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D black star. 50대 (여)
몇 해 전 새 달력 숫자 너머 경자년 활자를 보며 ‘올해가 쥐띠 해구나’ 상기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세월을 실은 달력 위를 거닐던 어느 날, 나는 낡은 서랍에서 새로운 경자년을 발견했습니다.
낡음을 덧칠하는 햇살이 밀물처럼 스며와 조금 금이 간 자개장롱에다 달라붙었습니다. 고향의 안방은 엄마 품처럼 두툼한 햇살로 찰박하게 따사로웠고요. 나는 엄마 냄새가 밴 이불을 둘둘 말고서 뜨끈한 방바닥을 구르며 나만큼 나른한 휴일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햇살이 흘러내리는 근원지인 커다란 안방 창문 아래 나지막한 서랍장에 시선이 갔습니다. 티브이를 받치고 있는 서랍장은 턱이 조금 빠진 채 숨 쉬고 있었지요. 서랍장에 매달린 고풍스러운 손잡이가 세월의 이끼처럼 녹이 슬어 햇살 아래 반짝거렸습니다.
나는 입 벌린 서랍장을 닫고자 이불속을 빠져나와 티브이 서랍장에 다가가 앉았습니다. 입 벌린 서랍장 내부는 얕았기에 금새 무엇이 들었는지 보였습니다. 오래전 엄마 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이었어요. 흑백의 사진들은 빛바랜 지난한 세월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사진처럼 낡은 앨범 속에서 서랍장으로 안착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맥없이도 생명력 있는 사진 덕분에 갑자기 젊어진 엄마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갓 스무 살이 됐을 사진 속 앳된 여인은 친구들과 꽃 봉우리가 피어나는 시간 속에서 영원으로 갇혀 있었습니다. 열 명 가까운 여인들은 둔덕에서 옹기종기 찍은 사진 속에는 지금 중년의 나보다 훨씬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모두 하얀 저고리를 입고 짙은 색상의 치마를 단정히 입은 그녀들 중 유독 들꽃 한 다발을 들고서 미소 짓고 있습니다. 꽃잎을 든 채 꽃잎 같은 그녀가 흑백의 뒤안에서 환히 웃고 있습니다.
흑백의 엄마와 사진을 쥔 나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무겁게 지고도 환히 웃는 꽃 같은 여인... 인생이 무거운지도 모르고도 웃고, 알고 있던 중년에도 말없이 웃었고, 꽃이 바싹 메마르게 지기까지의 모든 기억들을 지운 채 휠체어에 앉은 지금도 미소 짓는 그녀는 한결 꽃잎처럼 곱습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왜소해진 현재의 그녀 대신, 영원으로 박제된 사진 속 그녀를 밖에서 아무리 손짓해도 나올 수 없는 그녀를 보며, 이제는 사진 속 그녀보다 더 늙어버린 중년의 나는 고장 나지 않는 시계 소리와 같이 넋두리합니다.
제 넋두리에도 흑백의 앳된 여인은 여전히 웃고만 있습니다. 사진 밖에서 투명하게 일렁이는 중년의 딸을 언제까지나 지켜주겠다는 듯이 변함없는 온화함을 남긴 채...
꽃을 품고 꽃자리에 앉아 엄마가 박제해둔 그해 경자년. 모르긴 해도 그 시절이 내가 새 달력에서 목격한 경자년의 시계 초침만큼 평화롭진 않았을 겁니다. 단아한 한복을 입고서 꽃다운 찰나를 영원으로 남기고, 흑백 사진 밖으로 걸어갔을 그들의 눅진하게 굳어버린 사계를 생각합니다. 흑백 사진 속에서 만난 엄마의 경자년과 몇 해 전 달력에서 만난 나의 경자년을 포개자 그저 한 사람의 인생이자 계절이었습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시간 여행을 하는 신비한 한 장의 박제된 찰나. 평범한 일상의 것들이
사진을 만나 특별하게 비추는 바람같은 순간을 나는 경이롭게 바라봅니다. 지금 스치는 바람결에도 묻은 일상의 특별함을 오늘은 카메라 대신 까만 눈으로 깜빡깜빡 새기는 오후입니다.