점원이 가격을 안내했다.

/

 “구천 원입니다.”

/

순간 동공이 흔들리고, 속이 상당히 쓰려오기 시작했다. 오천 원쯤 할 줄 알았는데.. 집에도 널린 이 비닐쪼가리를 구천 원이나 주고 사야 한다니!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온전히 준비성 없는 내 탓인 데다가, 지금 상황에 선택권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차례가 되어 점원에게 우산을 내밀고 단말기에 카드를 꽂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내 피 같은 구천 원을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점원은 되돌릴 수 없게 우산의 포장지와 꼬리표를 제거해 주고는(손님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계셨다.) 바코드를 찍으며 말했다.

/

“육천 원입니다.”

/

순간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 시꺼먼 우산보다 훨씬 예쁘고 싸네?! 심지어 이건 딱 한 개 남았었는데!’ 우산이 더 예뻐 보이기 시작한 건 장담하건대 확실히 기분 탓이었다. 쓰지 않아도 될 돈 육천 원을 써놓고도, 나는 어쩐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며칠 내내 흐렸던 날씨에 괜스레 우울했던 기분이 뚝 그쳤다. 축 쳐진 내 기분을 달래주려 준비된 깜짝 이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일과를 보냈다. 집에 돌아가는 길, 이제는 맑게 갠 하늘을 보면서 ”아, 우산 샀는데! 비 와줘야 맞지!”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 문제가 없이도 버거울 만큼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비가 더 내린대도 받아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있는 편이라, 쉽게 고꾸라지는 기분이지만 반대로 소소한 일에도 힘을 받아 거뜬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섬세한 감성을 주셨고, 그것을 온전히 선물로 여길 수 있게끔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셨다. 한때는 내 마음 속 감정의 크기가 버거워 심란한 낮을 보내고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30년 경력의 감정 서퍼(surfer) 로서 이 기복 있는 감정의 파도타기를 즐기기까지 한다.


바닥에 흩뿌려진 햇살 조각이나 초록을 반짝이며 흔들리는 나뭇잎만큼 하루에도 수천번씩 마주치는 소소한 풍경에도 기쁨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주신 이 선물을 통해서 나 또한 많은 곳에 행복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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