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조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비 Jul 23. 2023

두 가지가 없는, 밋밋하고 고요한 주말

일상조각_03


커피 머신이 고장 났다.


아무리 만져봐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서 결국 A/S접수를 했다. 그 바람에 얼떨결에 커피머신 없는 주말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집에 없는 게 하나 더 있다. 남편. 2박 3일의 일정으로 남편이 집을 비웠다. 내 일상에 당연한 존재였던 두 가지가 없는 허전한 주말은 아주 밋밋하고 고요하다. 갓 내린 커피 향기가 없고 남편의 장난스러운 말소리가 없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도 제법 즐기는 나지만 오늘은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어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할 일을 찾아 헤맸다. 빨래를 돌려서 집 안 가득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을 퍼뜨리고, 달그락 거리며 설거지를 하고, 뚝딱거리는 소음을 내며 여기저기 청소를 했다. 그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 감정은 뭘까..? 외로움이라기엔 한 톤 밝고, 무료함이라기엔 조금 더 생기가 있다. 마냥 부정적인 감정은 또 아닌데, 그렇다고 밝은 느낌도 아니다. 이건 대체 뭘까.




평소의 주말 또한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내 주말 일과만 따지고 보면 평소와 거의 차이가 없다. 남편은 주말이 가장 바쁜 사람이라 같은 공간 안에 있더라도 함께 무엇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커피머신도 그렇다. 커피 없이 보내는 주말도 숱하게 많았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나에게 아주 간절한 물건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부재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그냥 100% 마음의 문제인 거다. 그 사람이 없어서 손이 아쉽거나, 커피머신이 없어서 일상에 제약이 생기는 건 하나도 없다. 그저 그 '부재'가 마음에 선명할 뿐이다. 그래, 이도저도 아닌 이 애매한 감정은 아무래도 이 괴리감에서 오는 것 같다. 몸은 괜찮은데 마음은 안 괜찮다. 그래서 외롭지도 아니지도 못하고, 무료하지도 그렇다고 흥을 내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유를 알고 나니 그냥 괜찮았다. 딱히 이 감정을 환기시키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누군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오늘은 마침 빈자리가 있으니 그냥 머물다 가라고 하기로 했다. 내 마음에 남편이 이만큼이었다는 걸, 내가 커피머신을 이렇게나 애정했던걸 알았으면 그걸로 되었다.




내일이면 커피 머신은 수리 센터로 출발하고, 남편은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다시 꽉 들어차면 다시 느끼기 어려울 이 감정을 기록해 두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밤은, 선명하게 드러난 내 애정의 모양을 여유롭게 감상하며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난 자리'를 통해 그 소중함을 알게 되어서일까 - 허전했던 마음의 크기보다 더 넘치게 반가울 것 같다.

“우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빨리 와 얘들아!”

매거진의 이전글 화곡동 감정 서퍼의 포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