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북적이는 도심의 거리. 바쁘게 스쳐가는 사람들의 궤적에는 언제나 외로움이 역동성 있게 스친다. 사람들의 색깔은 섞이지 못해 다양했고, 외로운 도시의 색은 그렇기에 회색이 아니었다. 아스팔트에 기름이 반짝이는, 그런 어두컴컴한 무지갯빛이었다.
그런 회색 도시 속, 한 회색 건물은 뱃속에 낡은 나무계단을 숨겨놓고서 객을 기다렸다. 대형서점과 다른 적당한 아담함이 나는 좋았다. 차가운 칼바람에 베이다 겨우 나무문을 열면 완벽하게 차단된 안락함이 풍경으로 딸랑거린다. 책바다를 유영하다 보면 인물들을 닮은 초상들을 구비해놓기도 하던 그 서점. 글로 된 초상들은 어떤 사진보다도 본인을 닮아, 나는 거기서 만난 인연의 초상들을 불가항력적으로 품에 안았다.
빼곡하게 진열돼있는 책나무들 사이로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이 있었다. 힘겹게 나를 받쳐주는 듯한 삐걱거리는 나무소리를 들으며 새로 온 나무의 냄새를 맡는다. 종이 신참과 나는 네모난 나무 프레임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회색빛 무지개가 잔잔한 음악에 버무려져 리드미컬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트리, 캐럴송, 크리스마스 카드가 있던 그곳이 다음 해를 이야기해주었다. 내 젊음은 제일서적에서 내년을 양도받아 살아왔다.
그런 어느 날 내년을 전달받을 젊음과 공간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대형 서적에 밀려 경제난에 휩쓸리다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새로운 건물이 낯선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서점의 낡은 계단 위로 내 젊음과 지인들과 추억이 오갔었다. 어느 날 발자국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림자를 잃은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서점에서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귀가한 몇 권의 책만이 나의 그림자를 기억한다.
몇 개의 그림자와 몇 개의 발자국을 잃고서야 '영원'이라는 말의 덧없음을 난 깨달았다. 그림자들은 발자국 위에서 그들의 한때가 계속될 줄 알았다. 품에 안고 함께 귀가한 책들이 잔뜩 낡은 채 나를 바라본다. 젊은 날 버스를 졸졸 따라오던 달처럼 하얗게 습윤한 공기를 함께 맞은 책들... 내 서적의 머리글은 이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